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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0 영애-184화 (185/208)

184화.

해빙 후 겨울국 황성에 온 건 처음이었다.

일전에 녹스가 겨울국 황성으로 와서 안젤리카의 교육을 이어 가 달라고 부탁했었지만, 무시했다.

그래서 아침에 녹스를 찾아갔을 때 좀 민망했다.

녹스는 이제 교육은 필요 없다고 선을 그었지만, 나를 반갑게 맞이하는 안젤리카 때문에 돌아가라고 말하지는 못했다.

어쨌든 녹스는 지금 안젤리카에게 진심이었다.

슬롯에 담긴 #혐관 남주란.

아무리 못된 짓을 해도 제 여주가 좋아하는 것을 막을 용기는 없는 것이다.

이 맛에 혐관 보는 거지.

나는 짧은 회상을 마치고 연회홀 상석에 앉은 녹스와 안젤리카를 바라봤다. 내 자리에서 두 사람은 손톱만큼 작게 보였다.

겨울국이 해빙되던 날 안젤리카가 겨울국 황제의 후손이라는 게 밝혀졌다.

비록 지금 녹스가 새로운 황제 대행을 하는 바람에 정치 사정이 복잡해지긴 했지만, 어쨌든 이 상황 속에서 안젤리카는 황후로 거론되고 있다.

황녀이든 차기 황후이든 고귀한 신분인 건 매한가지. 안젤리카와 나는 신분 격차가 컸다.

작위 인플레이션이 심한 세계.

이렇게 귀족 모임을 열면 남작 영애는 거의 평민 취급을 받았다. 내 자리는 입구 근처 구석 자리였다.

그래도 괜찮았다.

이미 마왕 동면지를 탐색할 때, 사기캐들과 함께 지냈던 터라 이정도 신분 차이는 익숙했다.

나는 낯선 귀족들 틈에 앉아 계속 안젤리카를 흘깃거렸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도와주려고 긴장하고 있는데 내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졌다.

고개를 정면으로 돌리자 내 앞에 앉은 귀족들의 표정이 경직된 게 보였다.

뭐야. 왜 저래?

위로 시선을 든 나는 그림자의 주인을 마주하는 순간 얼빠진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 테이블에 있어서는 안 되는 남자가 자연스럽게 내 옆에 앉았기 때문이다.

연회 담당자로 보이는 시종이 다가와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황태자 전하, 전하의 자리는 상석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알아.”

“저…… 여긴 베르크가의 아이작 자작의 자리입니다. 부디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알렉스는 말없이 시종을 보다 눈웃음을 지었다.

“내 자리로 가서 앉으라고 해.”

알렉스의 말에 시종이 당황했다.

“거, 거긴 폐하의 옆자리입니다!”

알렉스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폐하에게 냄새라도 나나?”

“예? 예?! 무슨 그런 말씀을……!”

“그런데 왜 폐하의 옆에 앉는 게 큰일인 것처럼 말하지?”

알렉스가 담담하게 말하자 시종이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그는 알렉스가 보통 미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는지, 더 이상 토 달지 않고 물러났다. 시종이 사라지자 알렉스는 바로 내게 고개를 돌렸다.

“서운한데? 내 편지에는 답장도 안 하더니 여기서 보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이상한 말로 자리를 뺏은 건 둘째 치고, 알렉스를 보니 자연스럽게 몸이 굳어 버린 탓이다.

나는 그동안 알렉스를 피해 왔다. 남주 선택을 하고 나니 괜히 알렉스에게 미안했기 때문이다.

나를 좋아하는 마음에 답해 줄 수 없다는 것도 아주 불편했다.

침묵이 길어지자 알렉스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그러나 알렉스는 금세 어두운 표정을 미소로 덮었다.

그는 눈치가 빨랐다. 그리고 그만큼 표정 관리를 하는 데 능숙했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내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겨울국 황녀를 본 적이 있나?”

겨울국 황녀.

꼬인 역사 때문에 지금 살아 있는 겨울국 황녀는 3명이었다.

안젤리카와 베로니카.

그리고 잠들어 있는 리베라.

안젤리카의 외대고모이자 처음 타임라인을 시작한 유저였다.

