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이 내역서는 어디서 난 겁니까?”
조용히 있던 한 협회원이 출처를 요구했다.
“봄국 황녀님이 직접 찾아주셨습니다.”
그의 시선이 봄국 재정관에게 미끄러졌다.
“……봄국 황녀님은 정말 8살이 맞으십니까?”
“봄국의 장래가 참 밝다니까요.”
할리나가 대답을 가로챘다.
그 말에 협회원이 찜찜한 시선을 내려 다시 내용을 살폈다.
서류의 진위를 판별하는 마석을 들어 확인했으나, 이번에도 진짜였다.
할리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 갔다.
“황실로부터 그림을 구매하셨던데, 아주 거액에 구매하셨더라고요. 1점당 가격이 1천만 골드네요. 1년 전에 황실에서 그 그림을 1점당 200만 골드에 구매했는데 말이죠.”
“그림은 값이 오를 수도 있죠.”
“5배나요? 1년 만에?”
할리나는 질문으로 녹스의 말을 잘라 내고 다시 말을 이었다.
“문제는 그게 다가 아닙니다. 입금 명세서에는 1점당 1천만 골드, 12점 1억 2천만 골드를 송금한 거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 황실 금고에 들어간 골드는 없더군요.”
순간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무거운 침묵을 가르며 할리나가 천천히 말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시나리오를 예상했습니다.”
할리나는 손으로 테이블을 짚었다.
“구매를 취소하면, 황실은 프레센치아가에 돈을 돌려줄 텐데.”
그녀의 손가락이 쓱 움직여 맞은편에 앉은 녹스에게로 미끄러졌다.
“황실에서 프레센치아가에 1억 2천만 골드를 입금하면, 프레센치아가 금고에는 실제로 나간 적 없는 1억 2천만 골드가 새로 들어오게 되는 거죠.”
그 말에 협회원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할리나는 그 표정을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예, 1억 2천만 골드. 프레센치아가에서 올해 겨울국 구휼 자금으로 지원하기로 한 그 액수입니다.”
“협회장님!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지금 프레센치아가에서 돈을 받고, 겨울국 황실 재산을 봄국에 넘기려 했다는 겁니까?”
할리나는 트롤리를 눈짓하며 말했다.
“믿지 못하시겠다면 이것 또한 증거가 있습니다. 직접 확인하셔도 좋습니다.”
이번에는 조수가 가만히 있었다.
원하면 알아서 가져가라는 뜻이었다.
높게 쌓인 서류를 보며 겨울국 협회원이 힘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저 서류를 다 읽었다는 겁니까?”
의심스러운 목소리에 할리나가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변호사들이 얼마나 많은 서류를 검토하는지 아시면 다시는 수임료를 아까워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런데 대체 누가 당신을 고용한 겁니까.”
한 협회원이 데이지와 할리나를 흘긋거리며 말했다.
할리나는 안젤리카를 향해 가볍게 묵례를 했다.
“안젤리카 황녀님께서 제국에 매국노가 있으니 은밀하게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안젤리카에게 박혔다.
안젤리카는 입을 벌렸다. 자신은 이걸 부탁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협회원들은 그런 그녀의 태도에 더 놀랐다.
맨날 눈을 크게 뜨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을 하더니, 그게 다 컨셉이었던 모양이다.
멍청한 척하는 사람이 가장 무섭다고 어쩌면 자신들을 떠보기 위해 힘을 숨겼던 걸지도 모른다.
힘을 숨긴 캐릭터는 맞지만, 그쪽 힘이 아닌데 협회원들은 안젤리카를 보며 긴장했다.
“협회의 장이라는 분이 모두의 눈을 가리고 영웅 행세를 하니, 안젤리카 황녀님은 공개적인 자리에서 예고 없이 밝히는 게 최선이라 생각하셨습니다. 부디 저의 무례를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데이지가 그들에게 사과하자 할리나도 따라 묵례했다.
“사과의 뜻으로 제 명예를 걸고 봄국이 요구한 상환액을 최소 100분의 1로 낮춰 드리겠습니다.”
역시 사과는 돈으로 해야 한다. 할리나의 말에 겨울국 협회원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혼란을 투척한 데이지와 할리나 탓에 회의에 참석한 이들이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안젤리카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안젤리카의 머릿속으로 메시지가 파고들었다.
[데이지: 영애, 지금이에요!]
그 말에 안젤리카는 정신을 차렸다.
모든 게 빌드업이었구나!
안젤리카는 어제 뜬금없이 전달받은 대본을 떠올리며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 그리고 그 빚은 제가 상환하겠습니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안젤리카를 향했다.
안젤리카는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차분하게 귓가로 들리는 메시지를 따라 말했다.
“어릴 적 외할아버지께서 해 주신 말이 있어요. 다자르의 설원, 이제는 다시 평원이 된 그곳에 불의 이능 부산물을 남겨 두셨다고요.”
