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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0 영애-192화 (193/208)

192화.

대관식장에 들어선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대체 왜 셋이 기 싸움을 한 건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자리가 떨어져 있었다. 거의 동서남북으로 내달린 수준이다.

대관식장은 야외와 실내로 나뉘었다.

야외에서는 대관식을 진행하고 실내에서는 참석자들이 앉아 그 대관식을 관람했다.

성벽에 박힌 금문이 대관식장이었다. 금문은 해자를 잇는 가교처럼 내려갔는데, 바닥에 닿지 않고 3층 높이에 떠 있었다. 금문은 테라스보다는 넓지만, 광장보다는 작았다.

아무래도 밤새 대관식장을 꾸미고 야외에 호위를 배치하는 게 불가능하다 보니, 성과 바깥을 연결하는 금문으로 장소를 정한 것 같았다.

넓은 금문 아래에는 제국민이 바글바글했다. 그들은 고양된 표정으로 새로운 황제의 대관식을 기다렸다.

어떻게 하룻밤 새 소문이 난 걸까?

아무래도 겨울국 평민으로 지내는 영애에게 소문을 빠르게 내는 스킬이 있으신 모양이다.

단상에는 겨울국 황족과 호위 그리고 성녀 영애 아이시스가 있었다.

마왕도 눈치 없이 단상 근처에 서 있었다.

리베라와 떨어질 수 없다고 주장하는 마왕에게 실내로 들어가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자는 없었다.

실내는 서열에 따라 좌석이 배치되어 있었다.

알렉스는 황족을 모시는 자리의 가장 상석, 오른쪽 좌석의 맨 앞줄에 앉았다.

그리고 엘런은 토벌단을 위한 자리인 왼쪽 좌석의 앞 열에 앉았다.

나는 왜인지 체이스 경과 함께 황족의 뒷자리에 앉게 됐다.

내 옆에 선 체이스 경이 정면에 시선을 둔 채 고개를 기울였다.

“겨울국은 일 처리 속도가 빠르네요.”

그의 시선은 야외와 실내의 경계에 선 보좌관을 향했다.

리베라의 임시 보좌관은 다크서클이 입꼬리까지 내려와 있었다.

체이스 경은 알렉스가 선녀로 보인다는 눈으로 리베라의 보좌관을 바라보며 동정했다.

체이스 경의 시선은 이내 베로니카에게로 옮겨 갔다.

“그나저나 새로운 황제 폐하께서 많이 어려 보이시는데, 괜찮을까요?”

베로니카는 안젤리카의 동생이자 미약한 이능을 가진 소녀였다.

나는 그녀를 보다 미소를 지었다.

“잘하실 거 같은데요?”

일단 나라를 말아먹지는 않을걸?

나는 시선을 약간 움직여 베로니카의 곁에 선 아이시스와 리베라와 안젤리카를 쳐다봤다.

말만 하면 모든 게 이뤄지는 성녀.

세계관 최강자를 제 집 강아지처럼 다루는 외대고모.

그리고 모든 유저들이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는 막내 뉴비.

‘응, 절대 위험할 일 없어.’

베로니카를 도와줄 사람들의 스펙이 어마어마했다.

국가적 재난이나 역병 혹은 부도가 일어난다고 한들 그녀는 쉽게 이겨 낼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체이스 경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베로니카를 응시했다.

그때, 누가 내가 한 말을 따라 하며 실소했다.

“잘한다라.”

시비를 거는 말투에 미간을 찌푸리며 돌아보니 나를 쳐다보고 있는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녹스의 보좌관이었던 스콧 사무관이었다.

표정은 없지만, 그의 붉은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스콧이 날 싫어하는 이유는 대충 짐작했다.

나 때문에 녹스가 쫓겨났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따지고 보면 녹스 놈이 먼저 욕심부리다가 헛발질을 한 거다.

근데 남 탓 하기는.

무시하고 다시 고개를 돌리려는데 스콧이 이상한 말을 했다.

“협회장님이 당신을 일찍 제거했다면 겨울국의 국운이 달라졌을 겁니다.”

나는 그 말에 다시 스콧을 쳐다봤다. 그러나 그는 막말을 뱉어 놓고도 무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말조심하십시오.”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체이스 경이 주의를 주었다.

스콧은 체이스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나를 응시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잔챙이에게 쓸데없이 힘을 뺄 생각은 없으니.”

스콧은 비웃음을 흘렸다.

“내 집 안에서 일어난 일을 집 바깥 사람에게 책임을 물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찜찜한 기분을 안고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바로 녹스를 찾았다.

녹스는 엘런이 있는 왼쪽 자리의 가장 앞 열에 앉아 있었다.

녹스를 보는 순간 나는 살짝 안도했다.

녹스의 표정은 담담했는데, 패배를 인정한 듯 힘이 빠진 것 같기도 했다.

아니, 그거랑은 좀 다른가?

그의 시선은 황제의 관 앞에 선 베로니카가 아닌 그 옆에 선 안젤리카를 향해 있었다.

그 시선의 뜻을 알다 보니 좀 짠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좋으면 잘해 주지 그랬어.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놈의 슬롯 키워드.

어쨌든 안심이 됐다.

슬롯에 담긴 녹스가 안젤리카에게 나쁜 짓을 할 리 없을 것 같으니.

그때, 대관식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모두 착석해 주십시오.”

시종의 말에 모두가 자리에 앉았다. 바로 대관식이 시작됐다.

대관식장은 고요했다.

나는 녹스의 뒤로 선 겨울국 협회원들을 힐긋 쳐다봤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이들도 있고, 무표정한 이들도 있고, 화가 났는지 얼굴이 붉어진 이도 있다.

