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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0 영애-173화 (174/208)

173화.

똑똑.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나는 종이를 후후 불어 대충 잉크를 말리고 책 아래에 숨겼다.

똑똑.

또 한 번 노크 소리가 들렸다.

“데이지?”

황제가 벌써 왔어?

황제의 목소리에 놀란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얼른 허리를 숙이며 뒤로 물러섰다.

“아, 작업 중이었군.”

황제는 내 책상을 보고는 피식 웃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침대에 풀썩 앉더니 제 옆자리를 탁탁 쳤다.

‘왜 침대로 오라고 하냐…….’

굉장히 찜찜했지만, 나는 쭈뼛쭈뼛 그 옆으로 가서 앉았다.

“잘 다녀왔는지 묻지도 않는군.”

영어, 특히나 궁중 영어를 쓰는 건 내게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 최대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런데 황제가 억지로 안부 인사를 강요하는 바람에 나는 대충 물었다.

“잘 다녀오셨나요?”

“그래. 덕분에.”

다행히 황제는 크게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갔다.

요 며칠 느낀 건데, 아무래도 내가 외국인이라 다들 영어가 서툴러도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는 웃으며 제 단발머리를 찰랑 한 번 흔들었다. 검은 머리칼을 따라 금빛 장신구가 요란히 반짝였다.

황제는 손에 가죽 봉투를 들고 있었다.

내 시선이 거기 머무는 걸 알았는지 그가 호쾌하게 웃으며 내게 불쑥 가죽 봉투를 내밀었다.

“그대의 공로에 대한 선물이야.”

“스크롤인가요?”

“저런, 열기도 전에 맞히다니.”

그는 김이 빠졌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놈이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얼른 봉투를 받았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감사 인사를 건네고 바로 봉투를 열어 스크롤이 몇 장인지 확인했다.

그리고 감동했다.

역시 너도 황족이구나.

통이 크네.

나는 열댓 장의 스크롤을 보며 기쁨의 눈물을 삼켰다.

“왜 그러지?”

“너무 감사해서요.”

“그대는 그릇이 참 작아.”

황제가 뭐라 하건 귀에 안 들어왔다.

오늘이다!

마왕의 동면 시계는 도무지 좁혀지지 않았다. 어쩌면 몇 달이 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마왕이 깨어나기 전에 사계국으로 넘어가기로 계획을 바꿨다.

그동안 성을 돌아다니며 돈이 될 만한 것도 모아 뒀고, 틈틈이 책을 읽어 마족 지대 지형과 마물의 약점도 파악해 뒀다.

그리고 마법사들에게 마족 정보를 나누어 주며 접근해, 여분으로 만들어 둔 구속구 열쇠도 빼돌렸다.

준비를 모두 끝낸 상태다.

좋아, 도망치자.

결연한 마음에 심장이 크게 뛰었다.

그런데 그때 내 가슴 위로 손이 올라왔다.

놀랄 새도 없이 황제가 웃으며 뺨에 입을 맞췄다.

“심장이 빨리 뛰고 있네.”

너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

나는 뒤로 몸을 물려 그 손길에서 벗어났다.

마음 같아서는 뺨을 때려 주고 싶었지만, 탈출이 코앞인데 여기서 황족 능멸로 억울하게 죽을 수는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이 문란한 황제한테 몸을 내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오랜만이라 그런가.”

황제는 내가 튕긴다고 생각한 건지 다시 웃으며 내 옆으로 바짝 몸을 붙여 왔다.

나는 그런 황제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폐하.”

“응?”

“혹시 아이가 생기면 황궁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뭐?”

황제가 움찔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천천히 영어 문장을 완성했다.

“아이가 생기면 황후 폐하도 절 받아 주지 않으실까요?”

“그게 무슨 소리지?”

황제가 사색이 되었지만, 나는 눈을 깜빡이며 미소를 지었다.

“폐하의 아이면 이능을 가졌을 수도 있는데, 버릴 리 없잖아요.”

그리고 최대한 나른하게 속삭였다.

“저 방법을 찾은 것 같아요.”

“……무슨 방법?”

“황궁으로 들어가 폐하의 곁에서 평.생. 머물 방법이요.”

