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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0 영애-176화 (177/208)

176화.

요한은 손을 움직여 계단을 없앴다. 그리고 식량 주머니를 내게 다시 건넸다.

“[네가 가지고 있어. 넌 가방도 있잖아.]”

“알았어. 두 개만 더 먹어.”

나는 순순히 가방에 식량 주머니를 넣으며 육포 몇 개를 더 꺼내 요한에게 건넸다. 그리고 내 것도 챙겼다.

바짝 마른고기를 씹어 배를 채우니 신기하게도 몸에 조금 열이 올랐다.

‘그나저나 얼마나 버틸 수 있으려나.’

사실 이건 예상하지 못했다.

사계국에 건너가지 못해도 경계 안에서 머무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언제까지 이 숲에서 버틸 수도 없고, 이동하긴 해야 할 텐데 어떡하지.

나는 요한에게 시선을 옮겼다.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은 하늘을 보고 있는 동그란 뒷모습이 눈에 담겼다.

마족성에는 겨울국 사람들이 있으니 돌아갈 수 없고…… 마족들이 도망친 곳을 찾아봐야 하나?

“[너야말로 춥지 않아?]”

갑자기 요한이 말을 걸었다.

대답하지 않자 천천히 고개를 돌린 요한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인간은 추위를 많이 느낀다던데.]”

“맞아. 추워.”

요한이 나뭇가지로 시선을 내리고는 고민하다 내게 다가왔다.

내 앞에서 무릎을 꿇어앉고는 비장한 얼굴로 쳐다봤다.

뭐야. 왜 이래?

그때, 요한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작고 말랑한 손이 내 뺨에 닿았다. 아이는 손난로처럼 따끈따끈한 손을 천천히 움직이며 얼굴을 녹여 주었다.

“오…… 따뜻해.”

요한은 뿌듯한지 입꼬리를 씰룩였다.

“이것도 네 이능이야?”

“[응.]”

“엄청 섬세하게 조절할 수 있구나. 대단하다.”

“[뭐, 뭘…….]”

“역시 마족 1 수호성은 다르구나.”

“[1 수호성?]”

요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난 1 수호성이 아닌데…….]”

나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미래에서 본 요한의 모습을 나도 모르게 말해 버렸다.

“책에서 보니까 그러더라고. 마족은 힘으로 서열을 정한다고. 너는 분명 1 수호성이 될 거야.”

나는 대충 수습하며 중얼거렸다.

“[내가 무슨…….]”

혼자 중얼거리길래, 이번에는 내가 인상을 썼다.

“무슨이라니. 너는 제1 수호성이 될 운명이야.”

“[난 그렇게 강하지 않아.]”

“네가 강한 게 아니면 세상에 강한 존재는 없어.”

“[왜 내가 강할 거라고 생각해?]”

“나는 직접 봤잖아. 네가 거대한 불기둥을 누르면서 섬세하게 시야까지 왜곡하는 걸. 아, 진짜 대단했지.”

나는 일부러 과장되게 감동한 표정을 하며 손뼉을 짝짝 쳤다.

“[뭐, 뭐래.]”

당황하면서도 요한은 얼굴을 붉혔다.

칭찬에 약한 타입이구나.

내가 아는 모습과 너무 달라서 신기했다. 어린애를 놀리는 기분이라 미안한 마음도 살짝 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노력은 해야 할 거야. 듣기로 제1 수호성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랬거든. 물론, 너는 할 수 있겠지만.”

“[……넌 왜 그렇게 나를 높게 봐?]”

딱히 높게 보지는 않았는데.

그냥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마음이 착잡해졌다. 마족 놈들이 얼마나 애를 무시해 왔길래 애 자존감이 이 모양인 걸까.

“너는 엄청 대단한 마족이 될 거야. 아, 물론 대단해질 필요는 없는데, 내 말은 굳이 널 낮춰 볼 필요도 없다는 거야.”

“[난 그냥 사실을 말하는 건데.]”

“나도 사실을 말하는 거야.”

요한은 뭔가 말하려 입을 열다 다물었다.

제가 얼마나 형편없는지 말하려던 건가. 눈에 띄게 풀이 죽었다.

나는 내 뺨에 올려진 작은 손을 움켜쥐고 요한에게 눈을 맞췄다.

“이거 봐봐. 너는 이렇게 나한테 맞춰서 뜨겁지 않게 온도도 조절해 주잖아.”

“[이건 별거 아니니까.]”

“어떻게 이게 별게 아니야? 아까는 그렇게 큰 불기둥을 막았잖아. 강한 존재한테 강하고 약한 존재한테 약하게 맞추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넌 그걸 해내고 있어!”

왜 갑자기 요한에게 도덕 교육을 하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요한 넌 대단해.”

“[그만해.]”