“외할아버지시면 폐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겨울국 협회원이 경악한 듯 말했다.
안젤리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겨울국 황실에서 남긴 자산이니, 황실의 잘못으로 나라를 잃은 제국민을 위로하는 데 쓰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잠시 침묵이 일었다.
안젤리카는 긴장한 채 마지막 대사를 읊었다.
“역사에 진 빚을 갚을 수 있다면 아우로라 황실의 영광일 거예요.”
그녀는 제 성을 말하며 그들의 머릿속에서 자신의 신분을 공고히 했다.
10분도 걸리지 않은 시간.
짧은 순간이었지만, 분명 흐름이 바뀌었다.
황궁의 주인이 누가 될지는 확실해졌다.
***
할리나가 뒤돌아 다시 회의가 시작된 문을 쳐다봤다.
“겨울국 협회원들은 이제 막 조국을 되찾아서 그런지 애국심이 강하네요.”
“그러게요. 녹스를 잘 밟아 줬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이 일로 녹스가 추방되거나 작위를 뺏길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대귀족이니 쉽게 몰락하지는 않겠지.
게다가 오랜 시간 겨울국 업무 전반을 관리해 온 녹스는 제국의 기틀을 다져야 하는 지금 꼭 필요한 인재였다.
그래도 앞으로는 감히 안젤리카를 제 아래로 둘 생각은 못 할 거야.
애초에 겨울국의 부국강병을 위해 녹스를 지지했던지라, 녹스파는 쉽게 안젤리카에게 줄을 갈아탔다.
정통성 있는 황녀가 힘을 숨긴 천재였는데, 돈도 많고, 애국심도 대단하고.
허울뿐인 무능한 황족에게 자리를 주기 싫어했던 능력주의자들이라 그들은 마음속 주군을 바꾸는데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할리나 영애,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할리나는 무슨 소리냐는 듯 나를 쳐다봤다.
“아까 사무관이 가져온 서류 보니까 엄청 많던데 무리하신 거 아니에요?”
“아, 그거 다 볼 필요 없어요. 필요한 서류만 찾아주는 버프가 있어서. 검토 안 해도 증거만 바로 찾을 수 있어요.”
맞다. 그 버프 덕분에 여름국 국서도 구명할 수 있었지.
“와, 영애 버프 정말 좋네요.”
“좋지요.”
할리나는 부정하지 않고 웃었다.
그때, 회의가 끝났는지 안젤리카가 달려 나왔다.
그녀는 금세 우리에게 도착했다.
숨을 고르자마자 안젤리카가 물었다.
“어, 어떻게 하신 거예요?”
“녹스가 수상해서 할리나 영애님께 부탁 좀 드렸죠.”
나는 할리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런데 좋아할 거라 생각했는데, 안젤리카가 울먹였다.
“왜 울어요?”
당황해 물으니 안젤리카가 손등으로 눈가를 닦았다.
“저는…… 아무 도움도 못 드리는데 이렇게 도와주시고……. 제가 너무 앞가림도 못 하니까 짐이 되는 거 같아서요.”
할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저도 그렇고 다들 도움받으면서 적응했어요.”
“맞아요. 그리고 영애가 처음 만난 유저가 제가 아니라 다른 분이었으면 영애 전개는 훨씬 더 쉬웠을 거예요.”
“아니에요! 데이지 영애가 최고예요!”
갑자기 안젤리카가 말을 끊었다.
“하하.”
그게 웃긴지 할리나가 대놓고 웃었다. 나는 따라 웃지 못하고 안젤리카를 달랬다.
“고마워요. 어쨌든 이상한 생각 하지 말아요. 저 여기서 며칠 더 있을 거니까 문제 생기면 같이 머리 맞대고 방법을 찾아봐요.”
안젤리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녀가 하려던 말을 들을 수는 없었다.
“안젤리카 황녀님.”
문가에서 안젤리카를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이제 황녀라고 하네요.”
“기강이 잘 잡히고 있군요.”
할리나와 나는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젤리카는 그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럼 저는 다시 들어가 볼게요.”
“네, 화이팅!”
안젤리카는 할리나와 내게 작게 손을 흔들고는 다시 회의실로 돌아갔다.
“우리는 이제 뒤처리하러 갈까요?”
“네. 근데 서류 정리는 얼마나 걸리나요?”
“뭐, 얼마 안 걸려요. 영애는 필기 버프도 있으니까 더 빨리 끝나겠죠.”
“속도보다는 서체에 특화된 버프라 빨리 끝날지는 모르겠네요.”
나와 할리나는 남은 일을 정리하러 함께 돌아갔다.
***
다행히 할리나와 함께 한 서류 정리는 생각보다 일찍 끝났다.
