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안 주무십니까?]”
“잠이 안 오네요.”
요한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자신을 한 번 가리킨 뒤 내가 있는 방을 가리켰다.
가도 되냐는 물음 같았다.
고개를 끄덕이자 요한은 내가 있는 곳으로 올라왔다. 그는 창틀에 걸터앉으며 물었다.
“[왜 잠을 못 자는데요?]”
“날씨가 좋아서요.”
“[날씨가 좋으면 잠이 안 옵니까?]”
“하늘이든 정원이든 밖을 보고만 있어도 시간이 흘러서 잠드는 걸 까먹잖아요.”
거짓말을 아예 못하는 요한과 달리 나는 꽤 거짓말을 잘했다.
요한은 이해는 안 가지만 이해해 보려 노력 중인지 잠시 시선을 피했다.
정원을 내려다보던 요한의 표정이 어느새 풀어졌다.
그는 은근히 열린 남주라 문화 차이라고 설명하면 납득이 안 되는 일도 곧잘 받아들이곤 했다.
그는 눈에 덮인 관목들을 응시했다. 달빛이 들이찬 푸른 눈동자가 반짝인다. 그걸 보고 있으니 애써 비워 낸 머리가 다시 복잡해졌다.
작별 인사는 언제 해야 할까.
요한은 나를 두 번이나 보내 주었고, 이제 겨우 다시 만나 안정감을 느끼고 있는데…….
나는 그런 요한을 보다 물었다.
“근데 귀빈성에는 왜 왔어요? 무슨 일 있어요?”
“[아뇨. 이유는 없고.]”
요한은 붉은 입술을 잠시 다물었다가 부드럽게 휘었다.
“[보고 싶어서요.]”
자연스럽게 나온 대답에 나는 입을 열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어디에서든 늘 근처에서 요한을 발견하고는 했다. 그래서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마주쳤으니.
요한은 늘 주변에서 머무르고 있었나 보다.
말이 통하지 않는 곳이니 다른 이들과 시간을 보냈을 리도 없고.
근처에 있다가 내가 혼자 있을 때 모습을 드러낸 걸지도 모른다.
그 배려에 마음이 어두워졌다.
내가 여길 벗어나서 잘 살 수 있을까?
끝이 나면, 끝이 나는 거라고 쉽게 여기려 애썼다. 쉽지 않다는 걸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밤공기는 선선한데 눈가에 온기가 번졌다.
요한이 눈을 찌푸렸다.
“[무슨 일 있습니까?]”
“아뇨. 그냥 궁금해져서요.”
나는 이번엔 거짓말을 하는 대신 솔직하게 물었다.
“만약에 내가 사라지면 어떨 것 같아요?”
그 질문에 요한은 잠시 침묵했다. 화를 내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럼 다시 만나기를 기다리겠죠.]”
그는 쉽게 답했다.
“[저는 늘 기다려 왔고, 계속 기다릴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정한 말이었지만, 마음은 진정되기는커녕 더 우울해졌다.
나는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내렸다.
그런데 뺨을 쓸고 내려온 긴 손가락이 내 턱을 들어 올렸다. 시선이 다시 위로 올라갔다.
“[그대가 허락한다면,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겁니다. 그게 언제든.]”
확신 가득한 목소리가 차분히 귓가에 내려앉았다.
“[데이지가 어디에 있든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는 인간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위로를 받았다.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도 안 되는 희망이라는 걸 알면서도 고목처럼 평온한 요한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안정됐다.
언제든 다시 돌아오면 정말로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것만 같았다.
그때, 요한이 푸른 눈동자를 움직여 정원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여기는 겨울이네요.]”
뜬금없는 말에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겨울국이니까요.”
요한이 웃으며 다시 시선을 맞춰 왔다.
순간, 이마 위로 차가운 감각이 번졌다.
눈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자 작은 깃털처럼 포근하게 떨어지는 눈이 보였다.
어둡고 차가운 공기 속으로 하얗고 포근한 것들이 파고들며, 공허함을 무언가로 가득 채웠다.
아포칼립스 남주가 전하는 위로는 특이했다.
요한은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푸른 눈동자에 기대감이 가득했다.
그의 시선이 창틀로 떨어지기에 나도 따라 시선을 내렸다.
창틀에는 작은 눈사람이 하나 있었다.
예전에 봄국에서 내가 말했던 눈사람을 기억하고 만든 모양이다. 전생으로 설명한 현생에서는 사람 모양으로 눈사람을 만든다고 설명했는데 요한은 그 말을 잘못 이해한 것 같았다.
그는 눈으로 조각상처럼 완벽한 인체 조형물을 만들었다.
“제가 말한 눈사람은 이런 게 아니에요. 이렇게 완벽하지 않아요.”
이 세상에서 마족에게 눈사람에 대해 알려 주는 사람은 나밖에 없겠지.
나는 요한의 두 손을 붙여 동그라미를 만들고 그 위에 둥글게 만 내 손을 올렸다.
“공 두 개를 붙인 것처럼 대충 생긴 게 제가 말한 눈사람이에요.”
요한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시선을 들어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런 모양을 원하십니까?]”