“알았어. 요한, 너는 완벽해.”

“[하지 말라고.]”

“와아, 세상에서 제일 뛰어난 마족이 될 요한은 겸손하기까지 해.”

나는 장난으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울먹이는 척을 했다.

요한이 진심으로 짜증을 내며 표정을 싹 지웠다.

그래도 뺨에 올린 손을 떼지는 않았다.

다정한 녀석. 어릴 때부터 속은 다정한 아이였구나. 역시 내 최애 남주답다.

나는 기특하게 요한을 보면서 다시 손을 꼭 쥐었다.

“[왜, 왜?]”

“손이 시려서.”

요한은 민망해하면서도 가만히 있었다.

나는 키득키득 웃다가 선을 넘어 보았다.

“안고 있으면 안 돼?”

“[뭘?]”

“널 안고 있으면 따뜻할 거 같아.”

너도 따뜻하고.

요한은 어이가 없는지 입을 벌렸다.

나는 그 틈에 슬쩍 아이의 팔을 끌어 품에 안았다. 요한이 작게 움직였다.

“[놔!]”

“등받이도 없는 데서 자면 위험해. 나한테 기대서 자.”

“[위, 위에 올라가서 자면 되잖아.]”

“너 없으면 추울 거 같아서 그래.”

버둥거리던 요한이 그 말에 움직임을 멈췄다.

어딜 봐서 얘가 마족이야. 얘는 그냥 천사라니까.

나는 울컥 차오른 덕심을 꾹 누르고 모포를 꼼꼼히 덮어 줬다.

노을이 사라진 하늘 위로 달이 떠올랐다.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에 눈 쌓인 가지가 흔들거렸다.

숲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다르게 평화로운 정경이었다.

크아아아앙.

근처에 마물이 있는지 앞에 있는 나무가 크게 움직이고 날카로운 포효가 들렸다.

나도 모르게 요한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왜 이러냐는 듯 요한이 고개를 들어 제 어깨 위에 올려진 내 손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괜찮아. 여기까지는 못 올라올 거야.”

“[겁은 네가 먹은 거 같은데.]”

“넌 겁 안 나?”

요한은 말이 없었다.

그러나 딱히 부정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 생각을 증명하듯 흔들리던 나무 근처에서 확 불길이 치솟더니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마물의 비명이 들렸다.

끄아아아아악!

몇 초 뒤 소리가 잦아들며 불길도 사라졌다.

메마른 겨울바람을 타고 탄 냄새가 밀려왔다.

“……네가 그랬어?”

“[홍체는 나무를 타고 올라올 수 있어.]”

요한은 제가 그랬다는 걸 부정하지 않았다.

아니 근데 잠깐만, 홍체?

“홍체? 어떻게 알아?”

“[숲 근처에 살고 인간을 좋아하는 마물이면 홍체야. 이쪽으로 정확하게 오는 걸 보면 네 냄새를 맡은 거야.]”

“……홍체는 인간 냄새도 맡아?”

“[응. 후각이 좋아서 아주 멀리 있어도 사냥감 냄새를 맡을 수 있대. 아버지 말로는 그래서 자주 사계국으로 넘어가서 개체 수가 줄었다고 했어.]”

홍체는 내가 예전에 겨울국 탐사를 할 때, 나를 납치했던 마물이었다.

굳이 무리의 뒤에 있던 나를 골라 납치한 이유가 냄새 때문이었나 보다.

나는 내 어깨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다 자괴감을 느꼈다. 스스로 맛있는 냄새가 나는지 점검하는 꼴이 우습다.

뇌가 얼어붙어 멍청해졌나 보다.

“[더 올지도 몰라. 무리를 짓고 사는 놈들이라.]”

“…….”

요한의 말이 맞는 거 같다.

겁은 내가 먹었다.

나는 바짝 움츠린 채 숲을 살폈다.

다행이라면 나뭇가지가 흔들리거나 이상한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는 거다.

하지만 간간이 아주 멀리서 마물의 포효가 들리긴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기절할 듯이 놀라며 흠칫했다.

요한은 착하게도 모른 척해 줬다.

앞에서는 웃음을 참고 있을지 몰라도 뒷모습은 불상처럼 고요했다.

어느덧 하늘은 완연히 어둠으로 물들었다. 짙푸른 남색 하늘에 뜬 보름달이 유독 환하게 빛난다.

계속 숲을 주시하다 하늘에 시선을 빼앗긴 나는 마음이 평온해지는 걸 느꼈다.

흩뿌려진 별을 보다 나는 유독 밝은 세 개의 하얀 점을 발견했다.

여전히 별의 위치는 그대로다.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별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혹시 요한은 언제 저 별이 일직선이 되는지 알지 않을까. 마물에 대해서도 잘 아는 걸 보면 나보다 이곳에 대해 많이 아는 것 같은데.

