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이럴 거면 사계국으로 오는 게 낫지 않아요?”
나는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가 그 순간 타이밍 좋게 올라온 요한과 시선이 마주쳤다.
요한은 머리를 쓸며 어색하게 웃었다.
“[저도 빨리 오고 싶은데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요.]”
사계국으로 바로 돌아올 줄 알았는데, 요한은 할 일이 있다며 마족 지대에 머물렀다.
마왕이 돌아온 탓에 그를 감시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수호성들에 대한 요한의 불신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깊었다. 무작정 사계국으로 건너가려 하는 마왕을 그들은 막을 수 없다며, 요한은 자리를 오래 비우지 못했다.
그래서 이틀에 한 번씩 밤늦게 찾아와 지금처럼 잠시 안부를 묻다 돌아갔다.
피곤하지 않나?
나는 창틀에 팔을 기대며 물었다.
“근데 마왕은 왜 사계국에 오려는 거예요?”
그는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어머니와 다시 만나시려는 것 같습니다.]”
요한의 눈동자가 어두워졌다.
“[그분에게 그런 삶을 두 번이나 경험하게 해 드릴 수는 없어요.]”
그의 과거를 함께 겪은 탓일까.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요한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 것 같았다.
홀로 마족성에서 지낸 인간 여자라니. 마족들이 그녀와 요한을 버리고 마왕만 챙겨서 도망친 걸 보면, 그동안 어떤 대접을 받았을지 뻔했다.
나는 요한을 이해했다.
오히려 마왕, 그 이기적인 자식을 이해하지 못했다.
자기 아내한테 그 고생을 시켜 놓고 또 그 삶을 반복하게 만들려는 거야?
역시 마왕이라 인성이 그 모양인 건가.
쯧쯧. 사랑하면 상대의 행복을 위해 보내 줄 줄도 알아야지.
하지만 남의 아버지를 욕하는 건 예의가 아닌지라 이 생각은 속으로만 했다.
나는 불편한 주제를 넘기려 웃으며 요한에게 물었다.
“다음에는 또 언제 올 거예요?”
그러자 요한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이제 왔는데 벌써 다음을 기약해야 하는 겁니까?]”
“잠들면 또 몰래 도망갈 거잖아요. 잊기 전에 물어 두려고요.”
요한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인사 없이 떠나서 죄송합니다.]”
지난번에 왔을 때도 이렇게 창가에서 떠들었다. 졸음을 참으며 대화를 했는데, 어느새 나는 침대에 누워 있었고 눈을 떴을 땐 아침이었다.
당연히 요한은 없었다.
요한은 그날을 기억하는지 기분 좋은 미소를 걸고 있었다. 그의 손끝이 뺨에 닿았다
“[두고 떠나는 제 마음은 어땠겠습니까. 이해해 주십시오.]”
피부를 타고 번지는 차가운 감각과 상반되게도 고막으로 들어차는 목소리는 따뜻했다.
유죄 인간의 자연스러운 플러팅에 정신이 잠시 아찔해졌다. 그 바람에 늘 그랬듯 정신이 나가서 또 이상한 말을 늘어놓았다.
난해한 주접이 난무했다.
그러나 요한은 이제 익숙해졌는지 안색 하나 안 변하고 내 말을 모두 견뎌 냈다.
한참 말을 들어 주던 요한이 돌연 말을 잘랐다.
“[데이지.]”
“왜요?”
그는 시선을 틀어 장원을 바라봤다.
“[이 시간에는 사람들이 모두 자고 있겠죠?]”
“불침번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잠들었죠.”
그 말에 요한이 다시 내게 고개를 돌렸다.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뭐야. 뭐 하려고?
의문은 길어지지 못했다.
바로 답을 찾았기 때문이다.
나는 밀려온 한기에 창밖으로 시선을 틀었다.
“눈?”
달빛을 머금은 눈이 별 가루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놀라 요한을 쳐다보자 그는 입꼬리를 휘며 말했다.
“[다음에는 오래 보여 준다고 했잖아요.]”
처음 요한이 이에테르가의 저택에 온 날 그는 하늘에 얼음으로 장원을 만들고 눈을 뿌렸었다.
나중에 들키지 않을 것 같을 때 더 오래 보여 주겠다고 말했고.
잊고 있던 그 약속을 기억한 모양이다.
“아, 잊고 있었는데.”
내 칭찬이 어지간히 듣기 힘들었는지 그는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조금 괘씸했지만, 눈에 담기는 정경이 예뻐서 그냥 넘어갔다.
달빛에 반짝거리는 눈송이가 아름답다.
