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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0 영애-185화 (186/208)

185화.

나는 바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혈색이 좋았다. 심지어 뺨에 은은한 홍조가 올라와 있다.

“꼭 주무시는 것 같네요.”

나는 주변에 마왕이 쓴 메시지나 마법진이 있나 살펴봤지만, 버프는 아무것도 감지하지 못했다.

분명 알렉스가 치료하지 못하는 걸 보면 뭔가 있는 거 같은데 왜 버프는 아무것도 찾지 못하는 걸까?

그때, 어이없게도 AI가 내게 답을 주었다.

[겨울국은 동화 로맨스 판타지 세계관. 동화 속 금기를 해제해야 버프가 발현됩니다.]

동화 속 금기?

[겨울국 황녀 ‘리베라 베르니세 아우로라’는 키워드 해제 후 버프 발현이 가능합니다.]

눈이 흐려졌다.

뭔지는 모르지만, 겨울국 황녀 영애에게 이상한 버프가 내장된 듯했다.

그런데 키워드를 해제해야 한다는 말을 들으니 안젤리카가 떠올랐다.

안젤리카도 #힘숨찐 키워드를 해제해야 불의 이능을 사용할 수 있다고 했는데?

겨울국 황녀도 키워드를 해제하는 서사가 발현되어야 일어나게 되는 건가?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리베라 영애는 대체 어떤 키워드를 가지셨길래……?

그나저나 이상하네. 동화 속 공주님들은 원래 금기를 갖고 태어나나?

생각해 보니 공주님들은 늘 제약에 시달렸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리베라 영애를 쳐다봤다.

리베라 영애는 51년 전 단 하나의 게시글만 남기고 동면한 터라 나는 그녀의 원작을 추론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머리를 굴려 보자.

‘음, 동화 로판 세계라고 했으니까…….’

나는 침대에 죽은 것처럼 누워 있는 리베라를 보며 생각했다.

잠자는 황녀가 나오는 동화면 백설 공주?

아, 잠자는 숲속의 공주도 있네?

잠든 공주님들을 떠올리니 금세 그녀의 각색된 원작 내용이 추측됐다.

그리고 그녀가 눈을 뜨게 되는 사건도.

왕자님의 키스.

생각의 흐름에 놀란 나는 눈을 부릅떴다.

설마 왕자님이랑 키스를 하면 눈을 뜨고 키워드가 해제되는 건가?!

근데 어떤 키워드길래 키스로 서사가 풀리지?

나는 황녀를 보던 무거운 시선을 옆으로 틀었다.

그러자 차분한 얼굴로 리베라 영애를 내려다보고 있는 알렉스가 보였다.

“…….”

나는 말없이 알렉스를 쳐다봤다.

시선을 느꼈는지 그는 리베라 영애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왜?”

그러나 나는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이 말을 해도 될지 확신이 없어서 한참을 망설였다.

아니야. 그래도 해 봐야지.

51년 동안 잠들어 계셨는데 고작 내 자존심 때문에 이 기회를 날릴 수는 없잖아.

적은 가능성이라도 그녀가 일어날 수 있다면 시도해 봐야 하지 않을까?

나는 결국 입을 달싹이다 조심스럽게 알렉스를 불렀다.

“전하.”

알렉스가 대답하는 대신 시선을 틀어 나를 쳐다봤다. 나는 빤히 그 시선을 응시하다 물었다.

“……혹시 뭐 느끼는 거 없으세요?”

뭐라는 거냐고 묻듯 알렉스가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아니요. 뭐, 그, 별건 아니고, 음, 그 왕자로서 책임감이랄까. 뭐, 그런 거요.”

알렉스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무슨 개소리를 하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들어 보겠다는 표정이었다.

고민하던 나는 결국 그에게 내 생각을 털어놓았다.

“왜 동화책에서 보면 왕자님이 키스를 해야 잠든 공주님이 일어나시잖아요. 그러니까 혹시 리베라 황녀님도 이웃 나라 왕자인 전하의 키스를 받으시면…….”

“데이지.”

“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의 도덕성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런 발상은 위험해. 잠든 사람의 몸에 허락도 없이 손을 대는 건 예의가 아니지.”

“……그, 그렇죠.”

맞는 말이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허락도 없이 입맞춤을 하다니. 그건 요즘 시대에 맞지 않는 일이지.

그럼 대체 어떻게 해야 황녀 영애가 일어난다는 거야?

나는 미간을 구기고 리베라의 침대 근처를 뒤적였다. 그런데 머릿속으로 알람이 파고들었다.

[‘리베라 베르니세 아우로라’는 남주를 선택한 여주입니다.]

황녀님이 벌써 남주를 선택하셨다고? 언제? 마지막 글 올렸을 때 다음 날에 동면한다고 했잖아?!

[유저의 선택 남주는 유저 본인만 확인 가능합니다.]

AI는 저렇게 말하며 답을 피했다.

그러면 선택된 남주가 황녀 영애의 키워드를 풀어 주러 온다는 건가?

