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한때는 거대한 고목이 가득했는데, 지금 눈에 담기는 하얀 나무들은 그리 크지 않았다.
처음 왔을 때는 이 앙상한 나무도 크다고 생각했었는데.
거대한 고목들을 보고 난 후라 그런지 눈앞의 자작나무 숲이 여리게 느껴졌다.
분명 긴 시간이 흘렀다.
달라진 숲의 외형이 그 시간을 증명했다.
‘대체 이게 뭘까.’
이 세계 속 시간이 어떻게 배열되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머뭇거리던 나는 고개를 들었다.
굵은 눈송이가 떨어지는 어두운 하늘과 요한의 얼굴이 동시에 눈에 담겼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방금 보고 온 것들이 진짜인지, 버그의 장난인지 확신이 없었다.
그때의 요한이 정말 지금의 요한일까.
버그가 준비한 전생에서 긴 시간을 보냈지만, 현생으로 돌아온 건 얼마 되지 않았다.
불분명한 시간의 흐름 탓에 나는 계속 불안했다. 실체도 의도도 알 수 없는 일이 자꾸만 일어나니 혼란스러웠다.
고요한 숲에는 달빛을 머금은 한기와 사박거리는 발소리만이 가득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적막 위로 내 목소리를 얹었다.
“……65년 전에 동면에 들었다고 했잖아요.”
요한의 푸른 시선이 내게로 떨어졌다.
나는 그 시선을 마주한 채 입술을 달싹였다.
요한을 만나면 바로 답을 얻을 줄 알았는데,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나는 다시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들리겠지만, 65년 전에 요한을 본 것 같아요.”
요한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그렇다 보니 속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내가 본 과거를 조금 더 늘어놓았다.
“그때 마족성 도서관은 마족의 동면지였고, 65년 전에 요한은 그 동면지에서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의 눈동자 속에 자리한 검은 그림자가 차츰 영역을 넓혔다.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있는지라 나는 그 미세한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다.
혼란스럽게 뒤엉켜 있던 불안들이 차츰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날의 기억은 진짜인 듯하다.
나는 머릿속이 정리되어 가는 느린 속도를 따라 천천히 말을 꺼냈다.
“제가 겨울국 황제한테 붙잡혔던 요한을 도망치게 해 줬던 것 같아요.”
나는 그 사실을 증명하듯 손을 뻗어 숲을 가리켰다.
“황제를 피해서 같이 이 숲에 숨었는데 불이 났고.”
나는 확신을 느꼈다.
내가 겪은 건 모두 요한의 과거였다.
점점 목소리가 떨렸다.
“내가 마족들한테 돌아가라고 했는데, 다시 나한테 왔고.”
울기 싫은데 눈앞이 흐려진다.
“죽어 가는 나랑 같이 동면했잖아요.”
그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와 동시에 요한의 입술이 벌어졌다.
“[이해가 안 갑니다.]”
요한의 푸른 눈동자에 혼란이 가득했다.
“[인간은 전생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그는 낯설게도 동요를 그대로 드러내며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기억을 강요하면 두려워하고, 미칠 수도 있다고 들었는데…….]”
나는 울컥해서 그 혼잣말 같은 질문을 잘라 냈다.
“난 미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요.]”
요한은 동의하듯 바로 답했다.
“[어떻게 멀쩡한 겁니까?]”
불안해하는 요한과 달리 나는 안정감을 느꼈다.
내게 일어난 일은 모두 진짜였다. 요한도 모든 걸 기억하고 있다.
허공에 떠 있던 발이 바닥에 착지한 기분이었다. 벅차오른 안도감에 나는 상체를 세워 요한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창피하게도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 숨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농담으로 이 감정을 외면하려 했다.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어요? 왜 이렇게 착해졌어.”
요한은 농담에 당황하며 작은 목소리로 변명했다.
“[그때는 제가 어려서…….]”
다행히 웃음이 터졌다.
“어른이 됐다고 해도 마족들이 딱히 예의를 가르쳐 주지는 않았을 거 같은데요.”
요한은 민망한지 말을 이었다.
“[그동안 데이지가 남긴 것들을 읽으며 사계국을 배웠습니다. 예의도 같이…….]”
그 말에 나는 참지 못하고 손으로 입을 가리고 울컥 솟은 울음을 참았다.
그러나 벅찬 감상은 입술 밖으로 샜다.
“……기특해.”
가슴을 가득 채운 감동이 감탄으로 터져 나왔다.
“[예?]”
요한이 몸을 물렸다. 당황했는지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그러나 울컥한 마음은 잦아들지 않았다.
아니, 정말로 너무 기특하지 않아?
부모님을 잃고, 일족에게 버림받고. 그런데도 잠에서 깨자마자 홀로 세상을 공부했다는 거잖아.
세상이 정해 준 최강자인데도 힘에 의지하지 않고 예의까지 열심히 갈고 닦았잖아.
어른들 말씀 틀린 거 하나 없다. 될 사람은 떡잎부터 다르다.
혼자 감동해서 울고 있는데 갑자기 요한이 눈을 가늘게 뜨며 이마를 붙였다.
“[또 이상한 생각 하고 있죠?]”
참은 보람도 없이 왈칵 울음이 터졌다.
“흐윽, 이것 봐……. 모르는 게 없잖아.”
감격한 내가 훌쩍이자 요한이 웃음을 흘렸다.
자세만 자유로웠다면 기특하다고 등을 토닥여 주고 싶었다. 그런데 요한은 내 감동을 잘라 내며 어려운 질문을 던졌다.
“[대체 어떻게 기억을 되찾으신 겁니까?]”
나는 솔직하게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말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요한이 충격을 받는 것도 두렵지만, 버그가 시간을 뒤집고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걸 보고 나니 선뜻 입이 열리지 않았다.
