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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0 영애-186화 (187/208)

186화.

5층까지 쉬지 않고 달려 올라갔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멈출 수 없었다.

“하아.”

난간에 기대 거친 숨을 몰아쉰 나는 복도를 응시했다.

달빛에 의지한 어둑한 복도에 그림과 골동품이 가득했다.

5층은 갤러리인 모양이다.

그게 조금 의아했다.

보통은 1층 홀이나 복도에 갤러리를 만들어 집주인의 안목을 과시하던데 5층에 예술품을 걸어 두다니.

도난이 걱정된 건가.

아무래도 여기 걸린 그림과 골동품들은 아주 귀한 물건인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걸어가는데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안젤리카?”

거대한 여신상 옆에 안젤리카가 앉아 있었다.

어둠 속에 쪼그려 앉아 있는 그녀 또한 조각상 같아서 눈에 잘 띄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앉았다.

“안젤리카.”

안젤리카는 내가 온 걸 알면서도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요?”

마침내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물에 젖은 얼굴이 달빛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자괴감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흐윽, 저는 왜 이렇게 제대로 하는 게 없을까요?”

안젤리카가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저 못 하겠어요. 너무 어려워요. 흐으윽, 봄국으로 가고 싶어요.”

녹스와 그 수하들이 안젤리카를 또 괴롭힌 모양이었다.

그녀가 느낀 부담이나 상처를 전부 아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녀가 왜 속상해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나도 남주 선택을 앞두고 내 무능 때문에 힘들어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해하는 것과 별개로 그녀를 도와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나는 답답한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차라리 내가 아니라 다른 영애가 왔어야 했나. 그러면 안젤리카를 제대로 도와줬을 텐데.

나는 잘못된 선택을 했을 때, 시에나가 시간을 돌려 주어 다시 선택할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나는 안젤리카를 도와줄 수 없었다.

오히려 내가 제안한 방법은 그녀를 더 힘들게 했다.

무기력함은 전염되기라도 하는 걸까. 덩달아 나도 우울해졌다.

차라리 아이시스가 나 대신 여기에 왔다면, 저 예의 없는 인간들의 생각을 바꿔 안젤리카는 존중받으며 지냈을 텐데.

적막한 복도로 슬픈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 정말 자신 없어요.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흐윽, 벽 앞에 선 것처럼 앞이 보이지 않아요.”

나는 그녀의 마음을 이해했다.

누구나 그럴 때가 있지 않나.

상황은 이미 눈앞에 던져졌는데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을 때. 꾸역꾸역 생각해 낸 방법은 말이 되지 않아 결국 포기하게 될 때.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위기를 맞이한 그 공포감. 안젤리카는 그 벽을 마주한 것 같았다.

나는 그녀보다 조금 더 오래 이곳에 있었을 뿐 그녀와 같았다. 나도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다.

차라리 그날 나 말고 다른 유저를 찾아가라고 권해 줄걸.

타임라인이 더 길거나 능력이 좋은 유저가 도와주었다면 안젤리카의 이야기가 더 쉽게 풀렸을 텐데.

호의였던 마음이 책임감에 짓눌려 자괴감으로 변해 갔다.

나는 굳은 손을 내밀어 안젤리카의 등을 토닥였다.

지금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위로뿐인 것 같았다.

속이 답답해 고개를 들어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복도 창으로 들어온 달빛이 벽을 흑백으로 가르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 시선을 둔 채 우는 안젤리카를 달랬다.

오직 빛의 영역에 든 그림들만이 선명하게 보인다.

차가운 얼굴의 초상화, 겨울을 그린 풍경, 전쟁 속에서 칼을 든 기사들.

기분 탓인지 벽을 가득 채운 그림들이 금방이라도 우리를 덮쳐 올 듯 무섭게 느껴졌다.

나는 무거운 시선을 내렸다.

안젤리카의 등이 어둠과 달빛에 사선으로 찢겨 있었다.

가만히 그것을 보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때, 머릿속으로 번쩍 섬광이 스쳤다.

나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올라간 시야에 수십 점의 그림이 다시 담겼다.

나는 하얀 월광의 끝에 걸린 설원을 응시했다.

나무들이 눈에 파묻힌 유화.

비슷한 풍경을 담은 그림 12점이 어둠 속으로 나란히 이어졌다.

‘겨울국의 몰락.’

분명 봄국 황실에 있던 비자금 용도의 예술품이었다.

나는 예전에 아빠가 해 주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미리 구매한 그림을 비싸게 되팔아 비자금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고.

그리고 ‘겨울국의 몰락’ 시리즈는 시스템이 공인한 봄국 황제의 비자금이었다.

그 말은 누군가 봄국 황제에게서 저 그림을 비싸게 사 주었다는 뜻이다.

머릿속에서 생각이 가지를 뻗어 나갔다.

나는 하얀 설원을 응시하며 안젤라카의 등을 토닥였다.

