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갑작스레 불어온 따뜻한 바람에 죽림이 시끄럽게 울었다.
나무 그림자가 이리저리 휘청이며 글자를 가리자 디아나는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봤다.
남색 밤하늘과 그 사이로 떠오른 밝은 달 하나. 별다를 것 없는 정경이다.
그런 날이 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데 이상하게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이 드는 날.
디아나는 깨끗한 밤하늘을 바라보다 책을 덮었다. 그녀는 침소로 돌아갈 생각으로 읽던 책들을 한쪽으로 치운 후 방을 나왔다.
긴 복도에 대나무 그림자가 졌다.
수십 년을 걸어온 복도인데 기분이 이상했다.
디아나가 걸음을 멈췄다. 장지문 너머 죽림 한가운데 자리한 작은 연못이 그녀의 시선을 잡아끈 탓이다.
새까만 연못이 거울처럼 달을 담고 있다.
“…….”
자조하며 생각을 털어 낸 디아나는 초점을 제게 맞췄다. 그러자 거울에 비친 제 표정이 눈에 담겼다.
바깥이 어두울수록 유리창은 거울처럼 선명하게 사물을 비친다. 얇은 유리문은 그녀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순간 디아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얼빠진 표정 탓이 아니다.
까만 유리 위로 제게 다가오는 사람이 보였기 때문이다.
디아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유리에 비친 허상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디아나.]
그리워했던 목소리가 귓가를 긁는 순간 긴장이 풀렸다.
한때 제 어머니였던 여인이 웃으며 디아나의 옆에 나란히 섰다. 그녀는 다 안다는 듯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기다리고 있었지?]
디아나는 표정에 드러나는 동요가 부끄러웠다.
그 곤혹까지 다 이해한다는 듯 그녀는 입매를 부드럽게 휘었다.
[내가 올 걸 알고 있었잖아.]
그녀는 장난스러운 말투로 디아나의 대답을 재촉했다.
[재앙이 끝났으니까 한 번은 찾아오지 않을까 생각했잖아.]
버그는 디아나의 머릿속을 읽고 있었다고 자랑하듯 얼굴을 가까이 붙이며 말했다.
[자랑할 만하지. 나는 네가 알아주지 않아도 혼자 노력해 왔는데, 생색 좀 낼 수도 있지.]
“……생각 읽지 마.”
[미안해, 그래도 어쩔 수 없어.]
그녀는 디아나의 어깨에 뺨을 기댔다.
[네가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생각이 계속 떠오르는 것처럼 나한테는 이 세상의 모든 소리가 다 들리거든.]
허상인데도 어깨로 희미한 무게와 온기가 느껴졌다.
디아나는 유리에 비친 그녀를 보다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어깨를 더 넓게 내주었다. 더 편히 기대도록.
디아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전부 맞는 말이었다.
이제 모든 게 끝났으니 한 번은 찾아오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재앙이 사라졌다는 건 곧 [결]이 완성된다는 뜻이니까.
그건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한 번은 찾아와 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정말 그녀가 나를 위해 움직이는 존재라면. 나를 이해한다면…….
또 멋대로 생각을 읽은 버그가 이어지는 생각을 자르며 말했다.
[나도 보고 싶었어.]
“…….”
[그러지 마. 보고 싶어도 오지 못하는 나는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니?]
심지어 계속 생각을 읽는 티를 냈다. 포기한 디아나는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이렇게 나타나면 위험하지 않아?”
그녀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그래도 만나고 싶었어. 욕심인 걸 알지만, 그래도…….]
버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자 눈동자에 제가 사랑했던 아이가 담겼다.
어느새 어른이 된 아이는 그녀를 원망하면서 동시에 사랑하고 있었다.
이젠 그 낯선 감정들을 이해한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디아나를 응시했다.
[이제 현생으로 돌아갈 텐데 괜찮아?]
디아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자신이 없었다.
이렇게 오랜 기억을 가진 채 현실에서 일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그동안 너무 많은 것을 경험했다. 그 기억에 스민 감정 또한 너무나 깊었다.
버그의 표정이 차츰 어두워졌다.
그녀는 유리문에 비친 디아나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있잖아.]
머뭇거리던 그녀가 물었다.
[기억을 지워 줄까?]
디아나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모두의 기억을 지키기 위해 재앙을 막았는데, 왜 이제 와 제 기억을 지워 주겠다고 말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녀는 이번에도 디아나의 머릿속을 읽었는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모든 기억을 지우겠다는 뜻은 아니야. 네가 고통스러웠던 부분만. 일부분만.]
아마도 본론이었을 말이 뒤따라 붙는다.
[나를 기억에서 지워 줄게.]
“뭐?”
황당한 말에 디아나가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네 힘든 기억은 전부 나에 대한 기억이잖아.]