늘 하얀 설원과 메마른 나무 속에서만 봤지, 이렇게 생명력 넘치는 꽃과 나무 위로 소복소복 쌓이는 눈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잠시 넋을 놓고 보던 나는 시선을 내렸다. 창틀을 짚은 손 위로 차가운 감각이 번진 탓이다.
새하얀 토끼가 내 손가락을 핥고 있었다.
“토끼? 이것도 만든 거예요?”
놀라서 물으니 요한은 자그마한 토끼를 몇 마리 더 만들었다. 질문에 대답하듯.
나는 그 차갑고 보드라운 눈토끼를 손에 올렸다. 그리고 요한을 다시 쳐다봤다.
“와……. 살면서 이렇게 눈사람 잘 만드는 분은 처음 봐요.”
요한은 뿌듯한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런데 점점 그의 표정이 건조해졌다.
“[봄국에는 눈이 없는데 눈사람을 누가 만들어 줍니까?]”
질문이 아니었다.
“[겨울국 황제가 눈사람을 만들어 준 적이 있습니까?]”
전생의 그 황제를 말하는 거였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 미친놈은 아니에요.”
아니라는 말에 안심한 건지, 황제를 향한 거친 수식이 마음에 든 건지 요한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그러나 아직 의문은 남은 모양이었다.
나는 웃으며 요한의 손에도 토끼 한 마리를 올려 주고 답했다.
“설명해도 이해하기 힘들 거예요. 그냥 제가 기억하는 전생이 더 있다고 생각해 줘요.”
“[다른 전생도 기억합니까?]”
요한은 호기심이 들었는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떤 전생인데요?]”
“말해도 이해 못 할 텐데?”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단호하게 답하며 웃었다.
“[이해가 안 가도 이해하겠습니다.]”
하긴 지금 눈에 담기는 모든 것들이 말이 되지 않는데, 이해 못 할 일이 뭐가 있을까.
영원한 봄의 정원에 눈이 내리고, 눈으로 빚은 토끼가 내 손안에서 뛰놀고 있다.
나를 구해 주고, 내가 구해 주었던 다른 세계의 존재는 지금 눈앞에 앉아 내 뺨을 쓰다듬고 있고.
흐려지는 현실감 사이로 기분 좋은 기대감이 차올랐다.
나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냥 동화 듣는다고 생각하고 들어요.”
적당하게 각색된 전생이자 현생의 이야기가 봄도 겨울도 아닌 밤공기 속으로 퍼져 갔다.
CH16. 겨울 동화
버섯처럼 지붕이 둥근 집들이 설원 위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달칵.
동그란 문이 열리자 빨간 모자를 쓴 소녀가 바구니를 안고 나왔다.
허리까지 내려온 붉은 망토를 꼼꼼히 여민 소녀는 마을을 가로질러 숲으로 들어갔다.
가을국에서 살던 에밀리는 얼마 전 겨울국으로 이주했다.
근대 로판 세계에서 지내다 온 에밀리는 처음엔 걱정이 많았다. 뼛속까지 도시 사람인지라 시골에서 잘 살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기우였다.
“이야, 자연산 상황이네.”
에밀리는 기뻐하며 나무에 붙은 버섯을 살살 긁어냈다.
세계관이 정한 설정 탓에 평범한 사람들은 농산물을 재배할 수 없었다.
웬만한 나무와 꽃은 황실 소유의 이능의 부산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겨울국은 예외였다.
사방에 퍼진 자연산 식자재를 채집하며 에밀리는 콧노래를 불렀다.
에밀리는 오늘 산속 깊은 곳에 사는 할머니 영애를 만나러 가는 중이었다.
할머니 영애는 산속 과자 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이름 모를 아기들이 와서 그녀의 집을 뜯어먹었다고 했다.
애들을 돌려보내야 하는데 마물이 가득하고 추운 산에서 그런 못된 짓을 할 수는 없었다.
결국, 할머니 영애는 두 아이를 집에 들이고 키우게 되었다. #육아물 키워드 때문인지, 아니면 아이라 그런 건지 헨젤과 그레텔은 어마어마하게 귀여웠다.
밤새 메신저로 팔불출 같은 할머니 영애의 자랑을 듣던 에밀리는 참지 못하고 아침이 되자마자 산길을 올랐다.
‘나도 헨젤이랑 그레텔 보고 싶어.’
바구니에 우유와 치즈를 한가득 담아 왔지만, 에밀리는 자연산 버섯에 눈이 팔려 길을 벗어나고 말았다.
성장기에는 단백질 섭취가 중요하잖아. 애기들 먹이고 남은 건 좀 팔아야지. 이게 다 얼마냐.
다섯 개 정도만 따 가려 했으나, 으레 중독이 그러하듯 어느새 에밀리는 수를 세는 걸 잊을 정도로 정신없이 버섯을 채취하기 시작했다.
휙.
