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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0 영애-177화 (178/208)

177화.

아, 너 인간적으로 너무 귀여운 거 아니니. 아니 마족적으로인가? 아무튼.

이런 귀여운 생명체를 배척하다니. 마족은 마족이다. 잔악한 놈들.

나는 깨물어 주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깜찍한 아이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생각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내가 최근에 재미있게 읽은 이야기들은 역하렘 로판, 피폐 금단 로맨스, 19금 로판.

“…….”

기대감 가득한 눈동자를 보다 슬쩍 시선을 피했다.

어릴 적 읽은 동화를 억지로 기억해 보려는데 밤하늘에 흩뿌려진 별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웃기게도 요한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거 알아? 별에도 서열이 있는 거?”

“[서열?]”

다행히 언젠가 요한이 해 줬던 얘기가 떠올랐다.

요한의 반응을 보니 아직은 그 이야기를 듣기 전인 것 같다.

자신감을 되찾은 나는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요한이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떠들었다.

“별들은 순서가 있어서 첫째, 둘째, 셋째로 나뉜대.”

“[형제 같은 거야?]”

“맞아.”

나는 웃으며 요한의 시야에 맞춰 손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그러자 요한의 시선이 내 손끝을 따라 하늘로 움직였다.

“새벽과 가까운 별이 가장 큰형이래.”

“[거짓말.]”

“진짜야. 그래서 첫 별은 동생 별들이 길을 잃을까 봐 어둠으로 가는 길을 알려 주고 밤새 동생들을 챙긴대.”

“[그럼 첫째 별은?]”

“동생들이 안전하게 어둠으로 도망치는 걸 지켜보다가 가장 먼저 빛 속으로 사라지는 거지.”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럼 첫째는 누가 챙겨 줘.]”

“길을 알려 주는 별은 없겠지만 대신 아침에게 배웅받을 수 있잖아.”

요한은 하늘을 보면서 침묵했다.

“[아침은 가족이 아니잖아.]”

왜인지 요한의 어깨가 축 처졌다.

감수성이 풍부하네. 별 이야기에 감정 이입을 하고.

그 모습이 귀여워서 웃음을 참았다.

목을 가다듬은 나는 다시 요한에게 말했다.

“왜. 아침도 가족이 될 수 있지. 다른 세계의 존재도 가족이 될 수 있잖아.”

“[다른데 어떻게 가족이 돼.]”

“사실 그렇게 다르지도 않아. 태양도 별이니까.”

“[…….]”

“첫째 별은 오히려 새로운 친구가 생겨서 더 행복할 수도 있어.”

요한은 혼자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요한은 뭔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나 뭐?”

대답을 재촉하는데, 요한이 고개를 저었다. 몇 번 더 하려던 말을 물었지만, 요한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 이후로 침묵이 시작됐다. 이런 #아포칼립스 환경에서는 절대 잠들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동이 틀 때쯤 무겁던 눈꺼풀이 감겼다.

***

“으, 추워.”

추위 때문에 잠에서 깼다. 나는 내게 덮여 있는 모포를 더 위로 끌다 눈을 떴다.

요한에게 걸쳐 주었던 모포였다.

얘 어디 갔어?

깜짝 놀라 주변을 살폈지만, 요한은 보이지 않았다.

“요한.”

주변에 마물이 있을지도 모르니 크게 소리치지 못하고 작은 목소리로 요한을 불렀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러자 덜컥 겁이 났다.

내가 뭘 잘못했나?

어제 했던 말들을 곱씹어 봤으나 내가 실수한 게 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울적하게 모포를 덮다가 나무 아래를 내려다봤다.

시야가 높았다.

어떡하지.

마물이 득실거리는 저 아래로 내려갈 자신도, 여기서 버틸 자신도 없었다.

그런데 그때 바닥에서 거센 바람이 밀려왔다. 그 방향에서 얼음 계단이 올라왔다.

