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순식간에 요한의 눈동자에 의심이 가득 차올랐다.
요한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까지 왜 마족어를 못하는 척했어?]”
아이는 속았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이게 음, 언어는 내 이능이라서 제한이 있어.”
이능이나 버프나 뭐.
거짓말에 양심이 조금 찔렸지만 나는 요한의 눈가가 풀어지는 걸 보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내 이능은 사계국에서만 쓸 수 있거든. 여긴 사계국 경계라 이능이 발현됐나 봐.”
“[사계국 경계?]”
본인도 이능을 쓰는 존재라 그런지 요한은 내 말을 이해한 듯싶었다. 바로 사계국 경계라는 새로운 화제에 꽂히는 걸 보면.
“응. 여기서 사계국으로 넘어갈 수 있어.”
“[어디로 넘어가는데?]”
“겨울국. 근데 다른 경계로 넘어갈 수도 있어.”
놀랄 수도 있으니 경계에 대해 미리 얘기해 줘야겠다.
겨울국에 간다고 해 놓고 갑자기 다리나 절벽으로 이동하면 내가 속였다고 의심할 테니까.
“경계는 세 곳인데, 여기 이 숲이랑 다리랑 절벽이야. 바로 경계를 넘어 겨울국으로 갈 수도 있지만, 다른 경계로 이동할 수도 있어.”
당연히 바로 이해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역시나 요한은 살포시 작은 미간을 접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이상한 소리 하지 말라는 어투였다.
좀 억울했지만, 아직 아이이고 내가 이해 못 할 소리를 한 건 사실이라 나는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눈 바닥에 그림을 그리며 다른 손으로 요한을 불렀다.
“이리 와 앉아 봐. 설명해 줄게.”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요한이 작은 한숨을 내쉬며 마지못해 내 옆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나는 요한에게 보여 주듯 눈 위로 동그라미 세 개를 그렸다.
“마족 지대와 사계국을 잇는 경계는 이렇게 세 곳이야. 여긴 우리가 있는 숲, 이건 다리, 이건 절벽.”
나는 손가락으로 그 세 경계 사이에 선을 그었다.
“가끔 경계를 넘지 못하고 갇힐 때가 있어. 그러면 이 세 곳 사이를 반복해서 왔다 갔다 하게 돼.”
“[거짓말.]”
“정말이야. 근데 여기 갇히는 게 꼭 나쁜 건 아니야. 이 안에 있으면 저 사람들이 쫓아오지 못할 테니까 안전할 거야.”
“[싫어. 그런 데 왜 갇혀 있어.]”
요한은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안전하니까. 사계국에 가면 내가 널 지켜 줄 수 있어.”
“[대체 누가 누굴 지켜 준다는 건데.]”
살짝 바람이 섞인 목소리였다. 기가 막힌 모양이다.
틀린 말이 아니긴 하지만…….
“여기서는 네 말이 맞지만, 마물이나 겨울국 사람들한테 벗어나는 게 안전의 전부는 아니잖아.”
“[…….]”
“따뜻하고 편안한 곳에서 잠을 자고, 배부르게 먹어야지. 사람은 기본 생활이 안정되어야 제대로 살 수 있어.”
“[난 사람이 아닌데.]”
“반은 사람이잖아.”
유치해지기 싫은데 애가 고집을 부리니 나도 말꼬리를 잡게 됐다.
그런데 그 말이 뭔가 신경을 건드렸는지 요한이 미간을 움찔댔다.
나는 다시 손을 뻗었다.
“난 이미 경계에 발을 올렸어. 어차피 다른 데로 가게 될 거야. 같이 안 가면 너랑 떨어지게 될 텐데, 그러면 난 계속 널 걱정할 거야.”
“[네가 왜 내 걱정을 해?]”
“어떻게 걱정을 안 해? 널 여기 혼자 두면 뻔히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는데. 겨울국 황제가 널 잡겠다고 난리니까 넌 성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마족들은 애초에 널 버리고 도망쳤는데 그들한테 돌아가 봤자…….”
나는 말을 잇다 바로 다물었다.