혹시라도 무언가 문제가 생기면 요한이나 내게 다시 손을 댈까 봐.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구태여 위험한 시도를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입을 달싹이다 상황을 조금 각색해서 비슷하게 설명했다.
“밤에 자려고 하는데 거울에 마물이 나타났어요.”
“[마물이요?]”
“음……. 마물 같았어요.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데, 거울 속에서는 그 사람의 모습이 비쳤거든요.”
워낙 마물이 많은 세상이다 보니 요한은 이해한 듯 침묵했다.
“그 마물이 과거를 보여 주겠다고 제안했어요. 저는 호기심 때문에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요.”
요한은 갑자기 인상을 쓰며 물었다.
“[대가는 뭐였습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대가를 요구하지는 않았어요. 그저 선택하라고 했어요. 과거를 볼지, 말지.”
요한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으나,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다음 말을 기다려 주었다.
“저는 과거로 돌아가는 걸 선택했고, 눈을 뜨니 겨울국 황제와 함께 요한의 동면 수정 앞에 서 있었어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요한이 깨어났고요.”
나는 계속해서 내가 겪은 것들을 말했다.
요한도 기억하는 것들인지 굳어져 있던 그의 얼굴이 풀어졌다.
심지어 내가 말을 할 때 몇 번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그래서 확인하고 싶어서 일어나자마자 온 거예요.”
“[잘하셨습니다.]”
또 고개를 끄덕이던 요한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미간을 찌푸렸다.
“[……홀로 성에 다녀오셨다는 말입니까?]”
“맞아요. 중간에 마족들을 만났는데, 창을 던지길래 다시 스크롤을 찢고 숲으로 왔다가, 요한의 발자국을 발견해서 숲 밖으로 뛰어나갔어요.”
나는 속사포처럼 내가 겪은 일들을 늘어놓았다.
“스크롤도 이제 딱 한 장 남아서 정말 아슬아슬했는데 다행히 요한이…….”
“[대체 위험하게 왜.]”
요한이 화를 내려다 입을 다물었다.
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현실 감각이 없어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다시 생각해도 위험한 행동이었다.
이래서 정신 건강이 중요한 건가. 나는 내 손으로 나를 위험에 빠뜨렸단 걸 깨닫고 팔을 감싸 안았다. 내 목숨은 가장 소중한데.
“그러니까요.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네요.”
요한은 고요한 눈으로 나를 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성에서 창을 던진 이의 얼굴을 기억하십니까?]”
기억한다. 각진 턱에 수염이 가득했던 푸르딩딩한 안면을. 누군가는 남자답다고 좋아할 얼굴일지도 모르지만, 내 취향은 아니었다.
내게 위협을 가해서 싫은 걸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 마족이 싫다고 해서, 그의 인상착의를 말할 수는 없었다.
바보도 아니고.
요한이 그 마족에게 무슨 짓을 할지 알 것 같아서 가만히 있었다.
요한이 성에서 종족들과 싸우다가 곤란해지는 건 원치 않았다.
그리고 적당히 때려 주는 거면 양심을 무시하고 이르겠지만, 나는 요한이 아주 쉽게 그 마족을 불태울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는지라 더 말할 수 없었다.
괜히 요한이 그 무리에서 욕을 먹는 게 싫었다.
나는 눈동자를 들어 하늘을 보다 한쪽 눈을 찌푸렸다.
“글쎄요. 기억이 안 나네요.”
요한이 거짓말하지 말라는 듯 물끄러미 바라보기에 나는 내가 가장 잘하는 거로 요한의 압박을 밀어냈다.
“윽, 너무 눈부신 얼굴을 봐서 그전에 봤던 얼굴들을 다 까먹었어요.”
두 손으로 눈을 가리며 주접을 떨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시 손을 내리자 요한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의 농도가 익숙했다. 내가 자주 삼키는 한숨과 비슷하다.
저건 자괴감을 느낄 때 흘리는 숨이다.
“자괴감 느껴요?”
솔직하게 묻자 갑자기 몸이 훅 위로 올라갔다.
당겨진 상체가 맞닿고 목덜미로 따스한 숨이 느껴졌다.
그는 내 어깨에 깊이 고개를 묻으며 중얼거렸다.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내가 이런 말 하는 거 싫어요?”
“[아니요.]”
“좋아요?”
요한은 허탈하게 웃으며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칭찬을 들어 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요한은 내가 하는 말에 내성이 없었다.
사계국에서 살았다면, 이 정도 찬양은 익숙해서 그냥 흘려들었을 텐데.
마족만 가득한 곳에서 홀로 지내다 보니 따뜻한 말에 굶주린 모양이었다.
나는 내 주접이 타인에게 부담을 주는 특이한 화술이라는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고, 내 어깨에 고개를 묻은 요한을 동정했다.
작은 아이의 모습을 보고 온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요한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턱 끝까지 차오른 연민을 꾹 누르며 요한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그러자 요한이 움찔했다.
나는 그를 달래듯 천천히 말했다.
“앞으로 1년 365일 겹치지 않는 표현으로 열심히 찬양해 줄게요. 평생 익숙해지지 않게 해 줄 테니까 그런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아요.”
나는 자존감 수업을 준비하는 심리 상담사처럼 계속 요한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눈 쌓이는 소리처럼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마지막 남은 불안마저 사르르 녹아 버렸다. 입가에 미소가 어리는 게 느껴졌다.
이제 같이 사계국으로 돌아가도 될까?
재앙도 끝났으니까.
나는 앞날을 고민하며 시선을 높게 들었다.
평화가 완성된 세상으로 새하얀 눈송이가 평온히 내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