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거짓말하지 마. 널 죽이려고 했잖아. 마물 밥으로 주려 했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겁주려고 그러신 거지 죽일 생각은 아니셨어. 가서 죄송하다고 하면 용서해 주실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믿지 못하겠지만 생각보다 관대한 분이셔.”
나는 나도 못 믿을 소리를 하며 요한의 손에 스크롤을 다시 쥐여 주었다. 그리고 반대쪽 손을 끌어와 작은 스크롤 위에 올리고 말했다.
“그런데 너랑 같이 가면 용서받을 수가 없어. 인간도 마족을 싫어하거든.”
“[…….]”
“여긴 너무 춥고 나는 인간 속에서 살아야 해. 이건 내가 다시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야.”
마주한 푸른 눈동자가 어두워졌다.
“지금 계속 돌아오면 용서해 주신다고 말하고 있어. 나 빨리 내려가야 해.”
요한은 상처받은 눈으로 나를 한동안 말없이 쳐다봤다.
“부탁할게. 나 돌아갈 수 있게 도와주라.”
요한은 시선을 내리더니 스크롤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찌익.
인사도 없이 요한이 사라졌다.
감정 표현에 인색한 건 어릴 때나 어른이 되어서나 똑같구나 싶었다.
요한은 내게 배신감을 느낀 것 같았다.
나는 요한이 사라진 허공을 보다 망토를 여몄다. 그리고 최대한 동굴 안쪽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열기에 타죽는 게 아니라 질식사하고 싶었다.
저 정도로 넓은 숲이 타면 연기에 먼저 죽겠지. 불에 타는 고통은 느끼지 않아도 될 거다.
“으으, 진짜 이게 최선이냐고.”
그래도 무서웠다.
이 게임은 정말 끔찍하게 현실감이 넘쳐서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게 했다.
어둑한 동굴에 불규칙한 내 숨소리가 크게 울렸다.
전생과 현생.
이제 버그의 뜻을 알 것 같다.
다시 현생으로 돌아가려면 전생의 몸은 죽어야 한다. 버그 자식은 이 결말을 알면서 날 보낸 거다.
“흐윽, 죽여 버릴 거야.”
차애는 무슨 얼어 죽을 차애야. 누가 차애를 불태워 죽여.
요한이 사라지자마자 나는 불안함과 두려움에 잠식됐다. 어른인 척한답시고 부리던 허세가 사라진 탓이었다.
타닥.
바깥에서 이상한 소리가 한 번 들리더니 기사 놈들이 뭐라고 떠들었다.
그리고 엄청난 열기가 덮쳐 왔다.
한 그루 한 그루 옮겨붙은 불이 번지는 게 아니라, 숲 전체가 한 번에 불타올랐다.
그 폭발적인 열기에 얼음 막이 녹기 시작했다.
“으윽.”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무너진 입구로 새까만 연기가 해일처럼 덮쳐 왔다.
“콜록.”
망토로 입을 막았지만, 이미 연기가 동굴 안을 가득 메워 소용없는 짓이었다.
“콜록콜록.”
오히려 기침할 때마다 매연이 폐부 깊이 박혀 끔찍하게 아팠다.
슬퍼서가 아니라 눈과 폐가 매워서 눈물이 났다.
그런데 고통이 차츰 옅어졌다.
분명 열기는 그대로인데.
나는 곧 그 이유를 깨달았다.
정신을 잃고 있구나.
나는 호흡을 가로막는 연기에 질식하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아무런 소리도 냄새도 느껴지지 않았다. 깊은 연못에 빠진 것처럼 몸이 무겁게 가라앉는 기분만 느껴질 뿐.
그런데 그때 갑자기 몸이 수면 위로 끌려갔다.
갑작스레 올라간 고개가 맥을 못 추고 뒤로 꺾였다.
뺨 위로 나뭇잎처럼 작은 무언가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무거운 눈꺼풀이 호기심에 차츰 올라갔다. 가느다란 시야로 얼음벽 너머 살랑이는 하얀 연기가 보였다.
“동굴 안도 확인해.”
“굴 하나하나에 불을 내셨는데 괜찮지 않을까요?”
“그럼 네가 그렇게 폐하께 말씀드리든가.”
“……확인하겠습니다.”
바깥에서 대화 소리가 들리고, 돌벽을 헤집는지 굴이 진동하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여긴 찾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요한은 지금 막 내게 돌아온 게 아닌 것 같다.
굴 하나하나에 불을 질렀다고 하는데, 나는 불타지 않았다.
황제의 불을 누를 수 있는 존재는 요한뿐이었다.
몇 번 점멸하던 시야가 선명해졌다. 그러자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젖은 얼굴로 요한이 입을 달싹이며 뭐라 말하고 있었다.
온 신경을 기울여 그 소리에 집중했다.
주변 소음 속으로 날카로운 속삭임이 파고들었다.
“[……왜 거짓말했어.]”
물기 가득한 목소리로 요한이 중얼거렸다.
“[너도 내가 약하다고 생각해?]”
어렴풋이 들리는 말에 미간이 좁아졌다.
왜 그사이에 자존감이 반 토막이 돼서 돌아왔어.
마족 자식들이 애를 쫓아낸 건가.
나는 무거운 팔을 들어 내 뺨을 쓰다듬는 손을 잡았다.
“너 안 약해.”
갈라진 목소리가 새 나왔다. 쇠붙이가 마찰하는 것처럼 소름 돋는 소리였다.
목을 가다듬고 싶은데, 입안이 바짝 메말라 침조차 넘어가지 않았다.
기도가 타 버린 것 같다.
그래도 힘을 쥐어짜 목소리를 냈다. 나를 걱정해 주는 게 기특하고 고마워서 뭐라도 말하고 싶었다.
