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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0 영애-172화 (173/208)

172화.

넋 나간 시선은 바닥에 고정되어 있고 아무런 표정도 없었지만, 분명 사슬은 찰랑거리며 작은 소리를 냈다.

두려워서인지 추워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다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요한이 정신을 놓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

나는 쟁반을 바닥에 내려 두고 요한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읏.”

추워서 떠는 거라는 강력한 의심이 들었다.

종아리로 번지는 지독한 냉기에 나도 모르게 흠칫 무릎을 떼고 앞에 쪼그려 앉았다.

요한은 내가 앞에서 혼자 그 난리를 치는데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나는 물끄러미 요한을 쳐다봤다.

“…….”

“…….”

마족어 해석 버프가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을 걸고 싶은데 언어가 통하지 않아 나는 그저 입만 달싹였다. 그러다 슬쩍 고개를 기울여 요한과 눈을 맞췄다.

강제로 시선을 맞추니 혼탁했던 푸른 눈동자가 맑아졌다.

나는 천천히 양손을 뻗었다.

요한의 시야에 내 손이 전부 보이도록 신경 쓰며 아주 느리게 요한의 뺨에 손을 올렸다.

요한이 움찔했다.

나는 괜찮다고 말하듯 미소를 지으며 철제 마스크를 아래로 내렸다.

달칵.

그리고 입에 물고 있는 쇠공도 빼 주었다. 뻐근했던 모양인지 아이의 턱뼈가 몇 번 크게 움찔했다.

요한은 의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주시하며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나는 바닥에 내려 두었던 수프 그릇을 들고 요한의 앞에서 한 번 들어 올렸다가, 숟가락으로 떠서 입 앞에 건넸다.

그러자 요한의 눈매에 강한 살기가 번졌다.

아니, 너 배고플까 봐 밥 주는 건데 화낼 일은 아니지 않아?

그러다 나는 지난 기억을 떠올렸다.

요한이 이런 식으로 내게 수프를 건넨 적이 있었다.

입을 열지 않는 나를 보며 그는 손등에 수프를 조금 떨어뜨려 먼저 먹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아, 내가 독살하려는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요한 입장에서는 누구도 믿을 수 없겠지.

좋은 태도였다.

나는 속으로 요한을 대견하게 여기며 숟가락으로 수프를 떠 내 손등에 떨어뜨렸다.

‘이거 괜찮아. 봐봐. 내가 먼저 먹어 볼게.’

그렇게 눈으로 말하며 혀끝으로 수프를 핥았다.

와, 차가워.

나는 수프가 너무 차가워서 깜짝 놀랐다.

아이스크림인 줄 알았다.

야외 계단을 걸어오는 동안 수프가 언 모양이었다.

가뜩이나 추운데 이걸 먹이는 건 고문이었다.

나는 당황하다 바닥에 진 수프 그릇 그림자를 보고 움직임을 멈췄다.

뒤를 돌아보니 불의 이능으로 만든 작은 횃불이 보였다.

나는 요한을 보고 잠시만 기다리라는 눈빛을 보냈다. 알아들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래도 제 편이 있다는 걸 알길 바라서 나는 최대한 요한과 눈을 많이 맞추려 노력했다.

기둥으로 달려간 나는 횃불을 꺼내 왔다. 그리고 바닥에 내려 둔 놋그릇에 대고 수프를 데웠다.

시간이 꽤 걸렸다.

놋그릇 주변으로 작은 기포가 끓을 때쯤 다시 횃불을 가져다 두었다.

재빨리 돌아온 나는 숟가락으로 수프를 떴다. 그러자 모락모락 이는 김을 따라 고소한 냄새가 퍼졌다.

요한도 배가 고팠는지 그 냄새에 움찔했다. 그는 수프에 시선을 둔 채 떼지 못했다.

겨울국 황제 이 변태 같은 놈, 내 최애 남주를 이렇게 굶기다니. 너는 내가 먼치킨 여주가 아닌 걸 다행으로 알아야 해. 내가 검이나 이능을 다뤘어 봐. 원작이고 뭐고 너부터 처리했다.

