197화.
푸른 보릿대가 바람에 살랑거렸다.
나를 포함한 스무 명의 영애들은 언덕 한복판에 지어진 여관에서 그 평화로운 정경을 바라봤다.
가만히 있던 아리나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아니, 이런 데 양장점을 차렸는데 손님이 온다고요?”
마침 안에서 차를 가지고 나오던 리안이 그 말을 들었다. 리안이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저도 신기해요.”
대부호 상단의 딸인 푸른 머리 영애가 옆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일어나 리안을 도와주었다.
“자리가 이렇게 외진데도 손님이 있다니. 역시 여주 버프 앞에 장사 없네요.”
아리나도 따라 일어나 리안을 도왔다.
“하긴 리안 영애 원작이 주변 풍경 예쁘기로 유명했잖아요. 자연 속에서 영감을 얻고 그랬던 거 같은데.”
아리나는 리안의 원작을 잘 아는 모양이었다.
“네, 그랬죠. 영애, 앉아 계세요. 제가 할게요.”
리안은 빠르게 손을 놀려 순식간에 잔을 세팅하고 차를 채웠다.
저것도 ‘금손에 빠른 손’ 버프인가. 여전히 손이 야무졌다.
“근황을 나누는 것도 좋지만, 워낙 급한 사안이니까 리안 영애 얘기부터 하죠.”
디아나가 바로 본론을 들이밀자 리안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녀는 초조한 눈으로 푸른 초원을 흘깃거렸다.
“맞는 말씀이세요. 일단 슈피겔을 내보내긴 했지만 금방 돌아올 거예요. 오래 떨어지면 불안해하더라고요.”
그 말을 하며 리안은 얼굴을 붉혔다. 그러자 먼저 도착했던 영애들의 얼굴도 덩달아 붉어졌다.
이 분위기 뭐야? 왜 그러지?
나는 늦게 와서 남주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고, 먼저 도착한 영애들과 리안 영애가 아주 어색하게 이 테이블에 앉아 있는 것만 봤다.
근데 분리불안 남주랑 이 외진 곳에서 뭘 하고 지내시는 걸까? 같이 돌아다닐 만한 곳도 없어 보이는데. 밭일하시나?
그런데 그때 커뮤 중독 키스카 영애가 노트북을 보며 손뼉을 쳤다.
“누가 벌써 업로드율에 대해 알아냈나 봐요.”
우리가 리안을 만나러 오는 동안, AI에게 상황을 물어보기로 한 영애들이 답을 찾은 모양이었다. 모두가 키스카의 말을 기다리며 침묵했다.
“아, 이것도 분량 문제라네요. 남주 시나리오로 전개가 흘러가긴 하는데 어쨌든 플레이니까 기록되는 속도가 유저마다 다르대요.”
키스카는 계속 설명했다.
“[기]-[승] 때처럼 에피소드를 많이 획득하면 글자 수가 많이 올라가고, 필터링에 걸리면 글자 수가 차감돼서 느려진대요.”
“결국 또 글자 수 문제군요.”
나는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테이블 위로 기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먼저 왔던 영애들이 리안을 빤히 쳐다봤고, 리안은 그 시선을 피해 또 얼굴을 붉혔다.
뭐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침묵 속으로 푸른 머리 영애의 밝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래도 오늘은 글자 수가 많이 수집이 됐을지도 모르잖아요! 계속 남주랑 있었다면서요. 영애, 얼른 남은 분량 확인해 봐요.”
“아 네, 확인할게요.”
리안은 기대감을 품은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상태창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그런데 허공을 보던 리안의 얼굴이 굳어졌다.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훌쩍이기 시작했다.
“큰일이에요. 저 분량을 못 채웠어요.”
“헉, 어째서요?”
나보다 더 늦게 왔던 아리나가 물었다.
“방금까지도 남주랑 붙어 있었다면서요. 남주랑 계속 있는데 대체 왜 분량이 안 채워져요?”
리안이 울먹이자, 영애들이 모두 바짝 귀를 세웠다.
“그게……. 일주일 동안 밖을 안 나가서. 생각이…….”
아리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사색도 분량에 포함되는데. 영애네 소설 배경 예쁘다고 유명하잖아요. 창밖 보고 묘사만 해도 1만 자 채울 거 같은데.”
그러자 리안은 더 당황한 낯으로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떨궜다.
“사실 같이…… 방을 안 나가서…… 창밖을 볼 시간이…….”
침 넘어가는 소리가 침묵 위로 얹혔다. 간간이 심장 뛰는 소리만이 그 틈을 파고들었다.
아리나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설마, 일주일 내내? 방에서?”
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절륜남 키워드가 있더라고요.”
주어가 생략되었지만, 누구를 의미하는지 모두 이해하고 말았다.
테이블 위로 숙연한 침묵이 감돌았다.
왜 그녀가 글자 수를 채우지 못했는지 모두가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때, 알람이 울렸다.
[TOP 100 영애는 심의를 준수합니다. 19금 생각은 모두 자동 필터링 됩니다.]
