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겨울국 황성의 복도.
벽에는 정교한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고, 맞은편 창에는 평화로운 설경이 담겼다.
녹스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벽화를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안젤리카는 그 미소를 이해할 수 없었다.
벽화는 사람을 미소 짓게 하는 그림이 아니었다.
몸에 불이 붙어 고통스럽게 소리를 지르는 사람, 얼음에 몸이 꿰뚫려 쓰러지는 사람. 잔인한 전쟁이 실감 나게 묘사된 그림이었다.
몇 달간 데이지에게 겨울국 역사 교육을 받았던 안젤리카는 저 전쟁을 알고 있었다.
겨울국 황제가 무리해서 마족 지대를 침략했던 전쟁.
결국 조국을 멸망으로 이끈 짧은 승전의 역사가 눈앞에 펼쳐져 있다.
녹스는 황성에 돌아온 이후로 황제처럼 행동했다.
그는 황제궁에서 지냈고, 3층 이상은 오직 자신만 드나들 수 있도록 출입을 통제했다.
지금 이 3층은 안젤리카도 처음 방문한 거였다.
그때, 녹스의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이 전쟁에 대해 아십니까, 레이디 안젤리카?”
“아, 네. 레이디 데이지에게 배웠어요. 65년 전쯤 겨울국 마지막 황제가 먼저 마족 지대를 침략했던 전쟁이라고요.”
녹스는 미소를 지었다.
“그간 레이디 데이지와 공부를 하신 보람이 있군요.”
녹스는 다시 그 벽화를 바라봤다.
“모순되게도 멸망 직전의 시기가 우리 겨울국의 전성기였죠.”
그는 웃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차가웠다.
“저는 이 시기의 겨울국 위상을 되찾고 싶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평화로운 동화 속 풍경을 담은 유리창과 잔혹한 전쟁을 그린 벽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발끝으로 시선을 내렸다.
‘대체 여기 컨셉이 뭔지 모르겠어.’
녹스를 따라 겨울국으로 온 지 한 달.
녹스는 겨울국 황실 대리인으로서 겨울국 재건에 힘쓰고 있었다.
오랫동안 협회를 이끌어 온 경력 덕분인지 녹스는 안정적으로 겨울국의 행정을 꾸려 나갔다.
이제 겨울국은 제법 국가의 모습을 갖추었다.
그러다 보니 제국민들은 녹스를 좋아했다. 귀족뿐만 아니라 평민들까지 그랬다.
오죽하면 겨울국 황녀는 일어날 필요가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런 반응을 볼 때마다 안젤리카는 긴장했다.
‘나도 겨울국 황족인데.’
캐릭터를 부정당하는 기분.
겨울국이 해빙되었으나 그녀는 제 자리를 찾지 못했다.
자리만 찾지 못하면 다행이지 그녀는 극도의 불안함을 느꼈다.
주기적으로 그녀에게 불의 이능을 써 볼 것을 권하던 녹스가 2주 전부터는 그녀에게 이능 이야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마 포기한 건가?’
안젤리카는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불안함에 손끝의 핏기가 가신 탓이다.
불의 이능이 없다는 걸 알면 녹스는 그녀를 제거할지도 모른다.
이제 그는 프레센치아 가문의 영지와 금고를 되찾은 탓에 재력도 빵빵했다.
여론도 제 편이고 3국의 후원 없이도 일을 처리할 재정력까지 갖추었으니, 불의 이능이 없는 황족은 그에게 필요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짐이었다.
겨울국 협회는 묘하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겨울국 황실의 복권을 지지하는 황실파와 녹스를 새로운 황제로 올리자고 주장하는 녹스파였다.
처음 안젤리카와 베로니카 자매를 찾을 때만 해도 모두가 겨울국 황실 복권을 지지했다.
그들은 겨울국이 다시 불의 이능 보유국이 되는 미래를 꿈꾸었으나, 안젤리카와 베로니카를 보며 현실감을 찾아갔다.
그리고 결국 받아들였다.
황족의 불의 이능은 더 이상 위대하지 않다는 걸.
베로니카 황녀 정도의 이능이라면 차라리 녹스가 황제가 되는 게 나았다.
베로니카의 능력을 사용하면 촛불을 많이 만들어 등불 값을 아낄 수는 있겠지만, 그건 굳이 국정운영을 하지 않아도 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일을 싫어했고, 황제가 되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국정에 무지한 순수한 소녀는 쓸모가 없었다.
그래서 협회원의 절반은 겨울국 황실 복권 대신 녹스를 새로운 황제로 옹립하고 싶어 했다.
물론, 절반이다.
나머지 절반은 여전히 겨울국 황실 복권을 주장했다.
그들은 안젤리카와 베로니카의 이능은 미약하지만, 후에 그들의 자손이 거대한 힘을 타고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미래에 운 좋게 거대한 이능을 가진 아이가 태어날 수도 있으니.
‘이 소용돌이 속에 떨어진 건 나하고 베로니카뿐이야.’
잠든 겨울국 황녀 영애는 뭐가 잘못된 건지 해빙 후에도 깨어나지 못했다.
