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며칠 전에도 봤잖아요.”
요한은 웃음을 참듯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말했다.
“[며칠이나 못 봤으니까요.]”
65년을 안 보고도 잘 살았으면서, 며칠 못 봤다고 보고 싶다니. 그게 말이 되나.
하지만 요한은 진심인 것처럼 계속 나를 쳐다봤다. 얼굴을 훑듯 미세하게 움직이는 푸른 눈동자를 보고 있으니 심장이 간지러웠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렸다.
“아, 그리고 어차피 겨울국에 온 김에 같이 지내요.”
“[……?]”
“이제 요한이 필요하거든요.”
“[네, 여기서 지내겠습니다.]”
요한은 1초도 고민하지 않고 답했다.
필요하다는 뜻을 오해한 듯하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닌데.
녹스파가 와해하고 녹스의 힘이 약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녹스에게 충성하는 이들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겨울국 황족인 리베라를 탐탁지 않아 할 게 뻔했다.
하지만 리베라의 옆에 남편인 마왕과 마족 제1 수호성인 아들이 있다면 쉽게 분란 종자를 누를 수 있지 않을까?
그 두 사람이 안전하면, 나도 겨울국에서 지내는 동안 안전할 거고.
그리고…….
나는 서늘한 바람이 부는 황성을 쳐다보다 다시 초점을 당겨 요한을 바라봤다.
어딘가에 숨어 있던 본심이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같이 있으면 좋잖아.’
나는 요한이 잡은 손에 힘을 주어 요한을 끌어당겼다.
“지낼 곳은 내일 황녀님이 알려 주실 거예요.”
“[왜 내일입니까?]”
“지금은 시간이 늦기도 했고, 내일 정권이 바뀔 것 같거든요. 실세가 방을 배정해 주면 요한한테도 좋을 거예요. 크고 편한 방을 줄 테니까요.”
그러고 보니 참 신기하다.
세상이 힘을 모아 안젤리카와 리베라를 돕는 느낌.
전부터 생각했는데 정말 황족은 하늘에서 정해 주는 것 같다.
자연스럽게 권력을 되찾은 그들의 팔자가 신기했다.
시스템은 유독 황족 캐릭터들에게 유하단 말이지.
나는 하늘을 보며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내 친구들이 잘되는 건 내게도 좋은 일이었다.
“오늘은 제 방에서 같이 자요.”
“[예?]”
요한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나는 손을 내저으며 변명했다.
“아, 황녀님이 좋은 방을 주셔서 안에 침실이 많거든요. 걱정하지 말아요.”
“[걱정한 건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요한은 빠르게 답했다.
아니. 걱정해야 하는데…….
나는 머릿속 생각을 들키지 않기 위해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잡은 손을 끌어 내가 머무는 귀빈성으로 그를 데려갔다.
요한은 순순히 달빛이 들이찬 겨울 황성을 걸어 나를 따라왔다.
***
겨울국 황제는 스스로를 신격화할 정도로 권위적인 자였다.
그래서인지 내각 회의장의 구조도 남달랐다.
위계질서가 확실한 구조.
달리기해도 좋을 정도로 긴 테이블. 가장 안쪽, 좁은 면 앞에만 의자가 하나 놓여 있다.
검은 머리칼을 로우번으로 단정하게 정리한 리베라가 그 의자에 앉아 있었다.
테이블 양옆으로 길게 늘어선 겨울국 협회원들은 긴장한 얼굴로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조용히 앉아 있는 황녀와 그 뒤에 서 있는 은발의 남자가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주도한다.
협회원들은 은발의 남자가 자신들을 쳐다보자 필사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대체 마왕이 여기 왜 있냐고!’
기껏 평화를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마왕이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리베라 황녀는 평온한 얼굴로 긴장된 분위기를 무시했다.
사락.
그녀는 눈동자만 아래로 내려 겨울국 재건을 위해 진행해 온 행정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사락.