차분한 표정으로 계단을 올라온 요한이 나를 보고는 눈을 찌푸렸다.

“[왜 울어?]”

나는 내가 울고 있는 줄도 몰랐다. 당황해서 손으로 눈가를 닦자 요한은 내 앞으로 와서 앉았다.

진짜 울었네.

나 많이 무서웠구나.

#아포칼립스는 나와 맞지 않는다는 걸 새삼 느꼈다.

“[먹어.]”

나는 눈앞에 밀어진 까만 덩어리를 보며 흠칫했다.

“이게 뭐야?”

“[고기.]”

불에 타서 형태를 알 수 없는 고깃덩이였다.

요한은 마물을 잡으러 다녀왔다고 했다. 그리고 먹기 좋게 살점을 구워 왔다고 덧붙였다. 인간은 생고기보다 익힌 걸 좋아한다고 들었다고.

묘하게 반짝거리는 눈동자를 보니 나는 차마 못 먹겠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어떤 마물인지 정체도 알 수 없고, 바짝 타 버렸지만 고맙다고 말하며 고기를 받았다.

내 몫으로 조금 떼고 큰 덩어리는 요한에게 주었다.

“너도 먹어.”

그런데 이 고기는 정말 요한의 취향인지 그는 아까보다 더 눈을 반짝이며 받았다.

얼결에 아침 식사를 하며 요한을 쳐다봤다.

전에 요한이 마물을 사냥하는 걸 본 적이 있다. 바닥에서 돋아난 고드름이 마물의 몸을 관통하면, 그 마물 사체를 말에 매달아 끌고 갔다.

이번에도 손대지 않고 마물을 잡았는지 옷이 깨끗했다. 다만 손은 아주 더러웠다.

탄 고기를 손에 들고 와서 그런 것 같았다.

나는 나뭇가지에 쌓인 눈을 뭉쳐 내 손을 닦은 뒤, 또 새로운 눈을 뭉쳐 요한의 손을 닦아 줬다.

“[뭐 하는 거야?]”

“손이 더럽잖아.”

아이는 당황한 듯 손을 움찔댔지만, 나는 새 눈을 다시 뭉쳐서 꼼꼼하게 손을 닦아 줬다.

“위생은 중요한 거야.”

“[위생?]”

“응. 모든 병의 근원은 이 손에서 시작되거든.”

나는 공익 방송 광고처럼 요한에게 손에 얼마나 많은 세균이 있는지, 손만 잘 씻어도 예방할 수 있는 병이 얼마나 많은지 알려 주었다.

미래의 제1 수호성이긴 하나 아직은 아이라 요한은 쉽게 세뇌됐다.

엄청난 정보를 들은 것처럼 요한은 축축한 제 손을 온기로 말리고는 뽀득뽀득한 촉감을 즐겼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바라보다가 다시 모포를 걸쳐 주었다.

이번에도 요한은 반항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기특하고 고맙긴 한데 조금 걱정이 됐다.

내가 정말로 작은 요한에게 짐이 되고 있어서.

이 상태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씁쓸한 생각에 표정이 어두워지는데 귓가로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들렸다.

휙.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내 눈앞에서 얼어붙었다.

“저기다!”

“쏴!”

고함이 들리더니 이번엔 사방에서 벌 떼처럼 화살이 쏟아졌다.

콰과가강.

그러나 두툼한 얼음벽에 막힌 화살은 끔찍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그대로 바짝 굳었다.

겨울국 기사들의 목소리였다.

어떻게 여기까지 따라온 거야.

어제 홍체를 불태워서 들킨 건가. 연기가 신호탄 작용을 한 것 같았다.

사아아아.

설상가상으로 단단하던 얼음벽이 녹기 시작했다. 바닥에서 화염처럼 불이 올라온 탓이다.

우리를 발견한 황제는 이제 숨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건지 이능을 썼다.

나와 달리 요한은 동요하지 않았다.

