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남주는 노력했다. 정말로 리안이 이해하길 바라며 그의 감정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알려 주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깨닫는 순간 기차를 탔다고 했다.
리안은 남주의 이야기를 들으며 확신했다.
그 유저는 남주 교환권을 썼다.
리안은 창밖으로 구름이 흘러가는 모습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다만, 이상한 지점이 있었다.
그 유저는 남주 교환권을 쓰는 순간 슬롯 제거권도 사용한 것 같았다.
남주는 감정이 변하는 걸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고 표현했다.
만약 슬롯에 계속 남았다면 여주를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오랫동안 갈등했을 거다.
하지만 한 번에 감정 변화를 느꼈다면, 유저가 슬롯 제거까지 동시에 했다는 소리였다.
‘왜?’
재앙까지 끝난 지금에 와서 그녀가 왜 마음을 바꾼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순간이었다.
딸랑.
가게에 달린 종이 맑은 소리를 퍼트렸다.
리안은 잠시 시장에 나간 남주가 돌아온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힐긋 시선만 던졌다. 그리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시골 마을에 어울리지 않게 화려한 차림을 한 분홍색 머리의 여자가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잘 지내셨어요?”
그녀는 레이스 장갑을 낀 손을 가만두지 못한 채 서 있었다.
“슈피겔이 말했는지 모르겠네요.”
슈피겔. 그게 남주의 이름이었나 보다. 그녀는 입을 달싹이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횡설수설하게 사과를 늘어놓았다.
“정말 미안해요. 너무 취향이라 제가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그때는 외형에 심취해서 선이 보이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그러다 이번에 재앙을 겪으면서 연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선택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고, 악착같이 캐시를 모아 바로 아이템을 샀다고 했다.
“영애한테 큰 상처를 줬다는 거 알아요.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도 염치가 없는 거 같아서……. 여기 오면 안 되는 게 아닐까 고민 많이 했어요. 하지만, 그래도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요.”
분홍 머리의 여주는 맑은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영애의 고민이 옳았어요. 선을 추구하는 건 당연한 건데 그 고민을 가볍게 여기고 제가 나쁜 선택을 했어요.”
그녀는 긴장했는지 입술을 달싹이다 다시 말했다.
“덕분에 저도 어떻게 해야 다 같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건지 느꼈어요. 다시 현생으로 돌아가도 저는 이 마음을 잊지 않을 거예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분홍 머리 영애는 마치 판결을 기다리듯 긴장한 채 그 적막을 견뎠다.
자박.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이름이 뭐예요?”
“네?”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겠어서…….”
고개를 들자 말끝을 흐리는 리안이 보였다. 분홍 머리 영애는 얼른 제 이름을 말했다.
“루비라고 부르세요.”
“네, 루비.”
루비는 리안의 말을 기다렸다.
“고마워요.”
리안은 진심이었다.
“후회하는 건 쉬워도 직접 사과를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닌데, 먼 길 와 줘서 고마워요.”
끝이 가까워지고 있는 지금, 시간은 아주 소중했다.
그럼에도 루비는 제 잘못을 인정하고, 어떻게든 사과를 하기 위해 리안을 찾아왔다.
리안이 사과를 받아 줄지 확신도 없으면서, 끝나기 전에 리안의 상처를 조금이라도 덜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그 진심이 리안에게 닿았다.
정말로 리안은 상처가 회복되는 기분을 느꼈다.
딸랑.
“리안, 시장에서 제가 뭘 사 왔는지 알면 놀랄…….”
환하게 웃으며 가게로 들어온 슈피겔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루비. 당신이 여길 어떻게.”
당황한 루비가 손을 내저으며 빽 소리를 질렀다.
“아니, 왜 이 타이밍에 나와!”
삼자대면도 아니고!
루비는 혹시라도 오해를 살까 봐 남주를 보며 다급하게 말했다.
“오해하지 말아요! 저는 당신이 아니라 리안을 만나러 온 거예요!”
“왜죠?”
“그, 그게…….”
“외상을 갚으러 오셨어요.”
리안이 곤란해하는 루비를 대신해서 대답했다.
“황도를 급하게 떠나는 바람에 드레스 대금을 받지 못했거든요.”
루비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맞아요! 한두 푼도 아닌데 모른 척할 수도 없고.”
리안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조금 이따가 다시 와 줄래요?”
슈피겔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를 방해해서 미안합니다.”
그는 정중히 사과하고 제 방으로 돌아갔다.
루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 잘생기긴 정말 더럽게 잘생겼네.”
루비는 촉촉해진 눈으로 리안을 보며 다시 한번 강조했다.
“리안 영애, 부디 알아주세요. 정말 제 취향이에요. 제가 눈이 뒤집혔을 만했어요.”
루비는 혀를 차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저는 핑크색 눈동자가 저렇게 잘 어울리는 남주는 처음 봤어요.”
동의하듯 미소를 짓던 리안이 고개를 까닥 기울였다.
“핑크색 눈동자요?”
“네, 꼭 루비 같지 않아요?”
“무슨 소리세요. 슈피겔은 청회색 눈이잖아요.”
“아이, 참. 영애. 저렇게 선명한 핑크색을 어떻게 청회색이랑 헷갈리세요.”