대화를 조심하라는 무언의 경고였다. 고작 #절륜남을 입에 담았을 뿐인데 저런 알람이 뜨는 걸 보면 리안의 서사가 얼마나 많이 필터링 됐을지 가늠할 수 있었다.
리안이 울먹이며 말했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어쩌죠.”
촉촉하게 젖은 청순한 눈망울이 테이블에 앉은 영애들의 동정심을 자극했다.
동정심은 곧 열정으로 불타올랐다.
아리나가 테이블을 쾅 치며 벌떡 일어났다.
“다들! 도와줍시다. 리안의 분량을 채워 봐요. 에피소드 그까짓 거 만들면 되죠!”
디아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여기 다 로판 좀 읽은 사람들 아닙니까? 좋아하는 에피소드 하나씩 말해 봅시다.”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그래서 일단 질러 봤다.
“#궁중암투 어떨까요?! 여기 황제 두 분 계시니까, 디아나랑 안젤리카 영애가 둘이서 리안 영애의 옷을 받으려고 싸우는 거예요!”
“하긴 우리 리안 영애 #직업물 #능력여주니까 황제한테 실력 인정받는 에피소드면 결말에 딱 어울리네요.”
가을국의 #명의여주 아샤가 내 생각을 칭찬해 줬다.
“아! 우리 마왕도 있잖아요! 겨울국으로 가서 리안 영애가 옷을 납품하다가 마왕한테 납치를 당하는 거예요!”
“……갑자기요?”
“제가 해 봤는데, 죽을 고비 넘길 때마다 글자 수가 폭등하더라고요. 생사고비가 글자 수 채우기 딱이에요!”
처음 보는 영애가 그렇게 말했다. #기사여주라고 하셨는데 현생에 나가면 그녀의 글을 읽어 보고 싶어졌다.
죽을 고비를 넘기는 #기사여주.
내 서재에 저장.
키스카가 고개를 저었다.
“음, 마지막에 로맨스가 부족하네요. 리안 영애, 가뜩이나 선택도 늦게 했는데. 제가 동물들 끌고 올 테니까 디즈니식 이벤트 한 번……!”
리베라가 키스카의 말을 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사고비 좋네요. 제가 마왕한테 영애를 정원으로 데리고 나오라고 할게요. 물론, 로맨스도 좋고요. 슈피겔이 리안을 구하러 정원으로 오면 되겠네요.”
“아, 거기서 사랑을 확인하는 전개요? 좋다 좋아.”
다들 순식간에 에피소드를 짜며 즐거워했다.
노트북에 대화 내용을 적던 키스카가 고개를 들었다.
“리베라 영애, 내일 그냥 연회를 열어 버리죠? 로판의 꽃은 불꽃놀이잖아요. 리안 영애가 사랑 확인할 때 냅다 불꽃 날려 버려요!”
“찬성 찬성! 누가 #마녀영애한테 연락해요. 불꽃놀이 해 달라고.”
“아, 그거 제가 할게요. 저 불의 이능을 쓸 수 있거든요.”
“영애 이능은 불꽃놀이가 아니라 불기둥 아닌가요? 그런 건 공연에서 써야 할 거 같은데.”
“공연! 영애들, 우리 노래를 빼먹었어요. 비지엠도 깔아야죠!”
“누가 #프리마돈나 영애한테 메시지 좀 보내 봐요. 내일 노래 좀 불러 달라고 합시다.”
“제가 보낼게요!”
붉은 머리칼의 영애가 얼른 답했다.
그때 조용히 있던 한 영애가 끼어들었다.
“여기 어디에 출생의 비밀은 못 넣나요? 마지막에 출생의 비밀이 밝혀져야 쫄깃할 것 같은데.”
순간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눈치 좀 챙겨 달라는 다수의 시선에 영애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취향 존중해 줘요. 마이너 무시하는 거 아닙니다.”
맞는 말이라 영애들이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출생의 비밀 재밌죠.”
“그럼요. 클래식 좋아요.”
“타인의 취향을 존중해야 하는데, 제가 부족했습니다.”
“사과를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순식간에 굵직한 에피소드가 완성됐다.
확실히 궁중암투, 마왕의 납치, 남주의 구출, 불꽃놀이, 무도회가 들어가면 10만 자는 거뜬히 채울 것 같았다.
대환장 파티라 그렇지.
머릿속으로 그 장면들을 떠올리던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저희 그걸 이틀 만에 준비할 수 있나요?”
아무리 세상의 편애를 받는 사람들이라 하지만, 저 모든 걸 준비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물리적으로 소요되는 시간이 있잖아. 무대도 만들고, 정원도 꾸며야 하고.
“이 인원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손이 많아지면 가능하겠죠.”
시에나가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
제목: (마지막ㅠㅠ...)번개 공지/ 내일 겨울국 황성 연회 오실 분? [23]
『커뮤니티로 다시 돌아온 우리 리안 영애를 환영해주세요! (박수)
그리고 내일 리안 영애의 [결]을 위해 황성에서 연회를 진행하려고 합니다.
