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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0 영애-193화 (194/208)

193화.

안젤리카의 버프가 뒤늦게 생겼다. 끔찍한 상실과 함께.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이들은 입을 열지 못했다.

자박.

고요 속으로 울려 퍼지는 발걸음 소리가 크게 느껴졌다.

디아나의 발걸음 소리였다.

“폐하! 위험합니다!”

디아나의 신하가 그녀를 말렸으나, 그녀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디아나는 나무줄기를 밟으며 테라스로 내려갔다.

그제야 정신이 든 나는 요한에게 부탁했다.

“요한, 불의 이능을 쓸 수 있잖아요. 저 불길을 없애 주세요. 폐하께서 다칠지도 몰라요.”

안젤리카는 제가 이능을 개화했다는 걸 아직 모르는 것 같았고, 디아나는 불에 데도 상관없다는 듯이 직진하고 있었다.

요한은 고개를 끄덕이고 불의 이능을 없애 주었다.

디아나는 정말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간발의 차이로 사라진 불길 앞으로 그녀가 발을 내디뎠다.

디아나는 핏물에 젖은 바닥을 걸어 안젤리카에게 다가갔다. 마침내 안젤리카의 앞에 도착한 그녀가 바로 입을 열었다.

“살릴 수 있어요.”

오직 안젤리카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듯 그녀만 보며.

“영애의 시간은 바꿀 수 있으니까. 과거로 가서 구하세요.”

디아나의 말에 안젤리카가 고개를 들었다. 젖은 얼굴로 그녀는 디아나를 쳐다봤다.

디아나는 그 시선에 답하듯 방법을 말했다.

“저한테 ‘30분 회귀권’이 있어요.”

디아나는 주변에 사람이 많은데도 아이템을 입에 담았다.

갑자기 시선을 내린 안젤리카가 눈을 크게 떴다. 상태창을 보는 것처럼.

아이템이 수신된 모양이었다.

디아나의 차분한 목소리가 침묵 속으로 울려 퍼졌다.

“영애를 제외한 모두가 기억을 잃을 거예요. 만약에 실패하면 절 찾아와요. 회귀권을 달라고 하면 설명할 필요도 없이 계속 줄 테니까.”

“제, 제가…….”

“네. 할 수 있어요.”

울먹이는 안젤리카의 말을 자르고 디아나가 답했다.

“영애는 동생을 살릴 수 있어요.”

확신이 담긴 말은 짧지만, 단호했다.

“대체 저게 무슨 말이지.”

체이스 경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내게도 ‘30분 회귀권’이 있었다.

나는 고민할 새도 없이 바로 선물했다.

안젤리카가 당장 아이템을 쓰고 사라질까 봐 두려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안젤리카가 움찔하며 눈앞을 응시했다. 새로운 상태창이 또 떠오른 모양이다.

그녀의 시선이 내게로 흘러왔다.

나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두 주먹을 들어 보였다.

‘할 수 있어요!’

그 뜻이 전해졌을까.

안젤리카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곧 심호흡하며 눈을 감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그녀가 다시 움찔하며 눈을 떴다.

그녀의 눈동자가 사방으로 움직였다.

눈앞에 뜬 여러 개의 상태창에 놀란 것처럼.

“영애 할 수 있어요!”

그때, 키스카 영애가 눈물이 범벅된 얼굴로 외쳤다.

그녀의 손에는 태블릿이 있었다. 대관식을 중계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상황을 알 것 같았다. 키스카와 대관식을 보고 있던 영애들이 제가 가진 ‘30분 회귀권’을 안젤리카에게 선물한 듯하다.

안젤리카가 계속 움찔거리며 시선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걸 보니 한두 개가 아니었다. 최소 서른 개는 넘어 보인다.

울컥한 나는 희망을 느꼈다.

불안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안젤리카 또한 마찬가지였는지, 그녀는 차분히 눈을 감았다. 뺨을 타고 떨어진 눈물이 다물린 입술을 훑으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

나는 나보다 앞으로 나가 자리를 배정받는 요한과 알렉스 그리고 엘런을 쳐다봤다.

대관식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진이 빠졌다.

아니 어차피 이렇게 다 찢어져 앉을 건데 왜 기 싸움을 한 거냐고.