“괜찮아요. 우리 잘못이 아니에요.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나잖아요.”

여전히 그림에 시선을 둔 채 덧붙였다.

“그럴 때는 도움을 받으면 돼요.”

***

녹스의 집무실은 대대로 겨울국 황제가 이용하던 집무실이었다.

보석과 금을 좋아하던 겨울국 황실의 취향답게 화려한 장식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방을 둘러보다 녹스에게 시선을 틀었다.

소파 맞은편에 앉은 녹스는 미소를 지은 채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이렇게 약속을 잡고 찾아와 주시다니. 놀라운 일이군요.”

되지도 않는 농담을 하며 놈이 싱긋 웃었다.

나는 그런 녹스를 빤히 쳐다보며 침묵했다.

그러나 녹스는 개의치 않고 제 말을 이어 갔다.

“어제 레이디 안젤리카를 다시 데려와 주신 덕분에 약혼 발표를 잘 마쳤습니다.”

녹스는 지금 겨울국 황제를 대리하며 황제처럼 살고 있지만, 그에게는 정통성이 없었다.

하지만 겨울국 황제의 손녀인 안젤리카와 아이를 낳으면 그 자식을 황태자, 차기 황제로 삼는 데는 문제가 없게 될 거다.

자연스럽게 그 아이의 아버지인 녹스 또한 제국민들에게 황제로 받아들여지고.

지지자는 물론 그를 은근히 거부하던 보수적인 제국민조차도 그를 인정하게 될 거다.

그러면 프레센치아가 안정적으로 황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언뜻 평탄하게 흐르는 계략이지만, 이해할 수 없는 지점이 있었다.

어제 연회장에서 봄국 황제는 안젤리카를 보고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는 분명 겨울국 황제의 사생아를 찾아 죽이려고 했었다.

불의 이능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녹스에게 안젤리카와 그녀의 동생 베로니카에게 이능이 부족하다는 걸 전해 들어서 마음을 놓은 걸까?

글쎄.

봄국 황제가 녹스의 말을 그렇게 믿을 수 있다고?

이능이 없는 척 속이는 걸 수도 있잖아.

게다가 이미 녹스는 한 번 봄국 황제를 속였다. 그를 도와 겨울국 황족 사생아를 찾아 죽인다고 해 놓고, 그 사생아의 딸들을 숨겼으니까.

그런데도 봄국 황제는 안젤리카를 보고 화를 내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

나는 의뭉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녹스를 보며 입 안쪽 살을 잘근잘근 씹었다.

대체 너희 뭘 꾸미고 있는 건데?

하지만 지금은 답을 알 수 없었다.

라리사에게 물었으나 라리사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끔 겨울국 협회장이 와서 봄국 황제를 만나긴 했지만, 봄국 황제는 녹스의 욕만 할 뿐 그에 대한 다른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라리사는 캐시 모으기에 집중하느라고 황제가 남캐를 만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씁쓸하게 고백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알아낼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이디?”

생글거리던 녹스가 당황한 듯 낯을 굳혔다.

‘망할, 진짜 이 방법뿐이냐고!’

자괴감이 들었지만 그 수치스러운 감정을 꾹 누르고 녹스의 소파로 건너가 그의 옆에 앉았다.

“협회장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저 자리에서 하셔도 되는데.”

녹스는 맞은편 자리를 쳐다보며 내게 자리로 돌아갈 것을 은근히 종용했다.

나는 놈의 시선을 무시하고 손가락을 까닥였다.

“누가 들으면 안 되는 말이라. 귀 좀 빌려주세요.”

“…….”

“지금 황성에는 3국 황족들이 모두 모였잖아요. 아시죠? 여름국 후궁 중에는 수인도 있는 거?”

녹스는 마지못해 몸을 숙였다.

나는 그에게 귓속말을 할 것처럼 몸을 붙였다.

띠링.

[‘녹스 프레센치아’가 슬롯에 추가 되었습니다.]

녹스가 슬롯에 담기는 순간 넓은 어깨를 움찔했다.

나는 놈에게 내 키워드가 적용된 꼴을 보기 전에 얼른 아이템을 사용했다.

‘담당자님! 남주 시점 엿보기 써 주세요!’

[아이템 ‘남주 시점 엿보기’를 사용합니다.]

[서치 중…….]

[남주 ‘녹스 프레센치아’에게 아이템을 적용하시겠습니까?]

‘네, 바로 사용해 주세요!’

나는 바로 긍정했다.

녹스와 봄국 황제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머리를 굴려 알아낼 자신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아이템이 많았다.

[남주 시점 엿보기의 마일스톤을 설정해 주세요.]

나는 라리사에게 들은 대로 녹스가 가장 최근에 황실을 방문한 시점을 선택했다.

[날짜 설정이 완료되었습니다.]

[‘남주 시점 엿보기’를 사용합니다.]

아이템 적용을 알리는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공간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

“와, 미친 자식.”