[빙고!]

경악한 나는 입을 벌렸다.

너 이 자식 빙고 압수!

빙고는 무슨 빙고야. 이걸 알렉스한테 어떻게 설명하라고!

상태창을 노려보는데 알렉스가 문가로 시선을 틀었다.

타닥타닥.

이곳으로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알렉스는 눈을 찌푸리다 내게 물었다.

“오늘 깨울 수 있겠어?”

“……꼭 오늘 일어나셔야 하나요?”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부터 협회장이 공식적으로 황제 대리를 선언하거든. 오늘 일어나지 못하면 겨울국 황실의 새로운 대가 시작될 거야.”

그는 수심이 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알렉스가 왜 저런 표정을 짓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도 협회에서 황실 대리를 하고 있잖아요.”

“상황이 달라지지. 협회장이 겨울국 사생아와 혼인을 하면 황실 재산에 손을 댈 수 있게 되니까.”

녹스가 겨울국 황실 재산에 손을 댈 수 있는 게 왜?

알렉스가 황녀의 유산을 걱정해 줄 만한 따뜻한 인성의 소유자가 아닌지라,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니 물을 수밖에.

“그게 왜요?”

“겨울국 협회는 지난 50년간 3국에서 지원받은 돈으로 협회를 유지했어.”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동안 돈 때문에라도 어쩔 수 없이 3국의 눈치를 봤지만, 이젠 더 이상 눈치 볼 필요가 없게 되는 거지.”

그제야 나는 알렉스의 표정을 이해했다.

돈.

지금까지 황실은 지원금을 미끼로 협회를 길들여 온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걱정을 이해했다.

“협회원들한테 원한 좀 사셨나 봐요. 특히 협회장한테.”

이제 돈으로 당근을 흔들 수 없게 되니 제 말을 듣지 않을까 봐 걱정하나 보다.

녹스와 협회원들은 최강대국의 유서 깊은 귀족이었으나, 지난 50년간은 그저 남의 나라에 얹혀 지내는 망국의 귀족이었다.

그러니 결국 3국의 눈치를 봤을 거다.

영지 수입이 없어도 돈은 필요하니까. 그런데 이제 황실 재산에 손을 댈 수 있게 됐으니 더 이상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진 거다.

알렉스는 내 말을 듣고도 부정하지 않았다.

나는 알렉스를 위로할 겸 그의 마음을 가볍게 해 줄 진실을 말했다.

“근데 전하. 리베라 황녀님이 일어난다고 해도 딱히 전하를 마음에 들어 한다는 보장은 없어요.”

알렉스가 기분 나쁠 때 짓는 눈웃음을 보여 줬지만,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욕하는 게 아니고요. 그냥 흘러가는 대로 두시라는 뜻이에요. 오히려 리베라 황녀님보다 녹스 협회장이 전하와 말이 잘 통할 수도 있잖아요.”

알렉스는 웃음을 흘리다 한숨을 쉬듯 말했다.

“그대에게도 방법이 없는 모양이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황녀님은 결국 일어나실 거예요. 겨울국이 해빙된 게 알려지고, 많은 사람이 드나들다 보면 그…… 좋은 기운을 받고 일어나실 거예요.”

겨울국에 사람이 많이 들어오면 황녀 영애의 남주가 돌아올 확률이 높으니 한 말이었다.

그러나 이 말을 할 수 없으니 나는 용한 역술인처럼 확신을 담아 증명할 수 없는 말을 했다.

알렉스는 한숨을 쉬며 제 목덜미를 쓸었다.

“어쩔 수 없지. 그대의 말대로 이게 신의 뜻이라면 따라야 할 테니.”

알렉스는 굉장히 찜찜한 눈으로 황녀를 바라봤다.

“안타깝군. 빨리 일어나야 영토를 지킬 텐데.”

영토?

“영토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세요?”

“몰랐어? 봄국에서 지원금 환수를 요청했는데.”

알렉스는 나를 뒤 세계의 정보 왕이라 여기는지 내가 그 사실을 모른다는 것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원금 환수요?”

“50년간 협회에 가장 많은 자금을 지원한 게 봄국이야. 지금 그 봄국이 지원금 상환을 요청했고.”

“설마 빌려준 돈을 영토로 대신 반환해 달라는 거예요?”

알렉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그런 건 아니지만, 녹스 협회장이 그 돈을 한 번에 갚기는 어려울 테니 아마 영토를 돌려주는 쪽으로 협상을 하겠지. 애초에 남부는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의 영토였잖아.”

나는 알렉스의 말을 듣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협회장님이 허락할 리 없어요.”

걔 세계 정복 야심 있는 놈이란 말이야.

절대 양도하지 않을걸?

알렉스는 고개를 저었다.

“협회장은 이미 일시 상환에 동의했어. 영토를 주든, 황실 금고를 열어 돈을 주든 어쨌든 갚을 거야.”

“네?”