속으로 혀를 차고 대관식장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야외 단상에 안젤리카가 홀로 서 있었다.

이제 곧 대관식을 시작할 시간인데, 리베라도 황제가 될 베로니카도 보이지 않았다.

뭐지, 무슨 일이 생겼나?

메시지를 보내 이유를 물어보려던 나는 멈칫했다.

안젤리카의 표정이 이상했다.

그녀는 내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니, 그 시선은 묘하게 내게서 빗겨 있었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틀었다. 그리고 흠칫했다.

내 뒤에 녹스의 보좌관인 스콧 사무관이 앉아 있었다.

스콧의 붉은 눈동자는 안젤리카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때, 차가운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오늘 대관식에는 정정할 부분이 있습니다.”

안젤리카답지 않은 말투에 놀란 나는 바로 고개를 획 돌렸다.

안젤리카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차분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황관은 제가 쓰겠습니다.”

순식간에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신성한 대관식임에도 다들 침묵을 깨고 웅성거렸다.

나도 당황스러웠다.

안젤리카의 몸에 누가 빙의라도 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달라진 그녀의 모습에 적응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안젤리카는 소란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녀는 표정 없는 얼굴로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머리 위에서 손을 멈춘 그녀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화르르르륵.

안젤리카의 머리 위로 불이 피어올랐다.

“꺄악!”

놀란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안젤리카의 머리가 불탄 건 아니었다.

머리의 한 뼘 위에서 황관 모양의 불이 생겨났다.

숨을 들이켜는 소리와 속닥거리는 말소리가 겹쳐졌다. 이내 그 웅성거림이 커졌다.

“저거 불의 이능 아닙니까?”

내게 몸을 기울인 체이스 경이 물었다.

“……그런 것 같아요.”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키워드를 해제하는 서사가 있어야 발현된다며?

대체 무슨 서사가 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안젤리카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러자 황관이 사라졌다.

그때, 뒤에서 열기가 밀려왔다.

“으아아아악!”

동시에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졌다.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스콧이 불타고 있었다. 그리고 사방에서 몸에 불이 붙어 어쩔 줄 모르는 사람들이 팔짝 뛰기 시작했다.

비명 위로 안젤리카의 단호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저는 황실에 위협이 되는 자는 용서할 생각이 없으며.”

안젤리카는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로 그들을 보며 덧붙였다.

“인자한 황제가 될 생각도 없습니다.”

그녀의 손짓에 불이 모두 사라졌다.

그러나 이미 그들은 전신이 불에 타 바닥에 고꾸라진 뒤였다.

참석자들은 입을 벌린 채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러나 안젤리카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니 알아서 받아들이시길.”

나는 어느 것에 놀라야 할지 알 수 없어 반응조차 할 수 없었다.

안젤리카가 불의 이능을 쓰게 된 것에 놀라야 할지, 소심한 사생아 황녀가 냉혈해진 것에 놀라야 할지, 갑자기 참석자가 불타 죽은 것에 놀라야 할지.

안젤리카는 참석자의 반응을 무시한 채 난간으로 다가가 섰다.

“최대한 멀리 피하라. 곧 폭탄이 터질 테니.”

워낙 고요했던 터라 그녀의 목소리는 크게 들렸다.

“폭탄?”

체이스 경이 눈을 찌푸리며 혼잣말했다.

마치 그 소리를 들은 것처럼 안젤리카가 안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대들은 도망칠 필요 없습니다. 내부에 설치된 폭탄은 미리 제거했으니.”

무슨 일이 있었길래 폭탄 제거까지 했다는 거야?

안젤리카를 걱정하던 나는 흠칫했다.

잠깐만. 외부에 폭탄이 있다면, 안젤리카가 위험한 거 아니야?

의문을 품기 무섭게 푸른 하늘에 검은 점들이 들이찼다.

“아, 안 돼!”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콰과과과과과강.

그러나 걱정한 보람도 없이 하늘에서 불길이 치솟더니, 폭죽이 터지듯 수십 개의 검은 공이 홀로 폭발했다.

검은 연기가 자욱하게 뭉쳐 구름을 만들었다.

마치 겨울국의 미래는 암담할 것이라 경고하듯.

그것을 보는 제국민들의 표정이 사색이 되었다.