나는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저 별 보여?”

요한은 내 손가락을 따라 약간 고개를 기울였다.

“저 별 세 개가 일직선이 되면 마왕이 깨어난다고 하던데 들어 봤어?”

“[넌 어떻게 알아?]”

“책에서 봤어.”

“[…….]”

“언제 저게 일직선이 되는지 알아?”

침묵하던 요한이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왜?]”

“너희 아버지가 깨어나야 널 데려가실 테니까.”

“[…….]”

“무슨 생각인지는 아는데 그래도 너 아버지한테 가야 해. 겨울국 황제는 정말 강한 사람이야. 마족들이 성을 버리고 도망간 걸 봐.”

요한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무시하는 건 아니었다.

요한은 두 손을 들더니 손가락을 접었다.

왼손은 검지와 중지만 펴고 오른손은 검지만 핀 채, 왼손을 기울여 오른손 검지에 붙였다.

그러자 왼쪽으로 꼭짓점이 튀어나온 정삼각형이 만들어졌다.

가만히 하늘에 손을 뻗어 삼각형을 댄 요한이 조용히 무언가를 계산했다.

“[세 별이 삼각형을 이루다 한 줄로 합쳐질 때까지 50년이 걸린다고 하셨어.]”

50년 단위로 별이 움직이는구나.

“[5분의 4 정도 움직였으니까…… 10년이나 15년 정도 더 있어야 할 거야.]”

“10년에서 15년이라고? 말도 안 돼! 다시 계산해 봐!”

15년이라니! 안 돼!

그때까지 어떻게 버텨.

몇 달도 자신 없는데!

속이 타들어 가는 나와 달리 요한은 평온했다.

“[맞아. 최소 10년에서 15년 정도 걸릴 거야.]”

안 돼. 마왕이 일어나야 마족들이 제 성을 되찾는단 말이야. 그래야 네가 다시 마왕성으로 돌아갈 수 있고.

우리는 이제 사계국으로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마물이 득실거리는 곳에 집을 짓고 살 수도 없잖아.

최소라고 해도 내가 10년 동안 요한을 어떻게 키우냐고. 숲만 벗어나면 말도 안 통하는데.

‘……오히려 애한테 짐만 되지.’

속이 답답해서 마른세수를 했다.

정말 마족들이라도 찾아서 애를 돌려보내야 하나 싶었다.

못된 놈들이긴 하다만 그래도 동족이니까 챙겨 주지 않을까.

하지만 걱정되는 게 한 가지 있었다.

요한은 미래에서 그동안 마왕을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가 마족을 찾아가면 마왕을 만나게 될 거다.

미래가 바뀌게 될 텐데, 그게 좋은 미래일지 확실하지 않았다.

곧 큰 전쟁이 일어나니까.

좋게 흘러간다면 마왕이 요한을 보고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게 내가 바라고 요한에게 주고 싶은 미래였다.

그러나 최악은…….

마왕이 일어나기도 전에 마족이 멋대로 인간이랑 전쟁을 벌여 더 위험해질지도 몰랐다.

요한이 동면에서 깨어난 걸 알면, 요한의 불의 이능을 이용하려 하지 않을까.

요한이 강하긴 하지만, 아직 아이였다.

이 정신으로 전쟁을 겪는 게 좋은지 모르겠다.

가뜩이나 감금당해서 마음이 많이 다쳤을 텐데.

설사 전쟁이 잘 맞는 성격이라고 해도 질 수도 있고.

“아아, 답이 없어.”

저절로 앓는 소리가 나온다.

“[뭐가 답이 없어?]”

“그게…….”

나도 모르게 요한에게 생각하던 걸 말해 주려다 입을 다물었다.

아직은 요한이 너무 작고 어려서.

……이 조그만 애한테 전쟁이니 뭐니 그런 얘기를 하는 것도 좀.

나는 한숨을 삼키고 미소를 지었다.

“재밌는 얘기를 해 주고 싶은데 생각나는 게 없어서.”

“[재밌는 얘기를 지금 왜 해?]”

“너랑 얘기하고 싶은데 할 얘기가 없잖아.”

“[…….]”

요한은 눈을 깜빡이다 눈썹을 모았다.

“[……나랑 얘기를 하고 싶다고?]”

“응.”

“[왜?]”

“음…… 친해지고 싶으니까?”

그게 뭐라고 요한은 굉장히 놀랐다.

친구 하나 없는 아이처럼.

아, 그럴 수도 있겠다.

마족은 여성체가 없으니까 또래 아이가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맑은 눈동자에 기대감이 부풀었다.

“[그럼…… 해 봐.]”

“응?”

“[얘기 아무거나 해 보라고.]”

요한은 중얼거리며 덧붙였다.

“[재밌게 들어 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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