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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0 영애-191화 (192/208)

191화.

겨울국 황제의 침소가 있는 황제궁.

겨울국 황성에서 지내던 영애들은 새벽에 황제궁 5층에 모였다.

5층은 층 전체가 온천이었다.

가운데 설치된 불기둥이 비스듬히 기운 천장에 쌓인 눈을 녹여 욕조에 온수를 끊임없이 채웠다.

천장에서 욕조로 졸졸 흐르는 온수를 보고 있으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와, 야외 온천 같아요.”

이곳은 한쪽 벽이 트여 있어서 바깥을 보며 목욕을 할 수 있었다.

오로라를 보며 즐기는 온천이란.

“힐링이다.”

나는 나른한 숨을 흘리며 정경을 감상했다.

그때, 안젤리카가 눈을 반짝이며 리베라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대단하세요. 협회원들의 입을 한 번에 막아 버리시다니. 영애한테도 서류를 검토해 주는 버프가 있는 건가요?”

“아뇨. 그런 건 아닌데 집안일 관련 버프가 있기는 해요.”

리베라는 젖은 머리칼을 매만지며 말했다.

“집안의 비밀이나 정보를 요약해 주는 버프인데 검색 엔진이랑 비슷해요.”

“어! 저도 검색 엔진 같은 버프 있는데.”

나는 뜻밖의 공통점을 발견하고 손뼉을 쳤다.

리베라도 흥미가 동했는지 내게 물었다.

“영애 버프는 이름이 뭔데요?”

“‘마족 정보 검색’이에요.”

“직관적이네요. 근데 내 건 왜 이러지.”

리베라는 찜찜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요? 영애 버프 이름은 뭔데요?”

리베라의 뺨이 붉어졌다. 어지간히 말하기 부끄러운 버프인 듯하다.

그냥 알려 주지 않으셔도 괜찮다고 말하려는데 그녀가 입을 열었다.

“‘라떼의 예의범절’이에요.”

“라떼요……?”

“네. 아무래도 제가 제일 오래된 유저라서 그렇게 이름을 붙였나 봐요. 이 사람들 작명 센스 생각하면 놀랄 일은 아니죠.”

리베라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하늘을 노려봤다.

키스카가 웃으며 분위기 전환을 시도했다.

“하하. 그나저나 영애 원작은 어떤 소설이에요?”

“저는 ‘망한 제국을 되살리는 천재 황녀’를 시나리오화 했대요. 들어 보셨나요?”

“그럼요! 저 그 소설 너무 좋아해요.”

“아, 저도 재밌게 봤는데 그게 원작이셨구나.”

첫 만남의 공식 아이스 브레이킹.

빙하기를 겪은 라떼 영애도 피해 갈 수 없었다.

우리는 서로의 원작에 관해 이야기하며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런데 갑자기 수인 영애가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와, 저 왜 겨울국이 해빙됐을 때 영애가 일어난 건지 알 거 같아요. 망한 제국을 재건하는 황녀, 영애가 겨울국을 다시 제1 강대국으로 만드는 거죠.”

리베라는 눈을 도르륵 굴렸다.

“제가 황제가 되는 건 아니지만 겨울국을 강대국으로 만드는 건 가능해요. 오라버니 놈이 망나니 황제긴 해도 돈은 정말 많이 모아 뒀거든요.”

리베라는 웃으며 팔꿈치로 안젤리카를 툭 건드렸다.

“안젤리카 영애, 우리 완전 부자예요. 만수르는 비교도 안 돼요!”

“저, 정말요?!”

안젤리카가 눈을 반짝이며 기뻐했다.

나는 부러움 가득한 눈으로 그들을 보며 대화를 들었다.

자원 부국의 황족들이란…….

“네, 그 자식 물욕이 이렇게 도움이 되네요.”

“아, 산유국 공주님들 부럽다.”

키스카는 기지개를 켜며 고개를 천장으로 들었다.

“리베라 영애, 나중에 여름국에 한번 오세요. 여름국은 한식도 먹을 수 있는 거 아시죠?”

“네? 한식이요?!”

처음 듣는다는 듯 리베라가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동로판 플레이 존인데 당연하죠. 몰랐어요?”

“저는 동로판을 잘 안 봐서 몰랐어요. 그리고 제가 타임라인을 시작했을 땐 커뮤니티에 글도 없었고……. 사는 게 힘들었거든요. 집안도 집 바깥도 난리였던지라.”

아포칼립스 대재앙을 겪은 여주를 보며 우리는 잠시 침묵했다.

안젤리카가 머뭇거리다 다시 분위기를 바꾸려 노력했다.

“영애, 다음에 저랑 같이 여름국에 가요. 여름국에는 김치도 있고 몰입감 항목 점수 잘 주셨으면 퓨전 한식도 많이 드실 수 있어요.”

“……퓨전 한식이요?”

“아, 맞아. 영애도 이 리뷰 한번 읽어 보세요!”

커뮤 중독 수인 영애가 오로라를 촬영하던 태블릿으로 커뮤니티 글을 찾았다.

몰입감 항목 10점을 준 영애가 쓴 전설의 리뷰였다.