나는 녹스의 시점으로 황제와 녹스의 대화를 관람하자마자, ‘슬롯 제거권’을 사용해 바로 녹스를 버렸다.

숙소로 돌아와서도 분을 감출 수 없어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녹스는 안젤리카의 날개를 꺾으려고 일부러 황실 재산을 빼돌릴 계획을 짰다.

안젤리카가 더 이상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될까 봐 세운 계획이었다.

아무리 아우로라 황실의 황녀라 한들, 돈이 없으면 프레센치아가에 의지할 수밖에 없을 테니.

처음에 봄국 황제는 녹스에게 분노했었다. 지원받은 돈으로 겨울국 사생아를 찾아 죽이기는커녕, 그들을 보호해 왔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녹스는 그 점을 사과하며, 그에게 재정적 보상을 제안했다.

51년간 협회에 지원한 돈을 한 번에 보상하겠다고.

녹스는 황제가 그간 보낸 지원금보다 훨씬 많은 액수를 청구하도록 요구했다. 그리고 그 돈을 갚으면, 3분의 1은 다시 제게 돌려 달라고 덧붙였다.

그렇게 둘은 마지막 겨울국 황실 아우로라의 재산을 빼돌릴 계획을 세웠다.

황제는 황제대로, 녹스는 녹스대로 배를 채우면서 말이다.

“와, 굳이 #혐관 키워드를 넣을 필요가 뭐 있어? 녹스 이 자식 타고난 인성이 혐오스러운데.”

나는 분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그동안 안젤리카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데. 가뜩이나 낮은 우리 안젤리카 자존감이 더 낮아졌단 말이야!

#혐관 키워드 탓에 녹스 놈이 돌아버린 것 같았다. 원래도 돈 놈이지만 제대로 미쳐 버렸다.

“이럴 때가 아니야.”

나는 분노를 꾹 누르고 노트북에 앞에 앉아 메시지를 켰다.

우리 뉴비를 울린 못된 흑막 새끼를 가만둘 수가 없었다.

[영애, 혹시 지금 시간 되시나요?]

1분도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

[할리나: 네, 요즘 한가하네요. 무슨 일 있나요?]

[영애……. 놀라지 마세요. 우리 뉴비 영애가 남주한테 사기를 당했어요!]

나는 빠르게 타자를 쳐서 그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조용히 내 메시지를 확인하던 할리나가 한참 후에 답장을 보냈다.

[할리나: 잠깐만요, 영애. 정리 좀 할게요.]

할리나는 차분히 내용을 정리했다.

[할리나: 남주가 뉴비 영애의 경제권을 박탈하려고, 봄국 황제랑 영애 재산을 빼돌릴 계략을 짰다는 거죠.]

[네 맞아요!]

[할리나: 친정 세력을 미리 밟아 두려고, 뉴비 영애 동생을 북부로 격리하려 했고.]

[그러니까요! 그 미친 (*비속어 사용으로 블라인드 처리되었습니다.) 심지어 베로니카는 아직 미성년자예요!]

[할리나: 또 뉴비 영애 옆에 남자 있는 꼴이 보기 싫어서, 영애를 돌봐 준 협회원들을 지하 감옥에 가뒀다는 거죠?]

[네ㅠ]

[할리나: 그리고 저 미친 짓을 하는 이유는]

잠시 채팅창이 멈췄다. 마치 분노를 잠시 짓누르는 것처럼.

[할리나: 뉴비 영애를 새장에 가두듯이 제 손에 쥐고 싶어서고요.]

[네!! 어떻게 저런 미친놈이 다 있죠?ㅠㅠㅠㅠㅠ]

나는 고개를 마구 끄덕이며 얼른 그렇다고 답했다.

또 메시지 창이 멈췄다.

몇 번 새로 고침을 했으나 새로 수신되는 메시지가 없다.

한참 후에 할리나가 메시지를 보냈다.

[할리나: 이 사건 제가 맡겠습니다.]

사계국 최고의 변호사가 케이스를 받아들였다.

그녀는 바로 메시지를 쏟아 냈다.

[할리나: 우선 라리사 영애한테도 메시지를 보낼게요. 봄국 황실에서 원본 서류를 구해 줄 사람이 필요하니까.]

[할리나: 아, 거기 수인 영애도 있죠? 분명 녹스 협회장한테 봄국 황실에 입금한 거래 내역이나 만남 일정을 정리한 스케줄 표가 있을 거예요. 그것 좀 찾아봐 달라고 연락할게요.]

그녀는 바로 업무에 착수했다. 나는 결연하게 타자를 쳤다.

[저도 도울래요! 지금 바로 단톡방 팔게요!]

녹스가 착각한 게 하나 있다.

안젤리카의 날개를 꺾으려면, 안젤리카의 재산과 그녀의 측근에게만 집중해서는 안 됐다.

안젤리카는 의 마지막 뉴비.

극성 뉴비맘들을 건드린 업보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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