마족이 요한을 버린 걸 너무 직접적으로 언급했다.
안절부절 눈치를 보는 나와 달리 정작 요한은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 아마도 음…… 안전한 곳을 찾은 다음에 다시 널 찾으러 오려고 했을 거야. 그래, 아직은 안전한 곳을 찾지 못했나 봐.”
나는 애써 수습하며 웃었지만, 요한은 가만히 땅바닥을 쳐다봤다.
아아, 이 와중에 왜 말실수야.
“미안.”
작게 중얼거리자 요한이 고개를 들었다. 또 미간을 살짝 구긴 채.
“[뭐가?]”
“아니야.”
나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괜히 또 마족이나 마왕 얘기를 꺼내는 게 오히려 자극될 것 같아서.
소심하게 발끝을 보다 다시 용기 내 시선을 들어 요한을 쳐다봤다.
“내가 못 미더운 건 이해하는데.”
“[잘 아네.]”
질풍노도의 시기라 그런가.
과거의 요한은 내가 아는 요한과 조금 달랐다.
아직 어리고 힘든 일을 많이 겪어서 그렇다고 생각하며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도 나는 널 혼자 두지 않을 거야.”
“[…….]”
“인정하기 싫겠지만 인간은 혼자 살 수 없어. 너도 누군가가 필요할 거야.”
“[난 인간이 아니라니까.]”
“반은 인간이래도.”
나는 혼잣말하듯 말을 덧붙였다.
요한은 대놓고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한참 뒤에 차갑게 얼어붙은 손 위로 작은 손이 겹쳐졌다. 따라오겠다는 뜻이었다. 나는 웃으며 요한의 팔을 잡아끌었다.
“가 보자.”
비장한 마음으로 걸음을 뗀 순간이었다.
“…….”
“[…….]”
놀랍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게 뭐냐고 요한이 눈으로 물었다.
“이상하네. 한 걸음만 다시 가 보자.”
자박.
역시나 이번에도 그대로였다.
숲의 경계 안으로 이동한 건가 싶었지만, 뒤에 남은 발자국이 그대로였다.
“왜 이러지?”
나는 부산스럽게 이리저리 움직였지만, 여전히 숲이었다.
요한은 이제 나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리고 슬며시 손을 놓았다.
“이게 원래는 되는 건데…….”
“[나 때문일 수도 있어.]”
요한은 변명하던 내 말을 잘라 냈다.
“뭐?”
“[내가 인간도 아니고 마족도 아니라 네가 말하는 경계가 거부하는 걸 수도 있어.]”
“아니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너 혼자 가. 괜찮으니까.]”
요한은 거부당하는 게 익숙한 것처럼 저렇게 말하며 내 등을 떠밀었다.
어이가 없어서 나는 입을 벙긋댔다.
그리고 허공을 노려봤다.
보고 있냐, 버그야.
네 무능함 때문에 이 어린애가 상처받았잖아.
집단에서 소외당하던 트라우마를 자극한 모양이다. 이건 모두 저 악랄한 버그 때문이었다.
미치겠네. 시스템 에러라고 말할 수도 없고.
나는 풀 죽은 요한을 보다 혼자 옆으로 한 걸음 움직였다.
“봐봐. 이건 너랑 상관없어. 나도 못 가잖아.”
요한이 한쪽 눈을 찌푸렸다.
“[넌 왜 못 가는데?]”
그러게, 나도 모르겠다.
사계국에는 지금 이 타임라인이 존재하지 않아서 그런 걸까?
아니면.
나는 붉은 하늘을 응시하며 한숨을 삼켰다.
‘여길 벗어나지 말라는 뜻인가.’
모르겠다.
이 버그 놈의 뜻이 뭔지.
대체 날 어디로 몰고 가는 건지.
“[……야.]”
그때, 건방진 목소리에 생각의 흐름이 끊겼다.
요한이 손가락으로 옆을 가리켰다. 거대한 나무 앞에 얼음 계단이 만들어져 있었다.
“[또 마물 나오면 귀찮아. 너도 못 돌아가게 된 거면 저기 올라가 있어.]”