난 울컥한 마음을 누르고 숟가락을 살살 흔들어 수프를 살짝 식힌 뒤 요한에게 건넸다.

그는 어쨌든 아이였다.

지금의 요한은 순수하게 제 욕구를 인정할 줄 알았다.

찰랑.

머뭇거리며 몸을 숙인 요한이 작게 입을 벌렸다.

아기 새처럼 수프를 받아먹는 게 기특해서 입꼬리가 올라갔다. 다시 크게 한술 떠서 건네자 이번에도 아이는 순순히 받아먹었다.

더 가져올 걸 그랬네.

기사 놈들 눈치가 보여서 많이 훔쳐 오지 못했는데, 용기를 좀 낼 걸 그랬다.

금세 바닥을 보인 그릇을 보며 나는 아쉬움을 삼켰다.

요한은 더 아쉬움이 커 보였다.

아까의 그 매서운 눈빛은 어디다 버렸는지, 부드러워진 눈매로 바닥에 놓은 수프 그릇을 보고 있었다.

애는 애네, 행동과 생각이 보이는 게 참.

다행이면서도 마음이 좀 그랬다.

요한은 다시 시선을 들어 나를 쳐다봤다.

아까보다는 누그러들었지만, 여전히 적대심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 차가운 눈동자보다 더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다.

나는 웃음을 참으며 오른쪽 소맷자락을 끌어 손안에 쥐었다.

어찌나 급하게 먹었는지 요한의 입가에 수프가 묻어 있다.

겁내지 않도록 손을 내밀며 입가를 톡톡 두드려 닦아 줬다.

챙, 채앵, 챙.

천 자락이 닿을 때마다 요한이 움찔대는 바람에 사슬 소리가 시끄럽게 울었다.

누가 보면 내가 애 뺨을 쉴 새 없이 때리는 줄 알았을 거다.

‘어쨌든 첫 번째 할 일은 마쳤고.’

이제 다음 일을 할 차례였다.

나는 주머니에서 돌돌 말아 온 종이 몇 장을 꺼냈다.

요한에게 내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가져온 문장이었다.

나는 손끝으로 첫 번째 문장을 톡톡 건드리며 미소를 지었다.

[함께 앞으로 나아갔다. 도망친다. 저 멀리.]

[그렇지 않으면. 죽었다. 여기서.]

지금 찾아 조합할 수 있는 단어의 한계였다.

내일이면 좀 더 풍부한 단어를 수집할 수 있겠지만, 아쉬워도 오늘은 여기에서 만족해야 했다.

요한이 이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찌푸렸다.

음, 잘못 적어 왔나?

나는 찜찜한 눈으로 내가 적어온 문장을 보다 다음 장을 넘겼다.

그리고 다시 손가락으로 다른 문장을 짚었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기다린다. 겨울잠을 자는. 아이.]

요한의 눈이 순간 커졌다. 그리고 겁먹은 것처럼 고개를 뒤로 물렸다.

챙.

요한이 퍼뜩 고개를 들어 나를 간절한 눈으로 응시했다.

“.-.-.?.-.?.-?”

아까 수프를 먹이려 재갈을 풀어 둔 터라 요한이 다급하게 내게 말을 했다.

하지만 이해하지 못한 나는 고개를 저으며 다른 종이를 펴 보여 줬다.

[소리는. 이해하지 못했다. 오직. 책을 읽었다.]

손으로 책장을 가리키자 요한이 크게 숨을 내쉬며 몸을 떨었다.

순간 부푼 희망이 확 빠져나간 듯 고통스러워 보였다.

나도 아쉬웠다.

버프가 먹혔으면 쉽게 대화하고 설명해 줄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이 노력에 성과는 있었다.

요한의 눈빛이 확연히 달라졌다. 그 안에는 순수한 열정이 차 있었다.

목표가 생긴 모양이다.

이곳을 나가기로 마음먹은 것 같다.

엉망이라도 급히 뜻을 전한 보람이 있다.

[또. 올 것이다.]