“분명, 청회색이에요. 제가 색감에 얼마나 예민한데, 잘못 봤을 리 없어요.”
루비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는 보석상을 운영하고 있어요. 매일 깨끗한 원석의 가치를 판별하는 일을 한다고요. 저 순도 높은 핑크색을 어떻게 무채색 취급하세요.”
“청회색은 무채색이 아니라 청색에 가까운……. 아니 이럴 게 아니라 직접 다시 보세요.”
리안과 루비는 바로 슈피겔의 방으로 갔다. 문을 두드리자 놀란 그가 미간을 찌푸린 채 나왔다.
“벌써 대화를 끝낸 겁니까?”
“슈피겔 눈 좀 크게 떠 보세요.”
“네?”
“아니 리안, 지금 저 자수정 같은 눈동자를 앞에 두고도 청회색 눈이라고 하실 거예요?”
“어떻게 저 눈을 핑크색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저는 정말 영애를 이해할 수가 없네요.”
서로를 답답해하는 리안과 루비의 대화 사이로 슈피겔이 끼어들었다.
“저기…….”
그는 멋쩍게 웃으며 목덜미를 긁었다.
“두 분의 말씀이 모두 맞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슈피겔은 망설이다 고백했다.
“사실, 말하면 안 되는 건데. 저는 보는 사람에 따라 외형이 다르게 비칩니다.”
“네?”
“외형이 다르게 보인다고요?”
루비와 리안이 동시에 입을 벌렸다.
“네, 저는 이상을 반영하는 마법이 걸려 있거든요. 당신이 원하는 걸 보여 줄 수밖에 없죠.”
그는 슬픈 눈으로 리안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건 절대 내 의지가 아니에요.”
***
『알고 보니 슈피겔은 겨울국 황실 소속 마법사 가문의 후손이었어.
슈피겔의 초대 가주는 먼 옛날 겨울국 황후가 마법의 거울에 담긴 영혼을 억지로 꺼내 만든 사람이래.
진실의 거울.
백설 공주를 각색해서 만든 남주였던 거야.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보여 주는 저주를 가졌다는데, 그걸 저주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
어쨌든 슈피겔의 고백을 듣는 순간 루비 영애도 나도 할 말을 잃었어.
우리 둘 다 그렇게 고민하고 후회했는데, 그 감정 소모의 원인이 결국은 동화 속 저주 때문이었다니.
영애는 현타 맞은 표정으로 황도로 돌아갔고, 나는 슈피겔이랑 에일을 마시면서 그가 겪은 일들을 들었어.
처연하게 말해서 그런지, 술이 들어가서 그런지 슈피겔이 너무 안타까운 거야.
그래서 나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슈피겔을 슬롯에 담고 선택해버렸어. 남은 시간 동안 같이 잘 지내고 싶었거든.
슬롯에 추가하고 선택을 마친 후에 몸을 떼어냈는데, 그 순간 알람이 울리더라.
맞아, 그 공지였어. 아무래도 내가 마지막으로 남주를 선택한 유저인 거 같아.』
나는 손뼉을 쳤다.
리안이 잘 지내고 있었다는 사실에 안심했고, 그때 그 남주를 선택했다는 사실에 울컥했다.
『그런데 10일 안에 업로드를 마치면 된다길래, 쉬운 줄 알았는데 이거 좀 이상해.
슈피겔이랑 일주일 내내 같이 있었는데 왜 업로드율이 1%밖에 안 되는 걸까?』
“1%?”
나는 눈을 찌푸렸다.
└ 리안!!!!!!!!!!! 반가워 ㅠㅠㅠㅠㅠㅠ 아 근데 마지막 문장이 너무 강렬해서 앞 내용 까먹었다 영애!!!!! 1% 업로드 실화야?! ㄷㄷ
└ 하루에 1%면 시간 엄청 필요한 거 아니야? 근데 이거 곧 타임라인 끝나잖아
└ 나는 어제 하루 동안 50% 업로드됐는데 왜 영애는 아직도 1%밖에 안 되는 거야?
└ 아니 영애 이 중요한 글을 올리고 어디 갔어??? 왜 답글 안 달아??? 이 위급한 순간에 뭘 하고 있는 거야 ㅠ0ㅠ 영애~~ 돌아와~~~ 방법을 찾아야지!!!
└ 봄국 남부에 경작지면 여기인 듯? (주소) 여관은 여기 하난데.
└ 직접 찾아가 보게?
└ ㅇㅇ 나 스크롤 있으니까 바로 가볼게! 그동안 업로드율 아는 영애들 있으면 알려주라 ㅠㅠㅠㅠ
└ 나도 스크롤 있어 그쪽으로 갈게!
└ 웅웅 혹시 스크롤 있는 영애들 더 있으면 이쪽으로 와. 같이 머리 맞대보자 ㅜㅜ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나는 얼른 화장대로 가서 스크롤을 담아 둔 상자를 열었다. 지난번에 새로 구매한 덕에 스크롤 양은 넉넉했다.
바로 스크롤을 찢으려던 나는 움직임을 멈추고 옷을 보관해 둔 방으로 갔다.
리안에게 그녀가 만들어 준 옷을 잘 입고 다닌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다.
그나마 활동성이 좋은 데이지 꽃 드레스로 갈아입은 나는 웃음을 입에 건 채 종이를 찢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