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3국의 황족이 황성에 머무르는 요즘 겨울국 협회 실무진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바쁜 시간을 보냈다.
아직 처리해야 할 국정 실행안이 잔뜩 쌓여 있는데, 3국에서 방문한 김에 외교 업무도 진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테이블에 앉은 겨울국 협회원들은 피곤한 낯을 했다.
반면 맞은편에 앉은 봄국 재정관들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안젤리카는 그 사이에서 눈치를 봤다.
그때, 녹스가 가증스럽게도 다정한 목소리로 안젤리카를 살폈다.
“괜찮습니까?”
안젤리카는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시선을 틀었다.
안젤리카는 입을 꾹 다문 채 날아오는 따가운 눈초리를 피했다.
녹스는 겨울국을 위해 애쓰는데, 왜 못살게 구냐는 눈빛이었다.
안젤리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이 회의에 참석하기는커녕 오늘도 이불 속에서 울고 싶었다.
하지만 데이지는 어떻게든 녹스를 설득해서 이 회의에 참석하라고 말했다.
이해가 가지는 않았지만, 안젤리카는 그녀의 조언대로 했다. 안젤리카는 데이지를 전적으로 신뢰했다.
“레이디 안젤리카, 그럼 이제 인장을 찍겠습니다.”
녹스는 그녀에게 인장을 건넸다.
그는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그녀를 겨울국 황족 취급했다. 안젤리카는 마석 인장을 받고 입술을 깨물었다.
데이지는 자신이 올 때까지 황실 인장을 찍지 말고 기다려 달라고 했다.
‘어떻게 버티지…….’
그때였다.
“잠시만요.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안젤리카 황녀님의 명입니다. 비키세요.”
“안 된다니까요! 으앗!”
밖에서 소란이 일었다.
달칵.
결국 문이 열렸고, 안젤리카는 들어오는 이들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데이지와 처음 보는 여자가 서 있었다.
그런데 그 여자의 손목에는 워치가 감겨 있었다.
유저신가? 누구지?
안젤리카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데이지가 시야에 담기니 이루 말할 수 없는 안정감을 느꼈다.
딱딱하게 굳었던 어깨가 풀어지는데, 어떤 남자가 트롤리를 밀면서 뒤따라 들어왔다.
드르르륵.
서류가 잔뜩 쌓인 카트는 안으로 들어와 원탁 옆에서 멈췄다.
“테디, 여기 계신 분들에게 한 부씩 나눠 드리도록.”
조수로 보이는 남자는 여자의 말을 따라 사람들 앞에 서류를 한 부씩 내려 두었다.
안젤리카는 제 앞에 놓인 문서를 보고는 미간을 살포시 좁혔다.
[봄국 물가 보고서]
봄국의 물가가 채무 상환과 무슨 관련이 있는 거지?
조수가 서류 배부를 마치자 데이지가 허리를 숙였다가 몸을 세웠다.
“회의 중에 끼어들어 죄송합니다. 한시가 급한 일이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부디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녀는 전혀 죄송하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레이디 데이지.”
녹스가 차가운 목소리로 데이지를 불렀다.
“그간 그대의 무례를 넘겨 왔는데 이건 도가 지나치군요.”
가뜩이나 무서운 인상인데 녹스가 웃음기를 싹 빼고 말하니 칼바람이 이는 듯했다. 그러나 데이지는 전혀 주눅 들지 않고 한쪽 눈썹을 까닥 들어올렸다.
안젤리카는 그 두 사람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제가!”
그녀의 다급한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이쪽으로 집중됐다.
안젤리카는 목을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크흠. 제, 제가 레이디 데이지에게 요청했어요!”
비록 협회장인 녹스가 실세긴 하지만 표면적으로 가장 높은 신분을 가진 이는 안젤리카였다.
마지막 황제의 손녀라는 걸 녹스가 스스로 알렸으니 그조차도 안젤리카에게 명령할 수 없었다.
용기가 생긴 안젤리카는 허리를 바짝 세우고 말했다.
“그, 그래요, 레이디 데이지. 어서 모두에게 알려 주세요. 제가 미리 부탁한 그거요.”
상황을 가장 빠르게 파악한 이는 데이지의 옆에 서 있던 유저였다.
그녀는 간단하게 제 소개를 했다.
“가을국에서 법무법인을 운영하는 할리나 에드윈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몇 분 얼굴을 뵈었던 분들도 계시네요.”
그녀는 입매를 한 번 휘어 영혼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스몰 토크는 여기까지라는 듯 빠르게 제 본론을 말했다.
“봄국에서 산정한 채무 정산액은 과청구되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봄국의 재정관이 책상을 치며 불만을 표했다.
할리나는 시선을 서류로 떨어뜨렸다.
“봄국 물가 상승률을 7%로 상정하여 50년 복리로 산출하셨더군요.”
그녀는 페이지를 넘기며 말했다.
“그리고 이 자료는 봄국 황실 재무청에 보관된 연간 물가 상승률 보고서입니다. 청구된 50년의 기록을 전부 가져왔고요.”
그녀는 휘리릭 종이를 넘기다 시선을 들어 봄국 대신들을 응시했다.
“보시다시피 실제 봄국 물가 상승률은 매년 1~3% 내외로 안정적이었으며 34년 전, 12년 전, 4년 전 물가가 불안정했을 때 8%, 5%, 6%로 상승했을 뿐입니다.”
겨울국 협회원들이 혀를 찼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말도 안 됩니다. 봄국에서 수치를 속이다니요! 협회장님이 그런 숫자 놀음에 속으실 리가.”
“직접 확인해 보시죠.”
할리나는 겨울국 협회원들이 자료를 확인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녹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할리나는 표정 변화 없이 말했다.