요한에게 다음 문장을 보여 주자 아이가 조용해졌다.

나는 종이를 치우고 고개를 숙여 억지로 눈을 맞추고는 미소를 지었다.

‘또 올게. 기다려.’

여길 나갈 방법이 있으니까.

부디 내 확신이 전해지길 바라며 눈을 맞췄지만, 요한은 미간을 슬며시 찌푸렸다. 아직은 나를 신뢰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래, 사람은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 줘야지.

나는 속으로 요한의 경계심을 기특해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쟁반과 책 두어 권을 새로 챙겨 본성으로 돌아갔다.

아직은 새벽, 복도에는 장식처럼 미동 없는 불침번만 몇 명 서 있을 뿐 아무도 없었다.

나는 책 위에 받쳐 둔 쟁반을 들고 걷다 복도 창밖을 바라봤다.

청록색 빛이 어린 새벽하늘에 별이 있었다.

나는 그중 가장 빛나는 세 개의 별을 찾았다.

분명 요한이 남주 시점 전개에서 저걸 보고 마왕의 기상 시간을 계산했었다.

요한의 시점 전개에서 저 별들은 나란히 일직선을 그렸는데, 지금은 둔각을 가진 얇은 삼각형 모양이었다.

가운데 툭 튀어나온 저 별이 움직여 직선이 되면 마왕이 깨어나는 듯하다.

‘……성을 나갈 때쯤에는 일직선이 될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나는 마왕이 빨리 깨어나길 바랐다.

그때까지만 버티자.

마왕의 동면이 끝날 때까지만.

***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왜 겨울국이 몰락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쟁반을 든 나는 흐린 눈으로 철문을 올려다보았다.

하얀 선으로 그려진 밑그림이 검은 철판을 가득 채웠다.

그렇다.

겨울국 황제는 승리를 확신하고 겨울국 사람들을 야금야금 마왕성에 데려오고 있었다. 심지어 조각가까지 데려왔다.

철문에 겨울국과 마족의 전쟁을 그렸는데, 먼 훗날 내가 감상한 조각이 황제 놈의 나르시시즘 때문에 생긴 역작이었다는 게 놀라웠다.

황제만 그런 건 아니었다. 고위 기사가 요리사도 데려왔고, 귀족 출신 기사들은 제 방에 포근한 양털 시트를 깔아 두고 방 꾸미기에 열을 올렸다.

‘……이렇게 안일하니까 망하지.’

그들은 조국이 멸명하는 미래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승전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문 앞에 서서 그림을 보고 있으니 기사 둘이 알아서 문을 열어 주었다.

정확히는 문고리 부분을 꾹 눌렀다.

내가 엉덩이나 등으로 문을 밀면 밑그림이 지워지니 어쩔 수 없이 열어 주는 거였다.

쿵.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문이 무겁게 닫혔다.

성은 열심히 꾸며 대면서 이곳은 딱히 손대지 않았다.

지하 던전처럼 춥고 어두운 공간에 사슬에 둘둘 말린 소년이 하나 앉아 있다.

다행히 요한은 추위에 강했다.

나라면 못 버텼을 것 같은데 저렇게 얇은 옷을 입고도 일주일 동안 감기조차 걸리지 않았다.

요한의 앞에 앉은 나는 조심스럽게 마스크와 입안에 물고 있는 쇠공을 빼 주었다.

이제는 경계가 많이 누그러들어서 요한은 순순히 내게 제 몸을 맡겼다.

나는 요한의 입안에 당근 조각을 넣어 주었다.

“…….”

이게 뭐냐는 눈으로 쳐다보길래 나는 양쪽 볼을 부풀리고 이빨을 딱딱 부닥치며 음식을 씹는 시늉을 했다.

먹으라는 거였다.

너 채소 섭취가 너무 부족하단 말이야.

여긴 전시 기지라 생채소가 귀했다. 귀족 기사들이야 과일도 먹고 포도주도 마시며 식사를 잘했지만, 나나 하급 기사들은 끓인 수프와 빵을 배식받았다.