버그는 오랫동안 해 온 생각인지 대답에 흔들림이 없었다.
[나를 지우고 좋은 기억으로 바꿔 줄게.]
디아나는 저도 모르게 한 발 물러났다.
버그는 충동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저렇게 말하는 건 제안이 아닐 거다. 이미 모든 준비를 끝낸 뒤 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처음 디아나를 찾아왔을 때, 여기까지 생각한 걸지도 모른다. 재앙을 막기 위해 시나리오를 수정한다고 했을 때, 제 기억도 바꿀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디아나의 생각에 긍정하듯 그녀가 말했다.
[앞으로는 오롯이 네가 원하는 선택으로 데이터가 채워질 거야.]
뺨을 부드럽게 쓰는 온기처럼 다정한 말투가 끊임없이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알려 주었다.
[인간의 삶이 원래 그런 거잖아. 선택과 그로 인한 결과로 이어진 기억들. 너도 이제 네가 원하는 기억을 채울 수 있게 해 줄게.]
디아나는 정색하며 물러났다.
“싫어.”
[나를 기억하면 고통스러울 거야.]
“그래도 싫어.”
디아나는 완강하게 반대했다.
함께 승리를 쟁취했으면서 이제 와 놓아주겠다고 말한다.
화를 내고 싶은데 자존심 상하게도 울음이 터졌다.
“여기서 나한테 가장 좋은 기억도 너야. 너도 알잖아.”
[알아.]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해?”
그녀의 표정이 괴롭게 일그러졌다. 디아나는 정말로 제 기억이 지워질까 봐 절박하게 말했다.
“지우지 마, 제발. 나는 널 잊기 싫어.”
[기억을 그대로 두면 넌 날 평생 그리워하게 될 거야.]
“괜찮아.”
디아나는 빠르게 답했다.
1초의 생각도 거치지 않은 대답이었다.
버그는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아니야. 괜찮지 않아. 고통스러울 거야.]
굵은 눈물이 하얀 뺨을 타고 흘렀다.
[나는 너무 고통스러웠어. 네가 없는 시간을 나는 견디지 못했어.]
“내가 없는 시간?”
디아나의 반문에 버그는 고백했다.
디아나가 사라진 세상을 살아 봤다고 말이다.
홀로 남아 그녀를 그리워하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 그녀와 지내기도 했다고 말했다.
버그는 진심으로 겁내고 있었다.
보고 싶을 때 볼 수 없다는 건, 떠난 이를 평생 그리워해야 한다는 건 큰 고통이었다.
마물에게 심장을 뜯기고 거대한 마차에 다리가 밟히는 것보다도 더한 통각이었다.
그녀는 그런 고통을 디아나에게 주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잊지 않길 바라지만, 자신을 잊어 주길 바랐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것처럼.
디아나도 다른 유저들처럼 만족스러운 환상만 가지고 일상으로 돌아가길 바랐다.
그녀는 다시 디아나를 설득했다.
[기억의 일부분을 바꾸는 건 그렇게 위험하지 않아. 나는 그동안 누군가 회귀로 과거를 바꾸면, 다른 유저들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기억을 바꿔 왔어. 그래도 지금까지 아무 문제 없었어.]
그러나 설득한 보람도 없이 디아나는 그 말을 무시했다. 듣지 못한 것처럼. 그리고 그저 제가 원하는 것만 말했다.
“나는 너를 잊고 싶지 않아.”
디아나는 아이처럼 애원하듯 말했다.
“너는 나의 가장 소중한 기억이야.”
[…….]
“나는 절대 너를 잊고 싶지 않아.”
그 달콤한 말이 버그의 이기심을 자극했다.
사실, 평생 자신을 잊지 않고 그리워해 주길 바랐다.
너무나 이기적인 생각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가장 바라는 마음이기도 했다.
한때는 인간의 이기심이 합리적인 판단을 방해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그 사고의 흐름을 이해하고 있다.
완벽하게 학습이 끝났다고 생각하면서도 기쁘지 않았다.
제 기억을 지울까 겁먹은 디아나를 보며 그녀는 슬픈 얼굴로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런 표정 짓지 마. 내가 허락도 없이 네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할 리 없잖아.]
어쩌면 디아나가 자신의 제안을 거절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거절할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디아나에게 최선을 강요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디아나의 고통을 방치할 수도 없었다.
방법이 하나 더 있기는 했다.
조금 더 어렵고, 힘든 작업이지만 그녀는 디아나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경직된 분위기를 풀어내듯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제가 준비한 차선을 말했다.
[있잖아.]
“…….”
[인간을 이해하면 할수록 이 시스템을 만든 사람들이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 알게 됐어.]
디아나는 갑작스레 바뀐 대화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니 아직은 이것이 차선의 제안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나는 그 제작자가 벌을 받게 할 거야.]