“더 이상 돈으로 3국 눈치는 보기 싫다는 거겠지. 이해는 해. 이제 겨울국 황실 금고와 인장에 손댈 명분도 얻었으니 혼자 그 결정을 내리는 게 불가능한 것도 아니고.”

“……안젤리카 황녀님을 이용해서 황실 재산을 쓰겠다는 거예요?”

엄밀히 말하면 아우로라 황실의 재산과 인장은 안젤리카와 베로니카의 것이다.

그런데 부부로서 안젤리카의 재산을 멋대로 쓰겠다는 뜻이었다.

와, 이거 역대급 쓰레기 남주 아니야?

그동안 나는 청혼을 받으면서 남주와 남주 아버지에게 땅과 재물을 주겠다는 얘기를 들어 와서 그런지 녹스 놈의 짓을 이해할 수 없었다.

청혼하면서 여주의 재산을 뺏는 남주를 남주라고 해도 되는 걸까?

이건 커뮤니티에 올리면 자작 의심받을 만한 역대급 사건이다.

분노에 사로잡혀 있는데 차분한 알렉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이용인가? 서로에게 좋은 일이잖아.”

“안젤리카 황녀님이 이용당하는 건데 어떻게 좋은 일이에요!”

“적어도 목숨은 건질 테니까.”

알렉스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일단 돌아가지.”

그는 녹스의 약점은 다른 거로 알아봐야겠다며 중얼거렸다.

나는 그처럼 여유롭게 플랜 B를 생각할 수 없었다.

핏기가 가시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안젤리카와 함께 녹스에게 파혼당하기 위한 서사를 준비했다. 그 첫 번째 서사는 오늘 모두가 보는 앞에서 녹스에게 과한 결혼 선물을 요구하는 거였다.

성 한 채와 1억 골드 정도.

나는 그 생각을 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오늘 봄국 황제가 빚 상환을 요청한다고 하셨죠?”

“협회장과는 이미 말을 끝냈으니 아마 지금쯤 만찬에 참석한 사람들에게도 얘기했겠지.”

나는 아찔한 기분을 느꼈다.

안젤리카가 먼저 파혼을 위해 사치품 리스트를 읊었다면,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도 있었다.

황족의 잘못으로 조국이 멸망한 지 51년.

협회원들은 어쨌든 그동안 모멸감을 참으며 열심히 겨울국을 지켜 왔다. 그리고 협회 운영을 위해 3국 눈치를 보며 지원금을 받아 왔다.

녹스는 빚 상환을 요청하는 봄국 황제에게 빡쳐서 바로 갚겠다고 말할 정도로 자존심을 많이 다쳤고.

그런데 황녀가 협회장에게 과도한 선물을 요구했다면…….

그 상황에 봄국 황제가 빚 상환을 요구했다면…….

안젤리카는 자칫 잘못하면 연회에 모인 겨울국 사람들에게 욕을 먹을 수도 있었다.

타국의 무리한 요구로 국고가 휘청이는 상황인데, 사치품을 요구한 어린 황족이라면…….

아, 안 돼!

#혐관 남주와 그 남주의 추종자들이 여린 안젤리카에게 무슨 막말을 했을지 알 수 없었다.

안젤리카는 소심해서 욕먹으면 멘탈 나갈 텐데.

“전하, 빨리 돌아가요!”

마침 다가오던 발소리가 더 커졌다. 순찰하는 경비병 같았다.

알렉스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바로 그의 손을 맞잡고 탑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최대한 빠르게 만찬장으로 돌아갔다.

***

나는 가쁜 숨을 참으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러나 뛰어온 보람은 없었다.

이미 녹스의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나는 눈치를 보며 내 옆에 앉아 있던 귀족에게 물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었나요?”

상석을 눈짓하며 묻자 우아한 귀부인이 내게 몸을 기울였다.

그녀는 입이 근질근질했는지 방금 일어난 일을 알려 주었다.

“방금 상석에 계시던 황녀님이 도망쳤어요.”

소란이 있었는지 상석이 조금 시끄러웠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안젤리카가 갑자기 뛰쳐나간 걸 보니 보통 일은 아닌 것 같다며 그녀는 호기심을 드러냈다.

나는 다급하게 안젤리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영애 어디예요?’

‘괜찮아요?’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홀을 빠져나온 나는 복도에 있던 시종에게 물었다.

“혹시 안젤리카 황녀님 보셨어요?”

“아, 속이 안 좋으시다고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감사해요.”

나는 바로 연회장 건물을 나왔다. 그리고 정원 너머 수십 개의 성을 눈에 담는 순간, 온몸에 힘이 빠졌다.

이렇게 넓은데 어떻게 찾아.

나는 다시 안젤리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안젤리카, 제가 그쪽으로 갈게요. 어디 있는지 알려 줘요. 네?’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예요. 괜찮아요?’

그런데 그 순간 반짝거리는 빛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반딧불이처럼 작은 불빛을 응시했다.

거대한 성의 5층 복도에서 새어 나온 불빛이었다. 유리창 한가운데서 반짝거리는 빛은 내가 메시지를 보낼 때마다 점멸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 건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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