“숫자는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겨울국 협회원들은 눈치를 보며 얼른 종이를 넘겼다.
“우리가 봄국 재무청 자료를 관리하는 사람인데 대체 이 자료를 어떻게 받았다는 겁니까?”
봄국 재무관이 흥분해서 벌떡 일어났다.
할리나는 차분한 얼굴로 트롤리에 놓여 있던 종이 한 장을 들었다.
“봄국 황녀님께서 반출 후 직접 인장을 찍어 보증해 주셨습니다. 마석으로 판별해 보셔도 됩니다.”
“그,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우리 황녀님은 올해 8살이십니다!”
할리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덤덤하게 말했다.
“그러니까요. 봄국의 장래가 참 밝지요? 재무 전문가들도 못 찾은 자료를 그 어린 황녀님께서 정확하게 찾아내시고.”
“거 무슨 말장난을……!”
“장관님 이, 이것 좀 보십시오.”
봄국 관리가 화를 내자, 그 옆에 있던 사람이 그를 말리며 판별기를 가리켰다.
“이게 무슨…….”
그는 어이가 없는지 제가 직접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위조 문서 판별기에 인장을 스캔했다.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정말 봄국 황실의 인장이었기 때문이다.
라리사가 찍은 인장임을 확인한 재무관들은 당황한 얼굴로 서류를 다시 확인했다.
그때, 다른 재무관이 반박했다.
“인장 옆에 반출 날짜가 이틀 전으로 쓰여 있지 않습니까. 이 많은 서류를 이틀 만에 확인했을 리 없습니다!”
할리나는 제 앞으로 와 따지는 재무관에게 라리사의 인장이 찍힌 반출 확인서를 꺼내 쥐여 주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변호사들이 하루에 얼마나 많은 서류를 검토하는지 알면 앞으로 수임료 비싸다는 생각은 못 하실 겁니다.”
할리나가 눈짓하자 그의 조수가 새로운 문서를 다시 테이블에 한 부씩 내려 두었다.
안젤리카는 눈치를 보며 제 앞에 놓인 서류를 넘겼다.
봄국 황실에서 작성한 겨울국 협회 지원 계획서였다. 지원하는 금액과 조건에 대한 내용이 적힌.
애초에 봄국은 겨울국 협회에 무이자로 지원금을 전달하기로 약속했었다.
마왕의 힘을 경험한 50년 전, 선조들은 겨울국이 재건될 수 있을 거라 믿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서 그들은 되돌려 받을 수 없는 돈이라 여기고, 인도적 차원으로 겨울국 협회를 지원한다고 명시해 두었다.
낯 뜨겁게도 이 지원 계획서에는 봄국 선황제가 자신의 아량을 자랑하는 문구가 잔뜩 적혀 있었다.
“봄국 선황제께서는 보시다시피 지원금의 상환 일정과 기간을 적지 않으셨습니다. 인도적 차원의 지원이었으니까요. 현황제께서 작성하신 추가 지원 계약서에도 상환 일정과 기간이 적혀 있지 않습니다. 당연히 이자율에 대한 명시도 없지요.”
할리나는 다시 물가 상승률 문서를 들었다.
“그래서 봄국 재정관들은 상환액을 부풀리기 위해, 이자율 대신 물가 상승률을 반영했죠.”
이제 겨울국 협회원들도 눈치를 챘는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시선을 흘긋거리며 녹스를 쳐다봤다.
그 시선은 분명 전과 달랐다.
“20페이지를 봐 주세요. 실제 봄국 물가 상승률을 반영한 봄국의 지원금입니다. 거의 100분의 1로 줄어들죠.”
할리나는 협회장을 보며 말을 이었다.
“봄국 황실이 말도 안 되는 액수를 요청했는데, 이 제안을 덥석 수락하시다니 안타깝습니다. 저에게 상담을 받으셨다면 이런 바가지를 쓰지 않으셨을 텐데 말이죠.”
할리나는 자신의 법률 사무소를 자연스럽게 홍보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이제 다들 보셨겠지만 지난 50년간 3국은 겨울국의 재건을 예상하지 못했고, 빚을 돌려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봄국 대신들이 눈빛을 교환하다 마른침을 삼켰다.
할리나는 그 눈빛을 모른 척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무작정 돈을 내어 주면 제국민들이 반발할 테고, 그렇다고 모른 척하면 난민들이 치안을 위협하는 위험분자가 될 수 있으니 대출 형식으로 인도적인 정착을 지원한 거죠.”
그녀는 트롤리에 있던 새로운 서류를 하나 들었다.
그러자 조수가 눈치 빠르게 다시 새로운 서류를 참석자들 앞에 한 부씩 내려 두었다.
여름국과 가을국의 계약서 사본이었다.
“여름국과 가을국도 무이자에 상환일조차 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직 봄국만, 인도적 차원으로 건넨 지원금을 갑자기 상환 요청하면서 말도 안 되는 물가 상승률을 반영했습니다.”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강조하듯 힘주어 말했다.
“이게 바로 사기입니다.”
할리나는 날카로운 시선을 미끄러뜨려 녹스를 응시했다.
“간 크게 이런 사기를 친다는 건 보통 내부에 한편이 있다는 뜻이죠.”
겨울국 협회원들의 시선이 냉큼 녹스에게로 흘러갔다.
“협회장님!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물가 상승률로 사기를 치다니요. 알고 계셨습니까?”
할리나는 거기서 끝내지 않았다.
그녀의 눈짓에 조수가 재빨리 새로운 서류를 나눠 줬다.
“봄국 황실 은행에 기록된 황실 계좌의 거래 내역서입니다. 프레센치아가에서 황실로 입금한 액수를 봐 주십시오.”
할리나는 본격적으로 녹스를 조각조각 다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