페이지를 넘기던 그녀가 움직임을 멈췄다.
“여기.”
차가운 목소리가 협회원들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왜 황실 재산을 봄국에 송금한다고 쓰여 있는 거지?”
“아, 그건 오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안젤리카 황녀님께서 해결해 주신 덕분에 잘 처리되었습니다. 봄국의 채무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협회원 하나가 급하게 설명했다.
그러자 황녀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느릿하게 올라오는 푸른 시선이 대답한 협회원의 목을 조였다.
“황녀?”
그녀의 반문에 다시 침묵이 시작됐다.
“호칭이 이상하구나. 황제는 죽었고, 그의 누이와 손녀만 살아남았으니 정리를 해야 할 텐데.”
잠시 말을 멈춘 그녀가 날카롭게 물었다.
“그동안 안 하고 뭘 한 거지?”
매서운 말에 모두가 시선을 허공에 둔 채 침묵했다.
리베라는 그들에게 책임을 더 묻는 대신 왼쪽 대각선에 서 있던 안젤리카를 쳐다봤다.
“황제가 되고 싶니?”
“네, 네?”
안젤리카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얼른 고개를 저었다.
리베라는 그럴 줄 알았는지 표정 변화 없이 시선을 미끄러뜨렸다.
“너는?”
베로니카는 무서운 황녀의 눈빛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걸 긍정으로 여겼는지 리베라는 홀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네가 황제를 하거라. 미약하지만, 너는 이능도 있으니.”
“레이디 베로니카는 아직…….”
녹스가 입을 열자 황녀가 눈동자를 굴려 녹스를 응시했다.
날 선 목소리가 테이블 위로 내려앉았다.
“누가 허락도 없이 입을 열어도 좋다고 했지?”
리베라 황녀는 사생아 자매들과 반대되는 캐릭터였다.
누울 자리를 보고 발 뻗는다고, 말랑말랑한 소녀들을 보다가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냉랭한 여인을 마주하니 함부로 말을 뱉을 수가 없었다.
리베라는 협회원들을 훑어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그간 살 만했나 보군.”
협회원들의 표정에서 진한 탈력감이 느껴졌다.
왜 선조들이 황실을 배신하고 반란을 일으켰는지 알 것 같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 불충한 마음은 저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붉은 눈동자를 보는 순간 싹 사라졌다.
‘아니, 진짜로! 대체 왜 마왕이 여기 있는 건데!’
불순한 신하들을 노려보던 마왕이 다시 황녀의 뒷모습으로 시선을 틀었다.
그러자 같은 존재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그의 눈빛이 온화해졌다.
협회원들은 눈치를 보며 경악했다.
‘당신들 대체 무슨 사이야!’
황녀를 감금하고 얼렸다기에 잔혹한 고문을 한 줄 알았는데, 역사가 왜곡된 모양이었다.
황녀는 저를 보고 있는 마왕의 시선을 무시하며 회의를 이어 갔다.
“3국의 지도자들이 황성에 방문한 김에 대관식도 끝내 버리지. 내일 대관식을 준비하게.”
“내, 내일요?”
협회원 하나가 입을 열었다가 움찔하고는 얼른 입을 꾹 다물었다.
허락하기 전에 입 열지 말라고 하셨지.
황녀는 그를 잠시 쳐다보다 못 들은 척해 주었다.
“내일 대관식을 하고 안젤리카는 황제의 형제에게 주어지는 클라렌스 공작위를 차차 받도록 하지.”
그녀는 뭔가 생각이 났는지 감탄사를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 시간이 꼬인 걸 깜빡했군. 일단은 황제의 형제였던 내가 그 작위를 갖고 있으니, 바로 수여할 수가 없군.”
그녀는 테이블을 톡톡 건드리다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사촌인 에든버러 공작이 지금 죽고 그 작위를 받을 이가 없다 했으니, 레이디 안젤리카가 그 작위를 받는 거로 하지.”
