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요한처럼 달리지는 못하지만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최대한 빠르게 걸었다.
하지만 내가 요한에게 도달하기도 전에 요한은 성벽에 도착했고 그대로 성벽을 넘어갔다.
“너는 왜 남주 버프 제한이 없냐고.”
성벽 너머로 얼음 다리가 새로 생겨났다. 요한이 달리는 속도보다도 빠르게 하얀 길이 만들어진다.
저게 바로 세계관 최강 남주의 버프인가. 발만 내디디면 길이 만들어지네.
무슨 구비 전승된 설화처럼 요한은 작은 몸으로 제 길을 만들며 성을 탈출했다.
“하아.”
나 같은 무능력 캐릭터가 할 수 있는 게 뭐 있나.
‘쫓아가야지.’
나는 눈물을 삼키고 성벽 밖을 향하는 다리에 발을 올랐다.
진짜 죽을 것 같았다.
다리 아래로 빽빽한 침엽수림이 마치 바늘처럼 뾰족하게 올라와 있었다.
떨어지면 최소 사망이다.
요한은 난간을 만들지 않아서 어딜 붙잡고 걸을 수도 없었다.
“전생 체험 안 한다고 할걸. 이 망할 호기심.”
나는 훌쩍이며 덜덜 떨리는 다리를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부지런히 몇 분이나 따라 걸었으나, 이제 요한의 뒷모습은 손톱만 하게 보였다.
속도를 내지 않으면 요한을 쫓을 수 없으니 억지로 움직여 속도를 내려 노력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이 길을 계속 걷다 보면 요한이 나올 테니 잃어버릴 일은 없을 거란 사실이었다.
여차하면 스크롤을 쓰면 되니까.
지금은 스크롤을 써 봤자 또 요한이 방향을 바꾸어 도망가면 무용지물이니 일단은 길을 따라 걷고 있지만, 나중에 스크롤로 한 번에 다리의 끝으로 이동할 생각이었다.
요한도 잠은 잘 테니 밤쯤에 한 장 쓰면 되겠지?
그런 마음으로 슬금슬금 걷다 보니 어느새 침엽수림을 넘어섰다.
그러나 침엽수림이 나았다 싶을 정도로 기괴한 정경이 펼쳐졌다.
바닷속 성게 떼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새하얀 설원 위에 새까만 털 뭉치가 바글바글했다.
마물 떼였다.
곰처럼 거대한 몸집에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생명체가 일제히 하늘에 생긴 다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포효까지 하면서.
“크아아아아아.”
놈들의 울부짖음을 따라 얼음 다리가 진동했다.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스크롤 찢고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드는 찰나, 뒤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멈춰!”
외침에 놀라 돌아보니 성벽 위에 선 기사들이 보였다. 그리고 황제도.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화가 난 것 같았다.
“미치겠네.”
나는 속으로 욕을 삼키며 걸음을 빨리했다. 떨어져도 죽지만, 따라오는 놈들한테 잡히면 진짜 죽는다.
나는 달달 떨리는 다리를 움직이며 계속 걸었다. 그러나 속도를 낼 수는 없었다. 나는 한 걸음 걷다 멈추고, 다시 용기 내 걸으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크아아아.
아래에서 쿵쿵 위로 뛰어오르며 마물들이 다리에 닿으려 애썼다. 처음으로 다리가 높은 곳에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까만 마물 떼 너머로 침엽수림이 다시 보였다.
저쪽으로 넘어가면 그래도 심신이 안정될 것 같다. 적어도 아래 뭐가 있는지 안 보이니까.
나는 마물의 포효를 들으며 계속 걸음을 뗐다. 발걸음에 온 신경이 몰렸다.
살갗을 할퀴는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질 정도로 전신이 땀에 젖었다.
끼익.
그때, 발이 미끄러져서 얼른 몸을 낮추었다.
미끄러지다니?
다리는 꽝꽝 얼어 있어서 미끄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고무 밑창이 잘 달라붙었다. 그런데 마치 물을 뿌려 둔 것처럼 바닥이 미끄러워졌다.
시선을 내리자 정말로 얼음 다리에 물이 맺혀 있었다.
뭐지?