솔직히 너무 무서웠는데.
그런데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힘이 빠진 나는 감긴 눈을 그대로 두고 늘어졌다. 그러나 몸이 꺾이지 않았다. 조그만 손의 악력이 어찌나 센지 나는 요한의 손에 잡혀 떨어지지 않았다.
“[나가자.]”
그러나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요한은 아이였다. 기껏해야 나를 제 품에 끌어안는 정도지, 나를 업거나 안아 들지는 못했다.
심지어 안는 것도 버거워 보였다. 요한이 손을 미끄러뜨릴 때마다 몸이 크게 들썩였다.
말릴 힘도 없어 숨소리만 겨우 흘렸다. 그래도 그 작은 소리에 요한이 바로 움직임을 멈추고 제 귀를 내 입에 들이댔다.
“나 지금…… 말하는 것도…… 너무 힘들어.”
요한은 내 숨이 끊어지고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침묵을 듣다 나는 물었다.
“왜 돌아왔어? 마족들이 쫓아내…….”
한 문장을 완성하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요한은 참을성 있게 귀를 대고 기다려 주었다.
삼켜진 말을 이해했는지 요한이 훌쩍이며 대답했다.
“[필요 없어, 그딴 놈들은.]”
마족 놈들 줄타기 더럽게 못 하네. 나중에 요한 밑으로 꿇어앉을 놈들이.
요한도 요한의 어머니도 잘못이 없는데, 전부 미친 겨울국 황제 놈의 잘못인데 왜 애한테 연좌제를 묻냐.
전쟁으로 예민해진 건가.
과거의 요한도 이렇게 마족에게 배척받았던 걸까?
나는 손을 들었다. 그런데 감각이 없어 올라가는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그때, 흐린 시야로 요한이 내 손을 움켜쥐는 게 보였다.
소리가 나오지 않아 몇 번을 중얼거렸다.
“…….”
“[뭐라고?]”
“동면…….”
다시 동면에 드는 건 어때?
그 말을 하고 싶은데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10년 후면, 그러니까 성을 되찾고 마족들도 안정이 되면 요한을 받아 주지 않을까.
아이에게 따뜻하게 굴어 주지 않을까?
수호성들의 입김이 약해지면 목소리를 내주는 마족도 있지 않을까.
미래에서 요한의 수하에 있던 의원과 사용인들은 내게 친절했다. 수호성들이 아무리 날 죽이려 들었어도 말이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마족들의 자존감이 회복되고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 그때 돌아가는 게 좋을 수도 있다.
지금은 너도 마음이 많이 불안정하니까.
엄마를 잃고 나쁜 놈들에게 감금당했던 아이가 자기 일족에게 배척까지 당하면 그건 너무 힘들 것 같았다.
여긴 황제가 모든 걸 불태웠고, 직접 확인까지 했으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다.
차라리 여기가 안전할지도 몰라.
“[동면을 하라고?]”
뜻을 어떻게 이해한 건지 요한이 되물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요한이 사색이 됐다.
“[너 정말 죽을지도 몰라.]”
잘못 알아들은 건지 저런 말을 한다. 나 말고, 너. 너 말이야. 답답해서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면 좋겠는데 오히려 작아질 뿐 생각은 제대로 전해지지 못했다.
답답해서 눈물이 났다.
요한의 손가락이 눈가에서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갑작스레 돌아온 감각이 이상하다.
발끝이 차갑고 갑갑했다. 마치 차가운 진흙에 다리가 파묻힌 것처럼 바닥에 고정된 기분이었다.
점점 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한기에 나는 눈을 떴다. 가느다란 시야로 얼음에 감싸인 다리가 보였다. 요한의 발끝 역시 서서히 얼음에 잠겨 갔다.
조금 의미가 다르게 전해졌지만, 뜻은 전해진 듯하다. 나는 이게 어디냐 생각하며 안도했다.
동면은 생각만큼 빠르지 않았다.
가슴까지 두툼한 얼음에 잠겼을 때 요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가 죽으면 어떡하지.]”
어차피 난 죽어야 한다.
그래야 돌아갈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런 사정을 모르는 요한은 겁먹은 것 같았다.
“[그러면 네가 날 기억하지 못할 텐데.]”
떨리는 소리에 다시 의식이 끌려온다.
요한은 마왕에게 인간의 시간에 대해 들었다. 그들의 동면처럼 인간은 죽음을 겪은 뒤 다시 시간을 시작한다고. 마왕은 시간대가 맞으면 몇 번이고 인간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얘기를 해 주었다.
지금 요한은 나를 다시 만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때는 너도 날 싫어할 텐데.]”
웃음이 새 나왔다.
고개가 올라오는 게 느껴진다. 검게 물든 시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품에 느껴지는 미세한 온기로 요한의 머리를 찾아 쓰다듬었다.
순순히 작은 머리가 쇄골에 기대 왔다.
“난 널…… 좋아할 거야.”
“[좋아할 리도 없잖아, 날…….]”
나는 요한의 말을 끊었다.
“어떻게…… 안 좋아하니…….”
손끝으로 부드러운 머리칼을 쓸며 말해 주었다.
“너처럼 예쁜 애를…….”
손끝으로 요한의 목덜미가 단단하게 굳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대로 요한의 뒷머리를 도닥였다.
“자자.”
내 귀가 멀어 버린 건지 혹은 요한이 입을 다문 건지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머리끝까지 얼음에 파묻힌 감각은 느껴지는데도.
연기가 자욱하던 동굴보다 얼음 안에서 숨을 쉬는 게 더 편안했다.
피로에 지친 몸을 침대에 누인 것처럼 나른해지고 의식이 멀어져 갔다.
실이 툭 끊기듯 모든 게 사라지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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