아마도 여기서 갈 수 있는 마지막 연회겠죠? ㅠ_ㅠ
저녁 식사/ 불꽃놀이/ 프리마돈나 콘서트는 진행 확정입니다.
함께 준비하고 즐기면 좋을 것 같아서 글을 올려요.
당연히 참석을 위한 스크롤도 무료 지급합니다. 주소 알려주시면 마녀 영애님이 전달해주시기로 했어요♥
가족이나 남주, 친구, 애완동물 등등 제한 없이 모두 데려와도 됩니다!
관심 있는 영애들은 단체 채팅방으로 들어와 주세요!
(주소)』
└ 헐 바로 들어감
└ 흑흑 나는 내일 가족들이랑 보내기로 약속했는데ㅠㅠㅠ 아쉽다ㅠㅠ
나는 게시글 창을 내리고 침대로 옮겨 자리를 잡았다.
리안 영애의 집에서 계속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금방 돌아온 남주 때문에 우리는 채팅으로 대화를 이어 나가기로 하고 돌아갔다.
채팅방에 접속한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몇 번 깜빡였다.
79명?
이 정도면 거의 다 들어온 거 아닌가.
[시에나: 혹시 플로리스트나 연회 담당하는 #직업물여주 계시나요? 야외 연회장 만들려는데 여주 버프 받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
[테티스: 저 #귀족여주인데 하우스 파티 진행하는 안주인 버프 있어요! 제가 할게요!]
파티를 진행하는 버프라니.
잠시 그녀의 전개를 상상하던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같은 #귀족여주인데 왜 이렇게 삶이 달라? 나는 사무 노동만 잔뜩 시켜 놓고!
[리베라: 저 근데 뭐 하나만 불어도 되나요?]
[시에나: 그럼요!]
[리베라: 내일 프리마돈나 영애 공연이죠?]
[시에나: 맞아요. 아까 참석한다고 확인해줬어요.]
리베라가 갑자기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리베라: 야외 연회장에 무대도 설치하나요? 저 프리마돈나 영애 공연 보고 로그아웃할 생각 하니까 너무 설레요 ㅠ 저는 영애 공연 처음 보니까 제일 잘 보이는 자리로 배치해주세요ㅜㅜㅜㅜ 흑흑]
[‘ ’: 공연 무대는 제가 만들 거예요. 마석으로 확대경도 만들어 둘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제대로 즐기세요 ㅋㅋ]
[리베라: 감사해요. 그런데 ‘ ’ 님은 누구세요?]
[시에나: 마녀 영애예요. 우리가 쓰는 스크롤의 80%는 저분이 생산하는 거예요. 연회에 참석하는 영애들 스크롤도 우리 마녀 영애님이 협찬해주셨고요.]
[하이디: 자, 관대한 마녀 영애님께 하이디와 함께 다 같이 박수박수박수! >_<]
[키스카: 3인칭 쓰지 말라고요…… ㅂㄷㅂㄷ…….]
잠시 채팅창에 침묵이 일었다.
모두가 자연스럽게 동로판 후궁 영애의 텐션을 거부했다.
[‘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 아 맞다!]
[‘ ’: 응원봉 만듭시다! 여기 마정석 광산 소유주 없습니까?]
마녀 영애는 갑자기 뭔가 생각이 났는지 사진을 보냈다. 응원봉을 그린 디자인 초안이었다.
[‘ ’: 다음 공연 때 이걸 만들어볼 생각이었는데 이번에 해야겠네요.]
전에 프리마돈나의 집에서 응원봉을 만들어 보고 싶다고 한 적이 있었는데, 진심이었나 보다.
[카탈리나: 저요! 저희 공작가에 마정석 광산 5개 있습니다.]
금세 지원자가 나타났다.
신난 마녀 영애가 이모티콘을 몇 개 보내며 화답했다.
[‘ ’: 마정석 몇 개만 빼돌려 와요. 내가 마력으로 발광 응원봉 만들 테니까.]
[리베라: 아아, 저 너무 기대돼요. 심장이 터질 것 같은데 어떡하죠?]
[아샤: 그러면 개인 메시지 보내요. 약 가져다줄 테니까.]
[리베라: 이런 완벽한 세상이 있었다니……. 망할 시스템 대체 왜 날 50년이나 잠재운 거냐!ㅠㅠㅠㅠ]
리베라는 기뻐하며 슬퍼했다.
[리안: 다들 정말 고마워요 ㅠㅠ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ㅠㅠ]
[라리사: 에이~ 이게 무슨 은혜예요. 우리 좋자고 하는 건데 ㅎㅎ]
[라리사: 그나저나 우리 아빠 무서워하는 분들 많은 거 알지만 그래도 내일은 봐줘요ㅜㅜ 마지막은 가족끼리 같이 보내고 싶어요ㅠㅠ]
[아리나: (시누이 갑질에 끌려가는 평민 1)]
[라리사: 새언니 내일 봐요^^♥]
[아리나: (ㅜ.ㅜ)]
잡담인지 업무 분담인지 모를 대화는 한 시간가량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