더 이상 착하게 살지 않기로 결심한 회귀 여주처럼 안젤리카는 무심히 제국민을 내려다보다 말했다.

“대관식은 끝났다.”

그녀는 짙은 피로가 어린 얼굴로 가볍게 손짓했다.

“돌아가라.”

깊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몇 초 후에 제국민 하나가 눈치를 보며 손뼉을 쳤다.

그 소리를 따라 떨떠름한 박수 소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와아아……. 황제 폐하 만세……!”

전혀 즐겁지 않은 목소리로 제국민들이 새로운 황제의 탄생을 기뻐하는 리액션을 했다.

나는 떨떠름한 눈으로 안젤리카를 보며 손을 들어 따라 손뼉을 쳤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

어쨌든…… 겨울국이 다시 최강대국이 된 건 확실해 보였다.

***

“하, 기가 막혀서.”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어서 헛숨이 흘러나왔다.

나는 창가에 기댄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젤리카는 회귀권을 사용했다고 한다.

횟수는 말해 주지 않아 모르지만, 꽤 여러 번 한 것 같았다.

안젤리카는 디아나에게 고마워했다. 그리고 지금 그 둘은 온천에서 대화를 하고 있다.

여주들이 오프라인에서 눈치 보지 않고 대화를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그곳 말이다.

어떤 깊이 있는 대화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안젤리카는 디아나와 공감대가 생긴 것 같았다.

“황제끼리 통하는 게 있는 건가?”

당황한 우리는 대관식 직후에 안젤리카를 무작정 찾아가 이것저것 물었었다.

그녀가 답변을 할 때마다 나와 키스카는 몇 번이나 뒤집어졌는데 디아나는 담담했다.

디아나도 안젤리카가 회귀권을 쓰기 전에 겪은 일을 기억하지 못할 텐데, 안젤리카가 늘어놓는 경험담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녹스가 몇 번이나 자기 목숨을 희생해서 안젤리카를 구했다는 부분이 가장 충격적이었다.

안젤리카는 결국 녹스를 남주로 선택했다. 그러면서도 녹스에게 과충성한 수하들은 가차 없이 응징했다.

녹스는 원체 남의 목숨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놈이라 그런지, 아니면 역모에 엮이기 싫어서 그런지 제 수하들을 응징했는데도 토를 달지 않았다.

오히려 깍듯하게 안젤리카를 모시며 제가 협회장으로 지낼 때보다 더 열심히 일하고 있다.

나는 창틀에 손을 올린 채 미간을 찌푸렸다. 눈 쌓인 황성을 보고 있으니 절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뭐, 어쨌든…… 다들 잘하고 있네.”

결국, 안젤리카는 키워드 제한을 풀고 이능을 가지게 됐다.

좋은데. 분명 좋은 일인데.

마지막 유저의 서사가 완성되는 걸 보고 나니 씁쓸해졌다.

[결]이라고 불리는 이 게임의 끝이 다가오는 게 느껴져서.

끝이 오면 어떻게 되는 걸까.

나는 여기서 사라지게 되는 걸까?

[결]의 완성.

그토록 바라왔던 끝인데 나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나는 창틀에 기대 겨울국 황성 전경을 바라봤다.

하얀 눈이 달빛을 반사하며 어둠을 밝혔지만,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어두워졌다.

내가 돌아간 후의 세상을 생각하니 기분이 가라앉았기 때문이다.

생각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전원이 꺼진 것처럼 세상이 사라지는 걸까.

아니면 남은 이들은 계속 시간을 이어 가게 되는 걸까.

처음에는 당연히 전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두의 [결]이 같은 시기에 완성되는 거라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모르겠다.

내가 없어도 시간은 흐르고 이들은 살아 숨 쉴 것만 같았다.

이런 생각을 할수록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름다운 마무리를 완성한다는 건 내 욕심 같았다.

이별은 아름다울 수 없지 않나.

사박.

그때 창문 아래에서 단단해진 눈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따뜻한 가로등 불빛이 그려 낸 나무 그림자가 하얀 눈 위에서 살랑거렸다. 그리고 그 옆에 선 사람의 인형이 보였다.

요한이었다.

나는 내 고민을 숨기듯 미소를 지으며 창틀 밖으로 몸을 기울였다.

“산책하러 나왔어요?”

요한은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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