겨울국 협회원 중 일부는 나를 원망했다. 겨울국의 재건을 위해 힘쓰며 그들이 그렸던 세상이 있을 테니.

협회원 중 일부는 3국을 압도하는 힘을 갖는 게 꿈이었던 사람도 있었다. 비록 소수의 목숨을 희생할지라도 말이다.

나는 정치고 뭐고 관심이 없었다. 그저 안젤리카가 다치지 않고 잘 지내는 게 중요했다.

내게는 옳은 선택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아닐 수도 있었다.

식이 끝나 가자 베로니카가 긴장이 풀렸는지 작은 숨을 토했다. 안젤리카는 그게 귀여운지 미소를 지었다.

안젤리카의 입꼬리에 어린 미소가 내게 따라붙었다.

‘그래, 욕 좀 먹지 뭐.’

나는 팽팽히 올라가는 광대를 그대로 둔 채 대관식에 집중했다.

어느새 식이 끝났다.

시종의 눈짓에 악단이 제 악기에 손을 올렸다. 평화로운 연주가 흘러나오는 순간이었다.

콰광.

굉음이 터지더니 희뿌연 먼지구름이 덮쳐 왔다.

“꺄아아아악.”

사방에서 비명이 밀려왔다.

“언니!”

그 사이로 베로니카의 외침이 들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앞으로 나가려다가, 체이스 경의 손에 끌려 의자 아래로 주저앉았다.

“조심하십시오!”

간이 테이블 아래로 몸을 숨긴 체이스 경과 나는 웅크린 채 밖을 주시했다.

그때, 흐린 장막 너머로 금 바닥이 기우는 모습이 보였다.

“꺄아아아악!”

날카로운 비명이 끝나기도 전에 자욱하게 피어오른 검은 연기에 모든 것이 잡아먹혔다.

콰과과과광.

“으아아악!”

야외와 실내에서 엇갈린 비명이 몰아쳤다.

“베로니카!”

그 혼란 속에서 안젤리카의 날카로운 외침이 들렸다. 나는 소리가 난 쪽으로 시선을 틀었다.

아직 연기에 가려지지 못한 푸른 하늘에서 검은 공이 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하늘에서 불기둥이 번졌다.

콰과과광.

검은 공들은 불기둥에 막혀 그대로 하늘에서 터져 버렸다.

엄청난 소음에 고막이 터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고 귀를 막았다.

더 이상 폭발음이 들리지 않았다.

사람들이 전부 도망쳤는지, 사위에서 들려오는 비명도 없었다.

나는 숨을 죽인 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투명한 얼음과 그 위를 덮은 나뭇가지들이 보호막처럼 내 주위에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보호막 너머로 검은 연기가 여전히 실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얼음 막 안에 선 요한과 그 바깥에 서서 나를 응시하는 알렉스도 보였다.

나는 그들을 보다 초점을 더 먼 곳으로 옮겼다.

“이게 무슨…….”

체이스 경의 나지막한 혼잣말이 들렸다.

무섭도록 시린 공기가 폐부로 들이찼다.

몸이 얼어붙었다.

추위 때문인지 연기가 걷어지며 서서히 드러나는 실체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금 바닥은 떨어지지 않았다.

가을국 황제가 앉은 나무 의자에서 뻗어 나온 가지들이 동강 난 금 바닥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가파르게 기울긴 했지만, 그 누구도 추락하지 않았다.

리베라는 마왕에게 안긴 자세로 공중에 뜬 얼음 위에 올라서 있었고, 아이시스는 성 기사의 손을 잡은 채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안젤리카는…….

그녀의 주변이 붉게 물들어 있다. 핏물이었다.

파편에 몸이 갈기갈기 찢기고 불에 그을린 녹스가 안젤리카를 끌어안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요한의 물음이 녹스의 움직이는 입술과 겹쳐 보였다.

안젤리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젖은 눈으로 허겁지겁 누군가를 찾았다.

폭발음에 둔해졌던 고막이 차츰 먼 곳의 소리를 인식했다.

“베로니카…….”

안젤리카의 망연한 목소리가 들렸다.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사람이 단상 위에 쓰려져 있었다.

안젤리카는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나무줄기를 잡으며 기어 올라갔다.

빠르게 단상으로 올라간 안젤리카는 울음을 터트리며 베로니카의 뺨을 움켜쥐었다.

베로니카는 누구도 목숨을 걸고 지켜 주지 않았다.

보지 말라는 듯 요한의 손이 내 눈을 가렸다.

황족을 노린 짓이었다.

금 바닥이 떨어졌다면, 야외에서 구경하던 제국민들이 다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행히 제국민에게 피해는 없는 듯했다. 대관식에 참석한 가을국 황제와 여름국 황제 덕이었다.

야외와 실내의 경계에 선 디아나와 그녀의 발아래로 뻗어 나간 굵은 나뭇가지들이 보였다.

나뭇가지는 금 바닥뿐 아니라 황족에게 달려든 괴한들을 움켜쥐고 있었다.

“윽, 놓아라!”

허공에 뜬 이들이 발버둥을 쳤지만, 디아나는 괴한들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그녀는 괴한들을 지나쳐 금 바닥 위로 올라섰다.

곳곳에 피어오른 불기둥에 가려져 디아나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흐으으윽.”

안젤리카가 서럽게 울수록 불기둥은 살아 움직이듯 거세게 움직였다.

모두가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 이능이…….”

체이스 경의 혼잣말이 적막을 파고들었다.

도망치지 못한 참석자들은 죽은 황제와 그녀의 언니를 보며 숨을 죽였다.

나는 온몸에 힘이 빠지는 기분을 느꼈다.

무슨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키워드 해제.

시스템은 잊고 있던 그녀의 마지막 서사를 멋대로 발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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