리베라는 집중해서 글을 읽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 영애 사기꾼 아니에요? 저는 쌍화탕이랑 한과밖에 안 보이는데.”

숙연한 침묵이 흘렀다.

눈치를 보던 수인 영애가 웃으며 태블릿을 뺏어 갔다.

“하하, 요즘 영애들이 참 짓궂어요. 어휴, 무슨 이런 장난 글을 올린대. 신경 쓰지 마세요.”

키스카는 손을 내저으며 태블릿을 치워 버렸다.

모두가 무언으로 동의했다.

퓨전 한식은 존재하지 않는 거다. 로제 떡볶이 같은 건 세상에 없었던 거다.

나는 비슷한 외모의 안젤리카와 리베라를 한눈에 담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근데 신기하다. 겨울국에는 가장 먼저 타임라인을 시작한 유저랑 가장 늦게 타임라인을 시작한 유저가 같이 있네요.”

키스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겨울국이 시작과 끝을 장식하네. 여기가 메인 플레이 존인가? 아니, 근데 왜 여길 50년이나 못 오게 했지?”

디아나는 우리의 말에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나른한 숨을 흘리며 목을 돌리다 키스카에게 말했다.

“영애, 내일 대관식 촬영하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 맞다! 리베라 영애, 저 내일 대관식 촬영해도 되나요? 저 브이로그 찍는데 대관식 촬영하고 싶어요.”

“……브이로그요? 로판에 브이로그가 있을 수 있나요? 제가 잘못 들은 거 아니죠?”

몰입감 항목 0점 준 영애다운 반응이었다.

10점 준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괜히 변명했다.

“몰입감 패널티가 자기들 마음대로 적용돼서 브이로그는 또 제한을 안 받더라고요.”

“몰입감 패널티? 그건 또 뭐예요?”

“영애 안 되겠다. 오늘 밤새워서 커뮤니티 팁 글 좀 읽으세요.”

대화가 통하지 않으니 키스카가 답답해하며 혀를 찼다.

“어쨌든 저 내일 촬영할게요?”

“아, 혼란스러워. 저 어지러워요.”

리베라가 관자놀이를 부여잡으며 눈을 감았다.

그게 웃겨서 나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러나 새 나오는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왜 웃으세요?”

리베라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그냥 여러분을 보는 게 재밌어서요.”

키스카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니 나는 진지한데 웃기다니요.”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자 뿅 하고 귀가 생겨났다. 회색 솜털이 보송보송한 귀가 너무 귀여웠다.

“아아, 영애 실례가 아니라면 저 영애 귀 한 번만 만져 봐도 되나요?”

“실례예요.”

“……알겠어요.”

“장난이에요. 만져 봐요.”

“감사합니다.”

나는 냉큼 그 작은 귀를 만져 봤다.

기분 탓인지 귀를 만질 때마다 뽀짝뽀짝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아, 힐링이 최고다.

다음에 이 게임 또 하게 되면 반드시 #힐링물 관련 키워드를 잔뜩 넣을 거다. #육아물 #수인물 전부 내 취향이었어.

그때, 디아나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다 끝났네.”

그녀는 혼잣말하며 눈을 감았다. 여전히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다.

피곤한가?

하긴 해빙 전에는 재앙 때문에 전쟁을 준비했고, 해빙 후에는 겨울국 협회 놈들과 계속 회의를 했으니 피곤할 만하지.

나는 혼자 피식 웃으며 디아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별 뜻 없이 건넨 말인데 디아나는 잠시 말없이 나를 보다 입매를 휘었다.

“영애도요.”

가볍게 흘러나온 대답에 진심이 느껴진다.

훈훈한 증기 속으로 퍼지는 기분 좋은 대화에 마음이 평온해졌다.

나는 밤하늘에 어린 푸른 빛줄기를 보며 눈을 감았다.

누군가 이 게임이 즐거웠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 같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고.

CH17. 행복한 [결]을 완성할 수 있을까

대관식에 일찍 가려고 서둘러 나왔지만 나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거대한 체격의 남자 셋이 복도를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하는 황족을 위한 상석에 앉으시지 않습니까? 입구도 다르니 제가 레이디 데이지와 함께 가는 게 맞습니다.”

“상석 입구로 가면 줄을 설 필요가 없지. 빨리 입장하라면 나와 가는 게 좋아.”

엘런의 말을 가볍게 자르며 알렉스가 미소를 지었다.

세 남주가 뜬금없는 기 싸움을 하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서 있는 요한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는 요하네스와 갈게요. 요한은 길을 몰라서 안내해 줄 사람이 필요해요.”

“괜찮아. 내 시종이 안내를 해 주면 돼.”

“그 시종은 마족어를 못 하잖아요. 그리고 전하, 너무하시네요. 다들 마족을 얼마나 무서워하는지 아시면서 그분은 무슨 죄예요.”

“전하를 모시는 죄지.”

내 말을 엘런이 받아쳤다.

알렉스의 고개가 엘런에게로 돌아갔다.

그들은 덩칫값을 못 하고 이 유치한 대화를 계속 이어 갔다.

심지어 요한은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복도를 벗어나지 않고 그 기 싸움에 참여했다.