“…….”

황제가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나는 서운함 가득한 눈으로 그를 보며 입을 벙긋거렸다.

“왜 그러세요?”

“지금 막 돌아와서 할 일이 산더미인데, 깜빡했군.”

황제는 횡설수설하며 쉴 새 없이 떠들었지만, 너무 빨라서 뒷말은 알아듣지 못했다.

어쨌든 제 아내를 만나고 온 주제에 내게 시동 걸던 욕구가 사그라든 건 분명해 보였다.

나쁜 새끼다, 정말.

“잘 자고. 내일 보자고 데이지.”

내일 안 봐, 이 자식아.

나는 서운한 척 한쪽 볼을 부풀린 채 그를 보다가 허리 숙여 인사했다. 그는 도망치듯 문을 닫고 나갔다.

그의 발걸음이 들리지 않을 만큼 멀어졌을 때, 나는 얼른 두툼한 망토를 걸치고 도망 자금을 모아 둔 주머니를 챙겼다.

그동안 요한에게 말을 걸기 위해 적어 둔 종이도 모두 챙긴 뒤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

오후라 아직 홀에 노을빛이 가득했다.

사방에서 내려오는 핏빛 노을을 맞으며 요한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다급히 요한의 앞에 앉았다.

그리고 바로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냈다.

요한은 떨떠름한 눈으로 나를 살펴보다 종이로 시선을 내렸다.

[사람은 죽이면 안 돼.]

요한의 푸른 시선이 천천히 올라왔다.

나는 다음 종이를 보여 줬다.

[지금 널 풀어 줄 거야.]

요한이 흠칫했다.

[몰래 성 밖으로 나갈 거니까 절대 사람을 죽이면 안 돼.]

나는 다음 문장을 손으로 짚고 요한을 쳐다봤다.

요한은 반응이 없었다.

나는 다시 ‘사람을 죽이면 안 돼’ 그 문장을 톡톡 두드렸다.

요한의 시선이 잠시 내 주머니로 떨어졌다. 따라가 보니 빼꼼히 삐져나온 열쇠 꾸러미가 보였다.

요한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종이를 다시 가방에 집어넣으며 흘깃 요한을 쳐다봤다.

‘……믿어도 되겠지?’

어른이 된 요한은 차분했다. 충동과는 거리가 아주 먼 존재였다.

그래, 성인 요한의 인성을 믿어 보자.

나는 불안한 마음을 치우고 열쇠를 꺼내 몰래 사슬을 풀기 시작했다.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문지기가 있으니 눈치가 보여서 속도를 낼 수 없었다.

달칵.

열쇠가 돌아가는 작은 소리에 온 근육이 바짝 움츠러들었다.

나는 망토 소매로 다음 구속구를 감싼 뒤 열쇠를 넣었다.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서였다.

조심스러운 내 행동에 애가 타는지 요한이 계속 움찔거렸다.

달칵.

막는다고 막았지만, 그래도 소리가 제법 크게 들렸다.

나도 모르게 퍼뜩 시선이 올라갔다. 그리고 바로 요한과 눈이 마주쳤다.

긴장감에 열이 오른 탓인지 입김이 짙어졌다.

그 흐린 장막 너머로 차분한 푸른 눈동자가 보였다. 요한은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재촉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응원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나는 내가 애한테 의지하려 든다는 걸 깨닫고 다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신중하게 구속구를 하나씩 풀었다.

자박.

아직 5개나 남았는데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뭐 하십니까?”

달칵.

나는 마음이 급해져서 대답하지 않고 구속구를 풀었다. 그러자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빨라졌다.

“젠장!”

눈치챈 모양인지 기사가 소리를 지르며 다가왔다. 나는 어차피 걸린 거 떨리는 손으로 빠르게 구속구를 풀어 댔다.

달칵달칵.

마지막 구속구를 풀어 줬을 때, 머리로 엄청난 통각이 번졌다.

“윽.”

팔로 나를 밀친 기사가 우악스럽게 요한의 팔을 움켜쥐었다.

“놈이 풀려났어!”