“……너는?”
“[먹을 것 좀 찾아올 테니까 올라가 있어.]”
“먹을 거 여기 있는데?”
나는 들고 온 가방을 뒤적였다.
말린 육포와 버섯을 보여 주자 요한이 움찔했다.
“아무 준비도 없이 널 풀어 줬을 리가 없잖아.”
뿌듯한 마음으로 요한의 입에 육포를 넣어 주었다.
습관 때문에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던 요한은 갑자기 얼굴을 붉혔다.
“[내가 먹을 수 있어.]”
“응. 그래. 네가 먹어.”
나는 순순히 챙겨 온 식량 가방을 요한에게 주었다.
“[……너 바보야? 이걸 다 주면 어떡해?]”
“에이 설마 그거 좀 줬다고 네가 날 두고 도망가겠어?”
얘는 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왔길래 의심이 디폴트인지 모르겠다.
나는 계단을 오르며 중얼댔다.
“마음만 먹으면 지나가는 마물 아무거나 잡아서 통구이 만들 수 있는데, 네가 뭐가 아쉬워서 그걸 욕심내겠어.”
“[널 구워 먹을 수도 있잖아.]”
“힘 빼지 마. 난 맛없어.”
말 같지도 않은 농담을 하길래 비웃었더니 요한이 침묵했다.
3층 높이에 있는 단단한 나뭇가지에서 계단이 멈췄다.
그래도 아까 얼음 다리를 건너서 그런지 이제 이 정도는 높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나는 먼저 나무에 앉아 자리를 잡았다.
“[네가 안쪽으로 들어가.]”
요한이 나무 기둥 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됐어. 네가 저쪽에 앉아. 기대앉으면 편할 거야.”
“[그러니까 네가 앉으라고.]”
“왜 나한테 양보를 하고 그래. 나 그렇게 나이 많지도 않아.”
벌써 대접받을 나이가 아닌데. 외모로는 나이를 가늠할 수 없다 보니 요한이 나를 할머니로 생각하는 건가 싶었다.
“[원래 안쪽 자리는 여자가 앉는 거랬어.]”
나는 내가 들은 말을 이해할 수 없어서 말없이 눈을 깜빡였다.
“하.”
기가 차서 헛웃음이 다 나왔다.
“거짓말은. 마족 중에 여자 없는 거 다 알아.”
“[아니야. 우리 어머니 봤잖아.]”
요한은 억울한지 주먹까지 꽉 쥐었다.
“[아버지가 그랬어.]”
“뭐, 좋은 자리를 양보하라고?”
“[잘해 줘야 한다고…….]”
요한은 그 짧은 말이 뭐가 부끄러운지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무래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 여성체가 나인가 보다. 엄마를 제외하면.
이런 쪼그만 애가 기사도 정신을 운운하니 웃겼다.
그리고 좀 감탄했다.
역시 K-로판의 다정남은 조기 교육으로 완성되는 건가.
집안 분위기를 알 만했다.
배려가 기특해서 나는 감사하게 여기며 요한의 첫 기사도 정신을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고맙게 앉을게.”
요한은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넓은 가지 위로 올라와 앉았다.
나는 가방에서 챙겨 온 모포를 꺼내 요한의 어깨에 걸쳤다.
“[뭐 하는 거야.]”
“춥잖아.”
“[안 추워.]”
“밤 되면 추울 거야. 일단 덮고 있어.”
나는 요한의 어깨에 두른 모포를 앞으로 모은 후에, 내 망토 앞섶에 달린 핀을 빼서 달아 주었다.
달칵.
단단히 고정해 어린이용 망토를 만들었다.
또 불만을 드러내는 요한을 보며 나는 요한이 말한 논리를 가져왔다.
“우리 엄마는 어른은 아이한테 잘해 줘야 하는 거라고 그랬어.”
역시 부모를 파니까 입을 다문다.
요한과 나는 서로에게 제가 배운 집안 예절을 강요하고, 받아들였다.
말싸움이 생략되어 그런지 마음이 편안해졌다. 방금까지 있던 소란이 모두 거짓인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