아이는 차분하게 숲 아래를 바라보다 내게 손을 내밀었다.

“[북쪽에서 오고 있어. 절벽으로 가자.]”

요한은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내 뒤쪽을 응시했다.

숲 끝에 붙어 있는 하얀 돌벽이 푸른 눈동자에 담겼다.

고개를 끄덕이자 요한이 다리를 만들어 냈다.

우리는 빠르게 다리 위에 올랐다. 다리가 녹아 사라질 때마다 앞으로 새로운 다리가 생겼다.

요한은 들키지 않으려 일부러 나무 사이로 굽은 길을 내며 도망쳤다. 효과는 있었다. 목소리가 점점 멀게 느껴졌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안 돼. 애도 겁을 안 먹는데 내가 겁먹으면 안 돼!

나는 요한의 작은 등을 보며 마음을 잡았다.

생존 본능 탓일까. 아주 멀어 보였는데 생각보다 금방 절벽에 도달했다.

절벽은 용암 때문에 생긴 것인지 무수히 많은 구멍을 가지고 있었다.

요한은 그중 2층 높이에 있는 큰 동굴 앞으로 길을 만들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더 깊숙이 도망치려는 나와 달리 요한은 입구에서 걸음을 멈췄다.

요한은 고요한 눈으로 바깥을 응시했다.

이는 바람을 느끼며 나는 요한이 입구에 시야를 왜곡하는 벽을 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미친 듯이 뛰던 심장이 안도한 듯 속도를 늦췄다.

나는 정말로 요한에게 크게 의지하고 있었다.

사아아아.

파도처럼 움직이는 바람 사이로 수분이 얼어붙는 소리가 올라탔다.

거미줄처럼 돌벽에서 생겨난 가느다란 얼음이 교차하며 막을 이루었다. 어느 부분은 매끈한 막으로 덮이고 어느 부분은 채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순간 한 부분에 햇빛이 고이더니, 실처럼 쌓인 가느다란 얼음이 모두 모습을 감추었다.

요한이 나를 보고는 입을 달싹였다.

“[돌벽이 많아서 제대로 됐을지 모르겠지만,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안 보일 거야.]”

제 이능에 자신이 없는지 아이는 나를 안심시키려 저렇게 말했다.

그 말을 듣는데 부끄러워졌다. 나이도 한참이나 많은 내가 아이에게 기대 목숨을 건지고, 다독임까지 받는 게.

나는 차올랐던 불안을 꾹 누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건조한 공기가 숨소리마저 흡수한 듯 적막이 내려앉았다.

요한도 긴장하고 있었다.

나는 입꼬리를 한 번 들어 올리고 조심스럽게 요한의 팔을 끌어당겼다.

요한은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내게 끌려왔다. 나는 바위 위에 앉은 채 요한을 끌어안고 등을 도닥여 주었다.

“괜찮을 거야.”

그 말에 단단하던 아이의 몸이 조금 풀어졌다.

“여기서 흔적이 끊겼습니다.”

“동굴로 들어간 거 같은데.”

“어느 동굴? 굴이 너무 많아!”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모르게 요한을 품으로 더 꽉 끌어안았다.

고막에 박혀 오는 고함과 코끝을 스치는 탄 냄새가 무서웠다.

타닥. 타다다닥. 탁.

밖에서는 또다시 화살 비가 쏟아졌다.

얇은 얼음 막을 건드린 화살 몇 개가 튕겨 나갔다.

그럼에도 아래에서 놀라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 보면 요한의 시야 왜곡이 먹힌 듯했다.

나는 작게 웃었다.

“얼음 막이 안 보이나 봐. 너 천재 아닐까?”

“[……몰라.]”

요한은 퉁명스럽게 답하면서도 순간 볼을 붉혔다.

왜 칭찬에 면역이 없는 걸까. 이렇게 잘났는데.

왠지 울컥했지만, 그 기분을 무시하고 다시 동굴 밖을 주시했다.