그러니 이 문제는 그녀가 해결해야 했다.
긴장한 안젤리카는 손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안젤리카가 녹스의 편이고 녹스를 배신할 일이 없다고 해도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녹스가 그녀를 미래의 위협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게 중요했다.
버프만 있었어도 죽을 걱정은 안 했을 텐데.
키워드 제한 미워. 힘을 왜 내 의로 숨기는 게 아니라 강제로 숨겨야 하냐고.
안젤리카는 눈물을 삼키며 다시 시선을 들어 녹스를 바라봤다.
그녀는 어젯밤 생존을 위한 결정을 했다.
녹스를 선택하자.
선택 남주는 유저를 죽이지 않았다.
다른 유저들에게 도움을 청해 볼까도 생각했지만, 안젤리카는 제 힘으로 이 위기를 극복해 보기로 결심했다.
‘내 이야기니까 스스로 해결할 수 있어.’
그녀는 다부진 표정으로 녹스의 거대한 등판을 응시했다.
돌고 돌아 취향 남주를 다시 선택하기로 마음먹은 안젤리카는 마른침을 삼키고 한 걸음 녹스에게 다가갔다.
“저 협회장님…….”
“네?”
안젤리카는 언젠가 아리나가 알려 주었던 조언을 떠올리며 손수건을 쥔 손을 들었다.
“어깨에 뭐가 묻으셨어요. 제가 닦아 드릴게요.”
녹스는 제 어깨를 내려다봤다. 그러나 그의 셔츠는 깨끗했다. 그는 고개를 좀 더 뒤로 틀어 자세히 살폈다.
“깨끗한 것 같은데요?”
“셔츠가 하얀색이라 눈에 잘 안 띄나 봐요. 하얀 새똥이 묻었어요.”
안젤리카는 모른 척하며 녹스의 팔로 손수건을 가져다 댔다.
녹스는 안젤리카가 제게 적극적으로 말을 거는 모습을 처음 보는지라 의심하지 않고 몸을 숙였다.
그러나 원체 키가 크고 몸집이 커서 그런지 여기서 그를 안아 봤자 옷깃이 스칠 것 같지 않았다.
“조금만 더 몸을 숙여 주세요.”
녹스가 말없이 몸을 더 낮추었다. 안젤리카는 까치발을 들고 그의 어깨를 당겼다.
안젤리카는 어깨 뒤쪽에 묻은 무언가를 닦는 척하며 슬쩍 목을 기울였다.
띠링.
옷깃이 스치기 무섭게 알람이 울리며 바로 상태창이 떠올랐다.
[‘녹스 프레센치아’가 슬롯에 추가됩니다.]
“다, 다 됐어요!”
워낙 민망했던 터라 안젤리카는 녹스가 슬롯에 담기자마자 몸을 떼어 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녹스가 몸을 숙인 채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협회장님……?”
안젤리카는 저도 모르게 다시 녹스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녹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순간 그녀는 흠칫했다.
싱그럽다고 생각했던 녹안이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레이디 안젤리카.”
“네, 네?”
“제가 급한 일이 있다는 걸 잠시 잊었습니다. 실례지만 이만 가 봐도 될까요?”
“아, 네네. 그럼요!”
안젤리카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녹스는 싸늘한 표정으로 짧게 묵례하고는 뒤돌아 복도를 벗어났다.
홀로 남은 안젤리카는 묘한 기분에 괜히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이상한데.’
녹스가 위험한 사람인 건 알지만, 그는 그녀에게 다정하게 굴었다. 가식이라고 해도 늘 웃어 주고 편의를 신경 써 줬다.
저렇게 차가운 표정을 보여 준 건 처음이었다.
의아해하는 안젤리카에게 AI가 말을 걸어왔다.
[남주를 슬롯에 추가하면, 유저의 키워드가 남주에게 자동 적용됩니다.]
안젤리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슬롯에 추가하면 자신의 선호 키워드가 남주에게 적용된다는 말을 듣기는 했다. 그런데 이렇게 바로 적용되는 줄은 몰랐다.
안젤리카는 침착하려 애쓰며 적용된 키워드가 무엇인지 물었다.
[현재 ‘녹스 프레센치아’에게 적용된 키워드는 #혐관입니다.]
“뭐? 혀, 혐관?!”
안젤리카는 기겁했다.
좋아하는 키워드긴 하지만, 혐관의 전개가 어떤지 잘 알기에 두려웠다.
녹스랑 혐관이면…….
위험한 이야기를 즐기는 그녀조차도 겁을 먹게 만드는 전개가 머릿속에 펼쳐졌다.
‘취, 취소해 주세요!’
그러자 AI가 키워드 변경을 권했다.
[변경 가능한 키워드는 #시한부와 #강압적관계입니다.]
저게 무슨 말이야.
안젤리카는 흐린 눈으로 상태창을 응시했다.
그녀는 천천히 시선을 틀어 창밖의 동화 같은 세상을 눈에 담았다.
#시한부.
#강압적관계.