침묵하는 요한이 거슬렸는지 알렉스가 요한에게 몸을 틀었다. 그렇다고 말을 거는 건 아니었다. 그는 이능을 썼다.

사아아아.

나무 바닥에서 작은 나뭇가지가 가닥가닥 돋아났다. 가지들은 얽히며 모형을 만들었다.

겨울국과 마족 지대 경계 부근을 그린 지도였다.

그 위로 말과 기사의 모형도 생기고, 마족들의 모형도 생겨났다.

“뭐 하시는 겁니까?”

엘런이 묻자 알렉스는 시선을 모형에 둔 채 간결하게 답했다.

“협박.”

엘런은 다시 바닥의 모형을 보고는 짧게 탄식했다.

수많은 말과 기사 모형이 만들어진 것과 달리 마족의 모형은 16개뿐이었다.

“저쪽 병력이 16명이라는 보장은 없지 않습니까.”

“알려진 바로는 전투가 가능한 마족은 16명뿐이라더군.”

알렉스는 사계국의 병력을 자랑하는 중이었다.

협박이라는 거 보니 최선을 다해 괴롭힐 수 있다, 그런 뜻을 전하는 모양인 듯하다.

요한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 모형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너희 대체 왜 이래.’

나는 그 유치한 싸움을 흐린 눈으로 쳐다봤다.

그런데 한참 모형을 내려다보던 요한이 고개를 기울였다. 알렉스의 협박을 진지하게 읽고 있었나 보다.

그때였다.

사아아아.

알렉스가 만든 판 위로 얼음이 돋아나며 새로운 모형들을 만들었다.

산맥 같은 언덕이 생겨나고, 절벽도 표현됐다.

아무래도 경계 부근에 시야 왜곡 이능이 발현되어 있던 모양이다.

요한은 숨겨진 지형을 묘사한 후에 친절하게도 기사들의 배치까지 제안했다.

풀 인형 옆으로 얼음 화살표가 다닥다닥 생겨났다.

그제야 시선을 든 요한이 알렉스를 쳐다봤다.

요한은 숨겨진 산맥과 절벽의 위치를 보여 주고, 이기고 싶으면 군사 배치를 이렇게 바꾸라고 조언했다.

마치 스포츠 경기 전술을 알려 주는 감독님처럼.

잠시 침묵이 일었다.

나는 알렉스가 자존심이 상했을까 봐 눈치를 봤다.

그러나 알렉스는 흥미롭다는 눈으로 그것을 보고 있었다.

사아아아.

심지어 제가 만들었던 인간 모형을 요한의 제안대로 바꿨다.

“아, 그러네. 이렇게 하는 게 효과적이군.”

그는 수긍하다 다시 배열을 바꿨다.

사아아아.

풀 인형이 한곳으로 뭉쳐 간격을 좁혔다. 포위망을 좀 더 촘촘히 짠 알렉스는 병력을 언덕 위로 배치했다.

그러자 엘런이 감탄하며 제 턱을 쓸었다.

“아, 그렇게 갈 수도 있겠군요.”

요한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까닥 작게 끄덕였다.

사아아아.

사아아아.

둘은 계속 이능으로 지형을 바꿔 대며 토론했다.

“아니, 절벽보다는 그 아래 언덕에 배치하는 게 낫죠.”

그걸 보던 엘런이 손가락으로 수정을 제안했다.

이놈들은 게임을 하듯 손가락으로 위치를 가리키고 배치를 바꾸며 논의를 이어 갔다.

정확한 대화가 오간 것도 아닌데, 그들은 뭔가 통하는 게 있는지 계속 그 짓을 했다.

복도를 가득 메운 덩치 큰 남자들은 전쟁 시뮬레이션 게임에 빠진 것이다.

전쟁에 얽힌 남주 설정값을 자랑하듯 그들은 서로 전략을 공유하며 재밌게 놀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 제가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듯하지만.

아니, 그건 둘째치고…….

너희 사람 앞에 두고 뭐 하니?

나는 흐린 눈으로 그들을 보다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다. 싸우는 것보다는 이게 낫지.

사이좋게 지내는 후궁들을 보는 황제의 기분이 이런 걸까.

골똘히 머리를 맞대고 다음 수를 고민하는 모습을 보는 게 차라리 나았다.

그래, 싸울 바엔 사이좋게 지내라.

나는 내 의식의 흐름에 놀라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미쳤어! 내가 왜 하렘 차린 황제의 기분을 이해하고 있어!

“다들 그만하세요! 이러다 늦겠어요. 그냥 셋이 같이 가요.”

내 말에 세 남자의 시선이 바닥에서 이쪽으로 올라왔다.

그 짧은 시간에 유대감이 생겼는지 그들은 으르렁 대지 않고 타협했다.

“그러지. 늦을 수는 없으니까.”

“나와 같은 입구를 쓰면 줄을 설 필요도 없으니 1분이면 들어갈 거야.”

끄덕.

“아, 알겠어요! 알겠으니까, 일단 가요. 앞으로 걸으세요!”

나는 세 사람의 등을 밀며 겨우 복도를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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