아직 황실 복권이 공식화된 게 아니다 보니 세 사람의 호칭을 먼저 정리하기도 애매했다.

안젤리카와 베로니카가 비공식적으로 황녀로 불리고 있긴 하지만, 이마저도 녹스파들의 눈치를 받았다.

황제 놀이를 하는 녹스 협회장의 연회에서 안젤리카를 황녀로 부를 리 없으니, 알렉스가 말하는 황녀는 아마도 잠든 리베라 황녀 영애를 말하는 걸 거다.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내게 고개를 숙인 알렉스가 귓속말을 했다.

“연회에 오기 전에 몰래 황녀의 방에 갔었는데, 정말 일어나지 않더군.”

나는 알렉스를 잘 알았다. 그래서 그 의뭉스러운 말을 한 번에 이해했다.

“이능을 쓰셨어요?”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베라가 알렉스의 치유를 받고도 일어나지 못했다는 건 좀 심각한 문제였다.

몸에는 이상이 없다는 뜻이잖아.

근데 왜 못 일어나시는 거지?

그 호기심에 답하듯 알렉스가 말했다.

“아무래도 마왕의 저주에 걸려 있는 듯해.”

나는 요한의 남주 시점 전개로 마왕이 그녀를 황성에 되돌려 놓는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황성으로 돌아가는 장면에서 전개가 끝났기 때문에, 방에 도착한 마왕이 무슨 짓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정말 황녀 영애한테 저주라도 건 건가?

홀로 고민하는데 알렉스가 내 정신을 잡아챘다.

“전에 그대가 엘런의 집에서 마왕의 저주를 해석했다고 했잖아.”

나는 그 말에 움찔했다.

“지금 겨울국 황성의 모든 인력이 이 약혼 파티에 집중되어 있거든. 황녀가 잠들어 있는 방에 잠입하기 딱 좋은 기회지.”

알렉스가 입매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물었다.

“무슨 일인지 확인해 줄 수 있어?”

그는 내 선택을 존중하겠다는 듯 나를 응시했다.

나는 고민하다 안젤리카를 쳐다봤다.

그녀는 미소를 머금은 채 녹스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일단 안젤리카는 플레이를 잘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 잠깐 다녀올까?

난 마족어를 구사하고 마족 정보를 검색할 수 있는 유일한 유저였다. 그리고 리베라 영애는 오랜 시간 마왕에게 동면당해 왔다.

잠시 입장을 바꿔 생각해 봤다.

내가 리베라라면 누군가 날 깨워 주길 바랐을 거다.

생각을 마친 나는 알렉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다시 내게 고개를 기울이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먼저 나가 있을 테니까 몇 분 있다가 나와. 1층 분수대에서 만나자고.”

알렉스는 그 말을 한 후에 연회장을 나갔다.

***

알렉스가 황녀의 탑에 다녀왔다는 건 사실인 것 같았다.

그는 근위병들이 지나 다니지 않는 길만 골라 금세 황녀궁으로 이동했다.

나는 홀로 높이 솟은 탑을 올려다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이거 언제 다 올라가냐…….

그러나 그건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사아아아.

바닥에서 나무줄기가 돋아나더니 빠르게 탑 위로 기어갔다.

알렉스는 그 밧줄처럼 엉킨 줄기를 잡고 내게 손을 뻗었다.

“잡아.”

나는 높은 탑 꼭대기와 알렉스를 번갈아 보다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괘, 괜찮을까요? 떨어지면 어떡해요?”

“절대 안 다쳐.”

그는 웃으며 확신했다.

그래, 다쳐도…… 치료해 주겠지.

나는 주변을 흘끔거리다 알렉스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발밑에서 단단한 줄기들이 몸을 뭉치며 발판을 만들어 주었다.

스르르륵.

나뭇가지들이 천천히 움직이며 나와 알렉스를 위로 올렸다.

나는 아래를 내려다봤다가 화들짝 놀라 시선을 들었다.

왜 고귀한 황녀님이 탑 꼭대기에서 지내시는지 알 수 없으나, 동화 속 공주님의 슬픈 설정이겠거니 생각하며 최대한 바닥을 보지 않으려 애썼다.

괜찮아. 안 떨어질 거야.

속으로 주문을 외우듯 긍정적인 마음을 새기는데 웃음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조금 내리자 웃고 있는 알렉스가 보였다.