워낙 조용해서 그런지 아니면 그들이 가까이 있어서 그런지 바닥의 소리가 모두 절벽을 타고 올라왔다.

대부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소름 끼치는 한마디가 고막에 박혔다.

“찾을 필요 없다. 다 태워 버리면 그만이니.”

“예?”

“숲과 구멍을 모두 불태우면 알게 되겠지. 어디 숨어 있는지.”

“그치만…… 그러다 죽으면, 마왕에게 써먹을 미끼를 잃게 될 텐데요.”

“이미 놓친 미끼를 살려 두는 것보다는 나아.”

“불의 이능까지 타고난 놈이 정말 불에 타 죽을까요?”

“나보다 강한 이능을 타고났다면, 내 불을 끌 수 있을 거야.”

짧은 웃음이 따라붙었다.

“뭐, 만약에 이 정도 불에 죽는다면 쓸모없는 이능이니까 그런 놈을 경계한 우리가 불쌍할 뿐, 아쉬울 게 없지.”

그들이 군인이라 다행이었다.

본론만 담긴 짧은 문장이 오간 덕에 집중하니 꽤 많은 부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빙빙 돌려 말했다면 이해하기 힘들었을 텐데.

하지만 슬프게도 내가 알아들었다고 해서 해결할 방법이 있는 건 아니었다.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사계국으로 가겠다는 계획도 무너졌고, 경계에 숨을 수도 없었다.

지금처럼 계속 함께 다니면 요한은 나 때문에 겨울국 황제에게 노출될 확률이 높았다.

날 먹이겠다고 홀로 마물 사냥을 나가기도 했으니까.

그러다 겨울국 마법사들의 함정에 빠질지도 모른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나는 요한을 구해 줄 수 없었다.

요한의 뒷머리를 감싼 손에 힘이 풀렸다.

나는 요한을 밀어내고 눈을 맞췄다.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한 요한의 맑은 눈동자가 차분히 반짝였다.

“혹시 마족들이 어디 있는지 알아?”

“[아니.]”

“어디 있을지 짐작 가는 곳도 없어?”

요한은 잠시 침묵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있어.]”

처음 성에서 도망칠 때도 느꼈는데 역시나 요한은 그들이 어디 있는지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다행이었다.

“그러면 거기로 가.”

“[뭐?]”

“너는 시야 왜곡도 할 줄 알잖아. 못된 놈이 널 괴롭히려 들면 모습을 감추면 될 거야.”

“[안 돼! 걔들은 인간을 정말로 싫어해. 널 보면 죽일 거야.]”

“나는 너랑 같이 안 가.”

“[……왜?]”

나는 대답하는 대신 배낭을 풀어 요한의 등에 메 주었다.

“3일은 더 먹을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아까 보여 줬던 스크롤도 들어 있으니까 가고 싶은 곳을 생각하고 찢으면 돼.”

나는 스크롤을 한 장 새로 꺼내 요한의 손에 쥐여 줬다.

“마족들이 있는 곳을 생각하면서 찢어. 그러면 거기로 바로 이동할 거야.”

“[너도 같이 가.]”

“가면 마족들이 날 죽일 거라며.”

요한은 입을 벙긋거리기만 할 뿐 부정하지 못했다.

나도 이미 알고 있었다. 마족들이 날 보면 죽일 거라는 걸. 마족들은 미래에서도 날 발견하자마자 죽이려 했고, 요한에게 대항하면서까지 날 없애려 했다.

그때는 참 못됐다 싶었는데, 이 상황을 겪고 나니 이해가 갔다.

인간이 얼마나 끔찍하게 싫을까.

전쟁을 겪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지금은 혐오감이 더 심할 거다.

가뜩이나 요한을 혼혈이라고 배척하는데, 날 데려가면 마족 사회에서 요한을 받아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떨리는 손을 내려 소매 안으로 감추며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인간이라서 저 사람들한테 다시 돌아가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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