그때, 뒤에서 또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어느새 성벽에 선 기사들이 내게 오지 않고 그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선 화려한 사내가 유독 눈에 띄었다.
하얀 털 코트가 펄럭이고 검은 단발이 바람에 갈라질 때마다 금귀걸이가 번쩍였다.
그는 내가 쳐다보는 것을 느꼈는지 천천히 손을 들었다.
뭐라 말하는 건지 알 수 없었으나, 나는 뒷걸음질을 쳤다.
성벽과 연결된 다리가 녹고 있었다.
쩌적.
그리고 몇 초 지나지 않아 내 뒤쪽에 큰 구멍이 생겼다.
한 번에 모든 다리를 녹일 수 있으면서 그는 천천히 다리를 녹였다.
내게 소리를 지르지 않았고, 구태여 불로 나를 태우지도 않았다.
내가 살겠다고 허둥대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처럼.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천천히 가방으로 손을 넣었다. 스크롤을 찾는 손길이 덜덜 떨렸다.
‘아, 미친 로그아웃 되나?’
하필 마물 떼의 정 가운데였다.
나는 바닥에서 울부짖는 마물을 보고 겁에 질렸다.
불의 이능은 얼음의 이능을 쉽게 압도했다.
열기가 빠르게 덮쳐 오고, 두툼한 얼음이 얇아지는 게 느껴졌다.
쩌적.
세 걸음 앞에서 얼음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다급해진 나는 가방에 고개를 파묻고 가죽 봉투를 찾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아주 고요했다.
주변을 잠식했던 열기 또한 사라졌다.
그리고 작은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자박자박.
고요 위로 얹히는 사뿐한 발걸음 소리에 요동치던 심장이 꾹 눌린 것처럼 차분해졌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앞에서 불기둥이 번쩍거렸다.
그러나 그 화마는 방파제에 가로막힌 것처럼 내 쪽으로 오지 못했다. 그저 옆으로 새 나갈 뿐이었다.
누군가 불길을 틀고 있었다.
멍하니 그걸 보고 있는데 시야 안으로 작은 손이 들어왔다. 나는 불을 보던 시선을 틀어 손의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요한이었다.
얼결에 그 작은 손을 잡자 아이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일으켜 주었다.
나는 요한을 보며 상황을 파악했다.
요한이 불의 이능을 제어하고 있었다. 두 이능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요한은 불의 이능을 누르며, 얇은 얼음 막으로 시야를 왜곡한 모양이다.
붉은 노을 탓인지 눈앞의 불기둥 때문인지 시야에 담기는 모든 것이 핏물처럼 붉었다.
그 배경 앞에 선 하얀 아이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조금 시선을 내리니 아이의 너덜너덜한 튜닉 사이로 구속구에 짓물러 붉어진 팔과 다리가 보였다.
압도적인 이능과 다르게 눈에 담기는 모습은 너무나 초라하고 앙상하다.
그 간극이 소름 끼치게 다가왔다. 그래서 나는 요한을 내려다보면서도 바짝 움츠러들었다.
차분한 얼굴로 나를 보던 요한이 눈을 내리깔았다.
무언가를 고민하듯.
잠시 시선이 엇갈렸을 뿐인데 불안함이 훅 솟았다.
날 버리고 갈지, 함께 갈지 고민하는 것 같아서.
나는 얼른 가방에서 종이를 꺼냈다. 다행히 요한은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내 부산한 움직임을 지켜봤다.
나는 미리 적어 둔 글자를 보여 줬다.
[사계국으로 가자. 나는 사계국 사람이야. 거기서 널 지켜 줄 수 있어.]
푸른 눈동자가 활자를 읽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요한이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눈동자를 미끄러뜨려 불기둥을 보다 다시 나를 쳐다봤다.
누가 누굴 지키냐고 묻는 것 같았다.
‘……맞는 말이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날 지켜 달라고 문장을 고칠 수도 없잖아.
민망함을 꾹 누르며 나는 다른 문장을 찾았다.
“아!”
그리고 자신 있게 내밀었다.
[아버지가 깨어날 때까지만 같이 있자.]
아버지라는 말에 요한이 크게 움찔했다.