“요즘 일이 잘 풀리네.”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침대로 돌아가 노트북을 꺼냈다.
“그래도 고생했으니까 자기 전에 힐링 영상 보고 자야지.”
최근 수인 영애 키스카가 겨울국으로 온 김에 특별 브이로그 영상을 올리고 있었다.
눈밭에서 구르는 고양이 영상을 볼 생각으로 침대 헤드에 기대고 전원을 켜려던 순간이었다.
나는 검은 화면을 보다 그대로 굳어 버렸다.
검은 화면에 창밖의 정경이 비쳤다.
동면 중인 리베라 황녀 영애가 있는 탑과 그 옆으로 비스듬히 놓인 하얀 선.
희미하긴 하나 윤곽은 선명했다.
그 선은 계단이었다.
바닥에서 생겨난 얼음 계단이 황녀가 잠들어 있는 창문까지 이어진 거였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침대에서 내려와 창문으로 걸어갔다.
창문 틈으로 들어온 바람이 뺨을 간질였다.
파도처럼 밀려왔다 다시 물러나는 익숙한 바람.
빙결 이능이다.
사계국으로 건너오고 황녀를 찾아올 마족이라면…….
마왕?
나는 터진 비명을 누르기 위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어, 어떡해! 리베라 영애 괜찮으신 걸까?
나는 반사적으로 황녀가 있는 성으로 뛰어나가려다 멈칫했다.
최약체인 내가 가 봤자 뭘 할 수 있다고.
마족어를 할 수 있으니 대화 정도는 가능하겠지만, 마왕이랑 대화가 될까?
안 되겠지.
불길로 뛰어드는 부나방 그 자체였다.
나는 바로 메시지를 켰다.
[영애, 주무시나요?]
수신자는 디아나였다.
***
나는 겨울국 황성에 방문한 모든 유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겨울국 황성에 모인 유저들은 모두 내 방으로 찾아와 그 얼음 다리를 보고 경악했다.
디아나는 바로 황녀를 구하러 가겠다고 전투적인 태세를 보였고, 나와 안젤리카는 그녀의 양팔을 잡고 뜯어말렸다.
“마왕은 재앙이었잖아요. 대면하지 않고 해결할 방법을 생각해 봐요!”
“지금 황녀 영애 혼자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생각이라니요. 저 혼자라도 다녀올게요.”
“아악! 안 돼요. 영애!”
“위험해요오오오! 흐으윽. 가지마아아요!”
황녀 영애를 지키고 싶은 마음 반, 디아나 영애를 위험에 처하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 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알렉스나 다른 남주들을 깨우면 마왕이랑 싸울 수도 있으니 그게 더 위험했다.
기껏 재앙을 막았는데 전투라니! 안 돼! 절대 안 돼!
일단 마왕은 리베라 영애를 좋아하니까 영애에게 나쁜 짓을 하지는 않을 거다.
아마 그럴 거다.
아니, 그러니까 더 나쁜 짓을 할지도 모르잖아!
지가 동화 속 왕자님인 줄 알고 몰래 입이라도 맞추면 어떡해!
답이 없다.
발을 동동 구르는데 누군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수인 영애 키스카였다.
잠옷 차림의 그녀는 양 갈래머리처럼 뾰족하게 솟은 회색 귀를 그대로 둔 채 노트북을 들고 협탁으로 뛰어갔다.
급히 오느라 아직 귀를 없애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귀여운 외형과 어울리지 않는 단호한 목소리로 우리를 불렀다.
“다들 이쪽으로 와요!”
“영애, 귀가…….”
“아.”
수인영애는 별거 아니라는 듯 귀를 만지더니 그대로 고양이 귀를 없애 버렸다. 왜인지 조금 아쉬웠다.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이것 보세요!”
그녀는 노트북 화면을 돌리더니 우리에게 보여 줬다.
“지금 새한테 태블릿 쥐여 줘서 보냈으니까 여기서 상황 지켜보다가 위험해지면 그때 달려가요.”
수인 영애는 잠시 침묵했다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목숨을 걸어요.”
수인 영애가 합리적인 방법을 찾아낸지라,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던 디아나도 협탁으로 걸어왔다.
그 순간이었다.
“어어! 황녀 영애가 보여요!”
어두운 화면에 뜬 침대를 보며 우리는 입을 다물었다.
이제 막 창가에 도착했는지 화면이 흔들리긴 했지만, 새는 똑똑하게도 열린 창가에 태블릿이 담긴 바구니를 잘 올려 두었다.
화면 가득 황녀 영애의 방이 담겼다.
침대에 평화로운 얼굴로 누워 있는 그녀의 모습과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장발 남자의 뒷모습이 동시에 송출됐다.
그때, 기척을 느꼈는지 은발 장발 남주가 천천히 뒤를 돌았다.
“헉, 저게 마왕인가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