그때, 거대한 그림자가 지나갔다.
“뭐, 뭐야?”
에밀리는 단도를 움켜쥐었다.
고요한 숲속.
굵은 나무 기둥 뒤에서 회색 털 뭉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늑대였다.
은빛 늑대가 샛노란 눈을 반짝이며 에밀리에게 다가왔다.
보통 사람이라면 늑대를 마주치는 순간 겁을 먹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에밀리는 놀라기는커녕 늑대를 빤히 응시했다.
오히려 겁을 먹은 건 늑대 쪽이었다.
쭈뼛쭈뼛 눈치를 보며 다가온 늑대가 코끝으로 손잡이를 들어 바구니를 낚아챘다.
훔쳐 가는 게 아니었다.
얌전히 서서 금빛 눈망울을 빛내며 그녀를 쳐다봤다.
그래도 에밀리가 눈에 힘을 풀지 않자, 늑대는 바구니를 톡 바닥에 내려 두었다.
순간 바람이 크게 일더니 늑대의 털이 모두 사라졌다.
몇 초 안에 늑대는 사람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거대한 늑대를 마주하고도 눈 한번 깜빡이지 않던 에밀리가 경악했다.
“미쳤어요? 갑자기 모습을 바꾸면 어떡해요?!”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제 망토를 풀어 다급하게 늑대 수인의 몸을 가려 주었다.
그는 우물쭈물 눈치를 보며 붉은 망토를 제 허리에 감았다.
“사람일 때는 화를 안 내시니까요.”
회갈색 머리를 긁적이며 수인 남주가 불만스러운 얼굴을 했다.
아무리 집 늑대라고 하지만, 그래도 그는 늑대 수인.
끌로 거칠게 긁은 것처럼 온몸에 가득한 근육선이 자꾸만 눈길을 잡아끌었다.
온순한 표정과 달리 화가 잔뜩 난 몸이 주는 인지 부조화에 에밀리는 혼란스러웠다.
그 바람에 제가 화가 났다는 것도 까먹고 말았다.
그녀는 걱정이 잔뜩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위험하니까 따라오지 말고 집에 있으라고 했잖아요.”
“……숲에서 저한테 위험한 일이 생길 리 없지 않습니까.”
수인 남주는 자그마한 에밀리를 내려다보며 기가 찬다는 듯 실소했다.
그러나 에밀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포식자 계열이라고 해도 집 늑대랑 야생 늑대는 다르잖아요.”
모든 대형 견주의 마음이 그러하듯 에밀리의 눈에도 이 집채만 한 수인 남주는 연약한 강아지로 보였다.
저보다 몸집이 훨씬 크지만, 그래도 우리 강아지에게 바깥세상은 위험했다.
평소라면 수인 남주는 에밀리의 걱정을 사랑으로 받아들였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불만을 드러냈다.
“야생에서 살았건 도시에서 살았건 수인의 힘은 다르지 않습니다.”
다른 남주와 비교라니.
충분히 기분 나쁠 만했다.
“알겠어요. 내가 말실수했어요. 그러니까 이만 내려가요.”
에밀리는 수인 남주를 달래며 다시 몸을 바꾸라고 말했다. 하지만 수인 남주는 고개를 저었다.
“데려다주게 해 주세요. 이 숲은 에밀리에게 위험합니다.”
수인 남주는 짧게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는 눈을 매섭게 떴다.
“주변에 늑대들이 가득합니다.”
너도 그 늑대 중에 하나지 않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에밀리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대신 몸은 바꿔요. 지금 할머니 집에 아기들도 있어서 겁먹을지도 몰라요.”
늑대가 나신의 남성보다는 덜 무서울 거야.
늑대는 보통 아이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겠지만, 이 숲을 뚫고 마녀의 집에 간 아이들이니 늑대 정도는 두려워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 집 늑대는 귀엽잖아. 좀 큰 강아지지 뭐.
금세 모습을 바꾼 수인 남주는 빨간 망토를 입에 물어 다시 에밀리에게 씌워 주었다. 에밀리는 망토를 고쳐 입으며 미소를 지었다.
“우리 버섯 세 개만 더 따고 가요.”
수인 남주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닥에 코를 댔다.
그는 몇 걸음 앞으로 걸어가더니 땅을 파기 시작했다.
“응? 뭐 해요? 어머! 트러플이네?!”
의아해하던 에밀리는 땅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고가의 트러플 버섯을 보고는 눈을 반짝이며 단도를 움켜쥐었다.
그렇게 빨간 모자와 늑대는 블랙 다이아몬드로 불리는 트러플을 잔뜩 캐 부자가 되었고, 평온한 노후를 준비하게 되었다.
시스템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 세상의 여주들에게 남은 건 오직 해피 엔딩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