순식간에 호칭 정리를 끝낸 그녀는 두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 가만히 맞잡았다.
“할 말 있나?”
드디어 그녀가 발언권을 주었다.
눈치를 보던 협회원 하나가 물었다
“뒤에 계신 저분은 누구인지 여쭈어도 될까요.”
리베라는 살짝 뒤로 고개를 틀어 마왕을 보고는 아,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신경 쓸 것 없다. 일단 남편 비슷한 거니 지낼 방 하나를 준비하도록.”
마왕이 서운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끼어들었다.
“남편 비슷한 거라니……. 어떻게 나를 그런 모호한 관계로…….”
“모르는 자이니 사용인을 위한 방을 준비하면 될 것이다.”
“그렇지. 나는 남편 비슷한 것이지. 그대의 남편 비슷한 게 맞아.”
마왕은 황녀가 자신을 손절하려 하자 빠르게 태도를 바꿨다.
인간을 심심풀이로 학살하던 존재가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하찮아 보였다.
‘아니야. 기분 탓이겠지…….’
협회원들은 혼란을 애써 털어 냈다.
그때, 긴 테이블의 중간쯤에 서 있던 협회원 하나가 큰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막 잠에서 깨신 분께 이런 말씀을 드리기 죄송하지만, 급한 사안이라 바로 보고드리는 점 이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서론이 길다.”
“남부에서 황도로 이어지는 다리가 부식되었습니다. 새로 증축을 해야 하는데 시간이 부족합니다.”
황녀가 미간을 찌푸리자 협회원이 황급히 본론을 요약했다.
“아직 제국에 정착한 건설 인력이 부족하다고 했지.”
“예.”
그녀는 협회원들의 고충을 이해한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까칠한 황녀가 보여 준 작은 이해심은 파장이 컸다.
다른 협회원이 그 모습에 감동하여 용기를 내어 간언했다.
“마족은 얼음의 이능을 사용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혹, 황녀님의 부군께서 얼음으로 다리를 축조해 주시면 어떠실지……. 으악!”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협회원의 주변으로 얼음 감옥이 생겨났다.
날카로운 창살에 갇힌 협회원이 그대로 기절했다.
포효처럼 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흘러왔다.
“감히 필멸자 주제에 이 몸을 이용하려 들다니. 그 건방진 생각은 죽음으로도 갚을 수 없는…….”
“해.”
“최선을 다해 보지.”
단호한 리베라의 말에 마왕이 분노를 거두고 열정을 보였다.
홀에 적막이 감돌았다.
누구도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이능이 없어 무시받던 황녀라 들었는데, 지금 감히 누가 그녀를 무시할 수 있을까.
뒤에 제정신이 아닌 비밀 병기를 달고 있는데.
일어나자마자 서열 정리를 끝낸 리베라 황녀가 차분히 시선을 틀어 녹스를 응시했다.
“녹스 프레센치아 공작.”
“예.”
“그대의 가문이 그동안 황실을 대리해 제국민을 살뜰히 이끌었다는 걸 들었다. 황실을 대신해 감사를 전하네.”
“과찬이십니다.”
“후후, 그간 수고가 많았어.”
그녀는 웃음기 하나 없는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이제 그 짐은 모두 내려 두고 그대의 영지로 돌아가게. 프레센치아령의 영지민에게 그대를 돌려주어야 내 면이 살 테니.”
녹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내일 대관식이 끝나는 대로 돌아가도록.”
황녀는 뒷말을 듣지도 않고 일어났다.
녹스는 사라지는 황녀의 뒷모습을 보며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렸다.
숨기려 하였으나 그가 주먹을 꽉 쥐는 모습이 모든 협회원의 눈에 담겼다.
협회원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명실상부한 정권 교체였다.
겨울국의 새로운 실세가 될 황녀는 일어나자마자 녹스를 내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