기사가 제 동료에게 소리를 쳤지만, 머리가 윙윙 울려서 이해하지 못했다.

흐릿한 시야로 바닥에 떨어진 가방이 보였다. 손을 뻗었는데 기사의 발이 더 빨랐다.

“으윽!”

그는 나를 말리려 무작정 발을 뻗은 듯했다. 그러나 내 손을 밟고 크게 움찔하며 떼어 냈다.

“으아아아악!”

밟힌 건 난데 기사가 소리를 지르며 마구 뛰었다.

나는 무심코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엄청난 열기에 눈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눈을 감기 전, 내가 마지막으로 본 건 화마에 휩싸인 기사의 모습이었다.

시끄러운 비명이 끝없이 이어지다 몇 배로 커졌다.

문가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눈을 뜨지 않아도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손으로 눈을 가린 채 고개를 들었다. 천천히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홀의 소란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를 가격했던 기사는 죽었는지 바닥에 엎어져 불타고 있었고, 열린 문 사이로 불이 붙은 기사들이 혼비백산해 도망치고 있었다.

요한은 어디 있지?

요한이 있던 자리에는 풀어진 구속구만 잔뜩 쌓여 있을 뿐 아무도 없었다.

손을 내리고 주변을 돌아보던 나는 창문 앞에 선 요한을 발견했다.

요한은 유리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자 유리가 물처럼 녹아내리며 구멍이 생겼다.

순식간이었다.

요한은 그 구멍으로 뛰어내렸다.

“아, 안 돼!”

이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요한이라도 죽을지 모른다.

허둥거리며 창가로 달려갔는데 눈앞에 보이는 건 계단을 달려 내려가는 요한의 모습이었다.

구멍 너머로 만들어진 얼음 계단은 성벽까지 이어졌다.

순간 이능의 위대함을 느꼈다.

발상 자체가 다르구나.

나는 멍하니 하얀 다리 위를 달리는 요한의 모습을 바라봤다.

따라가야겠지?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배신한 걸 들켰으니 여기 있을 수 없었고, 지금 요한을 놓치면 다시 그를 찾을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얼음 다리에 발을 올린 나는 그대로 뒤로 물러났다.

안 돼, 절대 못 걸어. 이건 자살 행위야.

이 높이에서 발 한 번 잘못 놀리면 죽는 거다.

게다가 바람은 또 얼마나 센지 날카로운 바람이 내 머리칼을 흔들며 쉴 새 없이 뺨을 때렸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요한의 작아지는 뒷모습을 보다 다리가 이어진 성벽을 응시했다.

아깝지만, 내 목숨보다 아까운 건 아니니까.

나는 가죽 봉투에서 스크롤을 꺼냈다.

찌익.

스크롤을 찢자마자 사방에서 차가운 바람이 살갗을 난도질했다.

천천히 눈을 뜨자 저 멀리서 달려오고 있는 요한이 보였다.

나는 요한이 만든 얼음 다리의 끝, 성벽 위로 이동했다.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았는데 정신이 아찔해졌다. 없던 고소공포증이 생기는 높이였다.

타다다닥.

어느새 발걸음 소리가 들릴 만큼 요한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나 나를 발견한 요한은 눈을 한 번 찌푸릴 뿐 반가워하지 않았다.

그래도 불태우지 않아서 다행인가. 다른 기사들을 망설임 없이 불태우는 걸 보고 나도 죽이지 않을까 조금 걱정했는데, 다행히 날 죽일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일단 여기로 오면 스크롤을 보여 주자.

나는 용기를 내서 요한을 설득할 준비를 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손짓과 발짓이라도 하기 위해 손목을 풀었다.

그런데 내 앞으로 쭉 뻗은 얼음 다리가 두 갈래로 갈라졌다.

요한은 그대로 방향을 틀어 다른 쪽 성벽으로 달려갔다.

“아니! 잠깐만!”

급하니까 모국어가 다 나오네.

당연히 요한이 알아들을 리 없었다. 알아들었다 해도 멈춰 줄 리도 없어 보인다.

따라가야 하나.

“아이씨, 무서운데!”

나는 바닥 아래를 보다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울먹이며 마지못해 걸음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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