내 미적 감각을 의심하는 시선이었다. 방심한 탓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원한다기보다는 이게 눈사람이라고 알려 주는 거죠.”
“[데이지가 원하는 모양은 없습니까?]”
“글쎄요. 제가 원하는 모양이 뭔지 모르겠네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생각해 보십시오.]”
“왜요?”
“[만들고 싶거든요.]”
묘하게 열의를 불태우는 눈을 보고 있으니 또 웃음이 나왔다.
“미안해요. 저 눈사람도 예쁜데. 요한이 만들고 싶은 대로 만들어도 돼요.”
나는 문득 내가 그의 취향을 지적했다는 걸 깨달았다. 나름대로 생각해서 만든 건지도 모르는데.
그런데 요한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
“[데이지가 좋아하는 건 아니잖습니까.]”
“제가 좋아하는 걸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아니요. 그게 가장 중요합니다.]”
그는 드물게도 인상을 찌푸렸다.
“[저한테는 데이지가 좋아하는 게 가장 중요한걸요.]”
내가 좋아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그 말에 나는 다시 슬픔을 느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로 여겨진 이 기억을 잊을 수 있을까.
내가 이들을 그리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가벼운 감정으로 감추고 꾸역꾸역 외면해 왔던 무거운 감정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눈앞이 흐려지길래 창피해서 바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나가고 싶지 않다.
어딘가에 묻어 두었던 욕심이 튀어나왔다.
돌아가야 한다는 것도 알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모순되게도 그런 마음을 깨달을수록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내가 이전과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생각도 마음도 전혀 다른 두 갈래로 갈라졌다.
다른 이로 산다는 건 다른 삶을 얻는다는 것과 같았다.
가짜라고 여겨 왔던 두 번째 시간이 진짜가 되었다.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 생각을, 감정을, 경험을 나누며, 나는 진짜로 이 세계에서 살아 버렸다. 삶도 따라 두 개로 나누어져 버렸고, 나는 이 두 번째 삶도 포기하고 싶지 않아졌다.
그게 다른 세계의 삶이라도.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이 말을 요한에게 할 수 없었다.
그때, 시야로 새하얀 무언가가 들어왔다.
작은 눈송이들이 모여 날갯짓했다. 날개를 접어 어깨에 내려앉은 눈은 새 같았다.
둥글둥글한 그 형체는 언뜻 눈사람을 비스듬히 세워 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요한은 내 어깨에 앉은 작은 새를 보다가 시선을 들었다.
이건 마음에 드냐고 눈빛으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끝으로 동그란 얼굴을 쓰다듬었다.
“눈사람보다 훨씬 귀엽네요.”
그 대답이 흡족한지 요한이 입매를 길게 늘였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몇 초 후에 요한의 낮은 목소리가 고막을 어루만지듯 파고들었다.
“[잊으셔도 됩니다.]”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내가 사라지면 어떨 것 같냐고 물었던 그 질문을 아직도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그대가 이 시간을 잊는다고 해도 모든 건 제가 기억할 테니.]”
요한은 내 손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아무 걱정 없이 그대가 원하는 생을 이어 가십시오.]”
그는 맞잡은 손을 내 가슴 위에 올렸다.
“[모든 것은 그대가 원하는 대로 흘러갈 겁니다.]”
요한은 손을 제 가슴에도 한 번 대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덧붙였다.
“[적어도 이번 생은.]”
요한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고개를 다시 물린 요한은 내 손가락을 그대로 가져가 제 이마에 대었다.
언젠가 내게 맹세를 할 때 보였던 수신호처럼.
지킬 수 없는 맹세를 하는 모습이 낯설다. 모든 게 결국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갈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을 억지로 심어 주기 위한 거짓말 같아서.
그런데도 나는 안정감을 느꼈다.
어떤 결과가 내 앞에 놓여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
정말 결국 내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게 이루어질 것 같은 막연한 믿음이 생겨났다.
한 뼘도 되지 않는 거리.
나는 나를 위로하는 시선을 마주하다 입매를 휘었다.
나도 확신을 주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선택을 하고, 그래서 후회 없는 삶을 만들 거라고 알려 주고 싶었다.
요한은 그런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미소를 지었다.
달빛을 머금은 얼굴이 은은히 빛났다. 기분 탓인지 마음 한구석이 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오늘은 몇 시에 돌아갈 거예요?”
“[글쎄요. 좀 더 있다가 가고 싶은데.]”
“안에 들어올래요?”
요한은 움찔했다. 그리고 푸른 눈동자를 담은 눈매가 좁아졌다. 막상 뱉고 나니 민망했다.
“저는 잠이 안 와서 밤샐 거 같은데, 서 있으니까 다리가 아파서요. 나 혼자 잠들면 또 도망갈 거 같고…….”
나는 맞잡은 손을 슬며시 빼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손가락은 다 빠져나가기도 전에 강하게 움킨 상대의 악력에 붙잡혔다.
요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손을 잡은 채 가만히 시선만 얽었다.
한참 후, 뜻을 이해했는지 그가 말없이 안으로 들어왔다.
아마도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얼마 안 남은 새벽.
나는 그 시간을 내가 선택한 요하네스와 함께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