이 당근은 새벽에 식기를 가져다 두면서 몰래 부엌에서 빼돌린 생채소였다.

나는 그래도 어른이지만, 요한은 아직 아이의 몸이니까 영양소 균형이 중요할 것 같았다.

요한은 경계심이 많고 가끔 날 죽일 듯이 노려봤지만, 그래도 착한 아이였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날 보면서도 마지못해 입안에 넣어 준 당근 조각을 아삭아삭 씹었다.

나는 잘했다고 칭찬하듯 한 번 웃어 주고 횃불로 수프를 데웠다.

성의 보수 작업을 위해 겨울국 사람들이 오면서 나는 완전히 투명 인간이 되었다.

싫지는 않았다.

이렇게 밤에 돌아다녀도 누구 하나 뭐라 하지 않았고, 인질로 잡은 마족 아이에게 말을 걸고 밥을 주는데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은 황제를 위해 내가 마족 아이를 꾀는 거라 생각했다.

편하다 편해.

#집착남이 가득한 사계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자유였다.

그래서일까.

자꾸만 안일해졌다.

나는 요한에게 수프를 먹여 주며 팔과 다리를 흘깃 쳐다봤다.

차가운 족쇄에 묶인 살갗이 짓물러 붉었다.

풀어 주고 싶은데 빨리 나갈까?

아니야. 여기 있으면 어쨌든 밥도 나오고 의사소통도 할 수 있는데 마왕이 일어날 때까지는 여기서 버틸까?

나는 요한의 어깨너머 창문을 바라봤다.

밝게 빛나는 세 개의 별이 보였다. 여전히 별들은 삼각형을 이루고 있었다.

일주일 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왜 이렇게 시간이 느리게 흐를까.’

타임 워프 기능조차 막혀 있으니 답답했다.

마족 지대는 아포칼립스 지역. 저 성벽 밖에는 위험 마물이 득실득실했다. 마력도 무력도 없는 내가 요한을 데리고 나가면 그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적어도 황제 놈이 스크롤을 가져올 때까지는 기다려야 했다.

물론 요한의 마력에 기대면 마물을 이길 수 있겠지만, 글쎄 요한이 날 버리지 않고 지켜 줄까……?

나는 요한에게 수프를 먹여 주며 그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자 입을 다문 요한이 물끄러미 나를 노려봤다.

뭘 보냐고 묻듯.

아무래도 요한은 아직 나를 완전히 신뢰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경계는 조금 풀었지만, 오직 그뿐. 아직은 나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해는 한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인간들이 내 집을 부숴 놓고, 나를 추운 곳에 꽁꽁 묶어 두고, 또 엄마까지 데려갔으니.

생각이 이어질수록 우울해졌다.

사슬 풀어 주자마자 성을 불태우고 나도 죽이는 거 아닐까?

그러면 안 되는데…….

다음에 올 때는 살인을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해 봐야지.

들어줄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말은 해 볼 수 있잖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장으로 갔다.

책 두 권을 꺼낸 뒤 탑을 나가려 뒤를 돌았는데 요한과 눈이 마주쳤다.

언제부터 보고 있던 걸까?

나는 입매를 길게 늘여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요한의 앞으로 다가가 앉았다.

요한의 푸른 눈동자 안에 자리한 검은 동공이 크게 확장됐다. 그러나 짙푸른 시선은 금세 다시 어두워졌다.

그래도 나는 그게 기꺼웠다.

나에 대한 호기심이든 두려움이든, 감정이 가득해서.

어머니의 죽음이나 혼란스러운 상황을 내가 밀어낼 수 있어 다행이었다.

나는 일부러 요한의 앞에 자리를 잡고 책을 읽었다. 그리고 필요한 단어가 나올 때마다 종이 끝을 접어 표시했다.

나를 미워하든 내게 무언가를 기대하든 나쁜 생각을 하지 않길 바랐다. 그래서 계속 나를 생각하도록 그 앞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동이 트기 직전 밤하늘이 청록빛으로 물들 때까지, 요한의 숨소리와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침묵을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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