“괜찮아. 안 떨어져.”

“네, 알긴 하는데. 그래도 좀.”

무섭잖아!

번지점프가 안전하다는 걸 알아도 막상 올라가면 무서운 건 당연한 거라고.

다시 겁을 먹으려는데, 분위기를 환기하듯 알렉스가 내 이름을 불렀다.

“데이지.”

“네?”

“내가 했던 말 기억해?”

“하신 말씀이 워낙 많아서. 뭘 기억해야 하나요?”

그걸 기억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이해했는지 알렉스가 허탈하게 웃었다.

“마왕의 토벌이 끝나면 그댈 찾아간다고 했잖아.”

“아.”

검투 대회 날 알렉스는 내게 모든 게 끝나면 청혼을 하겠다고 말했었다.

나는 입을 달싹이다 말했다.

“……죄송해요, 전하.”

나는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알아.”

“그런데 왜 자꾸 그런 말씀을 하세요?”

알렉스는 나무줄기를 손끝으로 건드리며 조용히 있었다. 무언가를 생각하듯.

한참 후에 그는 내게 시선을 맞춰 왔다. 눈을 부드럽게 휜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나는 집착하지 않아. 그대가 다른 이를 좋아한다는 것도 알고 있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그 침묵은 알렉스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끊어졌다.

“나는 한 계절이라도 좋아.”

“……계절이요?”

“그대의 한 계절만 내게 주어도 만족할게.”

알렉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내가 싫어하는 주제는 피해 오던 알렉스였다. 그런데 그가 피하지 않고 이 대화를 이어 갔다.

“일처다부제도 괜찮아. 내 선조부터가 한 사람과 평생을 함께한 분이 아닌데 그런 건 익숙하지.”

알렉스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가이아는 홀수 해를 가을국 황제에게 오롯이 주었다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욕심이 많지는 않아.”

알렉스는 웃으며 말했다.

“나는 봄이 될 수 있어.”

그의 말을 증명하듯 탑의 줄기가 순식간에 꽃을 피워 냈다.

꽃향기가 뺨을 간질였다. 줄기에서 돋아난 꽃들이 어깨에 기대 온 탓이다.

“그리고 여름이 될 수도, 가을이 될 수도 있고.”

빠르게 성장한 꽃이 떨어지고, 그 자리에 금세 열매가 맺혔다. 그러나 귓가를 파고드는 소리는 느릿했다.

“두 계절은 그대가 주고 싶은 이에게 주어도 돼.”

잘 익은 열매 사이에 시들지 않은 꽃 한 송이가 남았다. 알렉스는 그걸 꺾더니 내 머리에 꽂았다.

“한 계절은 오롯이 그댈 위해 쓰고.”

커다란 손이 천천히 멀어졌다.

“나는 그대의 남은 계절 하나만 있으면 돼.”

알렉스는 진심인 듯 미소를 건 채 말했다.

“그 한 계절을 그대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로 만들어 줄 테니, 진지하게 고려해 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금빛 눈동자가 반짝이며 대답을 기다렸다.

그 기다림은 재촉이 아니었다.

어떠한 결과가 와도 괜찮다는 의미였다. 끝내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 믿는 눈빛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대화를 끝냈다.

알렉스는 시선을 들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다 왔군.”

대답할 타이밍을 놓친 나는 머뭇거리다 알렉스가 바꿔 준 대화의 흐름을 받아들였다.

먼저 안으로 들어간 알렉스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괜찮습니다.”

나는 그 손을 잡으려다 창틀을 쥐고 홀로 탑 안으로 들어갔다. 알렉스는 그에 대해 별말 하지 않았다.

탁.

커다란 창문 덕분인지 실내에 달빛이 가득했다. 그리고 불의 이능 보유국답게 방 안 곳곳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촛불이 놓여 있었다.

하얀 달빛과 붉은 촛불은 서로 뒤섞이며 실내를 은은하게 비추었다.

방을 둘러보던 나는 방 한가운데에서 시선을 멈췄다.

침대가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누워 있는 사람은 알렉스가 굳이 말해 주지 않아도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처음 타임라인을 시작한 유저.

겨울국 황녀 리베라 영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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