[마족들이 마왕의 동면체를 가지고 떠났다고 들었어. 마왕이 깨어나면 그들에게 돌아가게 도와줄게.]
나는 스크롤 사용 방법을 적은 종이를 찾아 가방을 뒤적였다. 그런데 요한이 좀 이상했다.
무표정한 건 그대로인데 뭐랄까 딱딱하게 굳은 느낌이었다. 방금까지는 여유가 느껴졌는데, 지금은 기이하게도 두려움이 느껴졌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죽음을 탓할까 봐 겁먹은 걸까?
아, 그거 아닌데.
하지만 겨울국 황제의 짓이라고 알려 줄 수 없었다.
혹시라도 요한이 황제에게 복수하겠다고 달려들까 봐.
아이는 혼자인데, 황제는 강하고 군대까지 있었다.
마왕이 깨어난 이후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주변에 아무도 없는 지금은 모르는 게 나았다.
나는 씁쓸함을 삼키다 멀리서 들려온 소리에 움찔했다.
“저쪽입니다!”
이번엔 바닥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겨울국 기사들이 침엽수림을 헤치고 추격해 오는 모양이었다.
“미치겠네.”
빨리 설득해야 한다.
나는 생각을 치우고 얼른 종이를 넘겼다.
[이 주황색 스크롤을 찢으면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어. 나 스크롤 많아. 가 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돌아가도 돼.]
나는 가죽 봉투에서 다섯 장의 스크롤을 꺼내 요한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리고 스크롤을 더 꺼내 아이의 눈앞에서 두 장의 스크롤을 흔들었다.
[내가 두 장을 쓸 테니까 날 믿고 한 번만 가 보자. 아니면, 네가 가진 스크롤로 다시 돌아와도 돼.]
고민하는 요한에게 허리를 숙여 눈을 맞췄다.
“응?”
재촉하자 요한이 물끄러미 시선을 내려 제 손에 들린 스크롤을 보았다.
손해 볼 게 없다 여긴 건지, 아니면 그동안 나를 믿게 된 건지 요한이 손을 뻗어 내가 쥔 스크롤 끝을 잡았다.
순간 너무 기뻐서 아이를 끌어안을 뻔했다.
나는 작은 요한의 믿음에 깊은 책임감을 느끼며 기쁘게 스크롤을 찢었다.
***
천천히 눈을 뜨니 하얀 숲이 보였다. 옆에 선 요한은 놀랐는지 눈을 크게 떴다.
나도 놀랐다.
숲은 내 기억과 많이 달랐다.
처음 본 자작나무도 크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눈에 담기는 나무들은 그보다 몇 배는 더 거대했다.
우리는 숲과 설원이 맞닿는 곳에 서 있었다.
나는 요한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요한은 물끄러미 바라볼 뿐 잡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조금 뻘쭘했지만, 손을 거두고 숲 안쪽을 고갯짓했다.
알아서 잘 따라오겠지.
먼저 걸음을 내딛자 뒤에서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은 좀 거리가 필요한가 보다.
이해 못 할 반응은 아니라 나는 요한의 경계심을 존중했다.
사박사박.
건조한 눈 결정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시원하게 고막을 긁었다.
방금까지의 소란은 모두 거짓인 듯 눈에 담기는 정경이 평화로웠다. 그리고 행운은 한꺼번에 오는 것인지 귓가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네트워크 연결이 불안정합니다.]
자박.
나는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
AI와 연결이 됐다.
‘다, 담당자님. 지금 연결되는 거예요?’
[네트워크 연결이 불안정합니다.]
불안정하다고 하지만 전에도 이래 놓고 네트워크 연결이 잘만 됐었다.
그리고 내 기억이 맞다면, 이건 경계 진입의 신호였다.
나는 다급하게 고개를 뒤로 돌렸다. 입을 벌리기 무섭게 또 한 번 알람이 울렸다.
[특성 버프 ‘마족어 해석’ ON]
나는 울컥한 마음을 눌렀다.
요한은 갑자기 울먹이는 내가 이상했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요한에게 첫마디를 건넸다.
“나 이제 말할 수 있어.”
내 말을 이해했는지 요한이 크게 움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