포근한 배경과 어울리지 않는 전개 키워드에 흠칫했다. 게다가 녹스와 붙여 보니 그 어느 것도 #혐관보다 나아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안젤리카가 #혐관을 받아들이려는 순간 다시 한번 상태창이 떠올랐다.
[남주를 실수로 슬롯에 담으셨나요?]
솔직히 실수는 아니었다.
녹스를 추가한 건 의도적인 선택이었다.
그러나 AI는 그녀의 생각을 읽었을 텐데도 가뿐히 무시하며 멘트를 이어 갔다.
[마음에 들지 않는 남주를 ‘슬롯’에서 제거할 기회!]
[아이템 ‘슬롯 제거권’을 사전 예약해 보세요!]
[사전 예약 구매 시 10% 할인된 금액인 3천 6백 캐시로 구매할 수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광고를 끼워 넣은 상태창이 눈앞에서 요란하게 반짝거렸다.
***
창가에서 흘러온 바람에 고개를 트니, 역시나 요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다렸습니까?]”
창가에 걸터앉은 요한이 웃으며 물었다.
“네.”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창으로 걸어갔다.
“저 당분간 겨울국에서 지내게 됐거든요. 그걸 알려 주고 싶어서 기다렸어요.”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요한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나는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아 창틀에 걸터앉았다.
요한의 몸은 정원을 향하고 내 몸은 방을 향하긴 하지만, 같은 선 위에 있어서 그런지 시선이 바로 얽혔다.
“겨울국 협회장이 제 친구를 괴롭히고 있거든요.”
또 그 생각을 하니 절로 한숨이 나온다.
어제 안젤리카가 갑자기 메시지를 보냈다.
녹스가 그녀의 동생인 베로니카를 북부로 격리하려 한다면서, 어찌할 줄 몰라 했다.
한동안 메시지가 없길래 잘 지내는 줄 알았는데 그녀의 전개는 극한의 난이도를 자랑했다.
일명 정쟁 서사.
겨울국 협회는 녹스를 지지하는 ‘녹스파’와 겨울국 황실 복권을 주장하는 ‘황실파’로 나뉘었다고 한다.
분파를 신경 쓰지 않던 녹스가 안젤리카의 슬롯에 들어가더니 갑자기 황실파 협회원들을 지하 감옥에 넣고, 베로니카는 멀리 떨어진 그의 영지로 유배를 보내기로 했단다.
이 모든 것을 무마할 조건은 결혼.
안젤리카가 자신과 결혼을 하면 황실파가 주장하는 미래도 해결되고, 자신도 안정적으로 황제가 될 수 있다며 그녀를 꾀었다.
이미 여론은 녹스를 지지하는지라 안젤리카는 방법이 없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나 했더니 녹스에게 #혐관 키워드가 적용됐다고 한다.
그래. 혐관 맛있지. 맛있긴 한데…….
그거 내가 겪으면 지옥이잖아.
실제로 안젤리카는 겨울 황성에 고립된 채 피폐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으쓱했다.
“어쨌든 도와주러 가야 할 것 같아요.”
묵묵히 내 말을 듣던 요한이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뭔데요?”
“[데이지가 해결할 수 있는 일입니까?]”
나는 두 눈을 깜빡였다.
“왜 그런 의심을 하세요?”
요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인간의 정치 싸움은 위험하다고 들었는데, 걱정돼서요.]”
나는 실소하며 고개를 저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저는 정쟁을 도우러 가는 게 아니니까.”
안젤리카는 녹스와 결혼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제 동생을 건드리니 싫어진 모양이었다. 그녀는 은근히 도덕 선에 엄격했다.
하긴 가족을 건드린 건 선 넘었지.
“[그러면 뭘 하러 가시는 겁니까?]”
“제가 책을 좀 많이 읽었잖아요.”
독서는 인생에 도움이 된다.
버프 없이도 나는 인성 나간 원작 남주와 파혼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내가 기억하는 파혼 에피소드만 열 개가 넘는걸?
나는 자신감 넘치는 웃음을 흘리며 요한을 쳐다봤다.
“책에는 방법이 다 있더라고요.”
요한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늘 그랬듯 이해하려 노력했다.
“[그러면 겨울국으로 찾아가면 됩니까?]”
그리고 남의 일은 상관없다는 듯, 제게 중요한 부분부터 확인했다.
“며칠 있을 거 같긴 한데, 안 와도 될 거 같아요. 거긴 사람들이 많거든요.”
겨울국 황성에는 언제 마왕이 돌아올지 모르니 토벌대 단원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게다가 약혼 발표에 초대받은 3국 황족들까지 방문했다.
“금방 돌아올 거니까 여기서 만나요.”
“[며칠이나 걸릴 것 같습니까.]”
“한 일주일 정도?”
“[……그렇게 오래요?]”
요한은 불만을 숨기지 않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요한도 좋지만, 영애들도 내게는 중요한 사람이었다.
힘든 얘기를 잘 꺼내지 않는 안젤리카가 내게 도움을 청할 정도면 그녀가 얼마나 고민해 왔을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요한을 달래듯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일주일 뒤에 봐요.”
요한은 물끄러미 나를 응시하다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