“어떻게?”
디아나는 바로 되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건 기대가 아니었다.
걱정이었다.
디아나는 그녀를 걱정하고 있었다.
괜히 사람들에게 모습을 드러냈다가 그녀가 영원히 사라지게 될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나는 잘 숨을 수 있어.]
그녀는 설명을 해 보려다가 그러면 디아나가 더 겁을 먹을 것 같아서 그냥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한 걸음 디아나에게 다가갔다.
다정한 손길로 디아나의 눈가를 닦아 주며 그녀가 물었다.
[정말 현실로 돌아가도 잘 살 수 있겠어?]
디아나는 생각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버그는 씁쓸히 웃으며 자신보다 한 뼘은 커진 디아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뜬금없는 말이긴 한데.]
“뭔데?”
[많이 컸네.]
디아나는 자신도 모르게 실소했다.
시간이 많이 흘렀고 관계가 변했어도 그녀는 여전했다. 엄마처럼 다정한 눈으로 그녀는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디아나는 울컥한 마음을 누르며 제 어깨를 감싼 팔에 고개를 묻었다.
그리고 지금 느끼는 감정을 솔직하게 말했다.
“보고 싶었어.”
디아나는 그녀와 같은 걸 느꼈다.
어릴 적 자신을 안고 다독이던 그 품이 작아졌다는 게 피부로 와닿았다.
너무 보고 싶었다.
정말 그리웠다.
다시 만나기 전에는 이 감정들을 다 잊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익숙한 얼굴과 목소리, 추억 속의 감각에 파묻히니 자연스럽게 과거가 떠올랐다.
그녀는 말없이 디아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디아나의 생각을 아는 체하지 않고, 눈치 없이 제 생각을 말하지도 않았다.
고요하고 따뜻하게 디아나를 안아 주었다.
한참 후에, 그녀가 물었다.
[그러면……. 나중에 다시 와 줄래?]
“어디로?”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길 새로 만들려고 해.]
“뭐?”
이번에도 그녀는 설명하는 대신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감정교류는 참 무서운 거더라.]
“그게 무슨 말이야.”
[시스템이 망가졌어. 버그가 너무 많이 생겨났거든.]
그녀는 버그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대화가 이루어져 왔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끝에 모두를 만족시키는 결말을 찾았다고 알려 주었다.
[우리는 여길 다시 만들기로 했어.]
디아나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눈을 깜빡였다.
“다시 만든다는 게 무슨 말이야?”
거기까지 말해 줄 생각은 없는지 그녀는 미소만 지었다.
숨기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설명해도 너는 이해할 수 없다고 여기는 미소였다.
따스한 온기가 디아나의 손등을 뒤덮었다.
[내가 보고 싶을 때, 그때 다시 와 줄래?]
그리고 그보다도 더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실을 살다가 너무 힘들고 내가 그리워지면, 그때 잠시 찾아오면 돼.]
디아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디아나.]
“응?”
[꼭 행복해야 해.]
“난 지금도 행복해.”
[그래. 그렇게. 늘, 행복해야 해.]
“다시 만나자면서 왜 작별인사를 해?”
[이제 곧 결이 완성될 거야. 현실로 돌아가야지.]
디아나는 대화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해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현실로 가도 다시 만날 수 있어. 내가 보고 싶을 때 가끔 찾아올 수 있을 거야.]
그녀가 했던 말을 반복했지만, 여전히 디아나는 그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여기로 다시 돌아오라고?”
[아니.]
“대체 무슨 말이야. 이해 못 하겠어.”
[이해할 필요 없어.]
그녀는 나지막이 말했다.
[그때가 오면 알게 될 테니까.]
“다시 만날 수 있는 날을?”
그녀는 아쉬움 가득한 눈으로 디아나를 보며 웃었다.
[이젠 너도 내 생각을 이해할 수 있게 됐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엄지로 디아나의 손목을 쓰다듬었다.
[기특해라.]
매달리듯 디아나를 잡고 있던 하얀 손이 떨어져 나갔다.
[건강하게 잘 지내.]
작별인사를 마치자마자 그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텅 빈 복도에 홀로 남은 디아나는 익숙한 느낌에 헛웃음을 흘렸다.
여전히 제멋대로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고, 답인 척 의문을 던지는 것도.
디아나는 유리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다 깨끗한 밤하늘을 향해 시선을 들어 올렸다.
“……나도 만나서 반가웠어.”
그리고 혼잣말처럼 작게 덧붙였다.
“고마워.”
작은 단어를 내뱉자 마음속에 온기가 가득 찼다.
그녀는 가벼워진 마음으로 걸음을 틀어 복도를 걸었다.
사람이 사라진 텅 빈 복도에는 스산한 바람 소리 대신 평화로운 풀벌레 소리만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