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예상은 했지만…….
성 밖은 폐허였다.
전투를 치른 흔적이 역력했다.
성벽은 반쯤 녹아 있고, 한 번에 화장을 한 건지 검게 탄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휑한 바람이 눈을 쓸며 밀려왔다.
시체를 태운 역한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나는 토기를 참으며 손으로 입과 코를 감쌌다.
1층에서 고함을 외치며 짐을 옮기는 소리와 나를 따라 나온 기사들이 뒤에서 낄낄거리는 소리가 어지럽게 뒤섞였다.
“운이 좋았지.”
“마족 새끼라도 잡았으니 다행이야.”
수많은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제대로 알아들은 내용은 몇 가지 없었다.
이 탑은 마족의 동면지였다는 사실 하나.
두 번째는 마왕의 동면 수정도 요한과 함께 있었는데, 마족들이 퇴각하며 그의 수정만 챙겨서 도망쳤다는 사실이었다.
지금 이 성안에 남은 마족은 요한뿐이었다.
나는 차갑게 언 손을 꽉 잡았다.
마족은 출생으로 서열을 타고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마왕의 아들인 걸 떠나서 요한은 아직 애잖아.
마족이 전부 도망친 걸 보면 아주 긴박한 상황이었을 것 같긴 하나, 그렇다고 바로 옆에 있던 요한의 동면 수정을 두고 간 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잔인한 마족들의 선택에 울컥했지만, 나는 그 마음을 꾹 눌렀다.
‘됐어. 내가 데리고 나갈 거니까.’
나는 책장에서 꺼내 온 책을 움켜쥐었다. 전에 요한이 책으로 언어를 비교해 공부했다던 말이 떠올라 여름국과 마족어로 적힌 책을 하나씩 가지고 나왔다.
이제 와 공부를 해서 대화를 하는 건 무리일 것 같고, 같은 단어를 찾아 쪽지에 적어 뜻을 전해 볼 생각이었다.
“하…….”
맹렬한 추위 속으로 하얀 한숨이 흩어졌다.
1층에 거의 다 내려왔을 무렵 기사 하나가 말을 걸었다.
“더 이상 폐를 끼치시면 안 됩니다.”
충고하듯 내뱉는 말투에 그쪽으로 시선이 끌려갔다.
순간 움찔했다.
기사의 눈에 감출 수 없는 경멸이 담겨 있었다.
‘뭔데 이건 또…….’
나는 곰곰이 생각을 곱씹다 무례한 말을 한 남자에게 질문을 해 보았다.
“폐가 되면, 죽이실 건가요?”
좋은 기회였다.
기분이 좋은 건 아니지만, 내 위치를 파악할 수 있어서 이 상황이 마냥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황제의 눈을 벗어나자마자 내게 저런 말을 하는 걸 보면 좋은 위치는 아닌 것 같다만.
아니야, 내가 영어를 못해서 오해한 걸 수도 있잖아?
그러나 역시 기분 나쁜 촉은 괜히 오는 게 아니었다.
기사들은 저들끼리 눈을 마주치고는 웃음을 참다 나를 쳐다봤다.
“저희가 레이디를 죽일 리가요.”
사과의 뜻은 아니었다. 처음 말을 건 기사가 고개를 숙여 내게 눈을 맞췄다.
“성 밖에 버리면, 마물이 알아서 주워 갈 텐데.”
기사는 협박조로 속삭였다.
직접 칼을 쓰는 것조차 호의라 여기는 듯한 태도.
그의 뒤에 선 동료 또한 비웃으며 중얼거렸다.
꽤 긴 말이었는데, 알아들은 단어는 몇 개였다.
봄국민. 건방. 황후가 불쌍.
내게 얼굴을 들이댄 남자가 툭툭 내가 들고 있는 책을 건드렸다.
“살아서 돌아가고 싶다면, 당신의 쓰임을 잘 기억하십시오.”
나는 남자의 기세에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꽝꽝 언 난간이 날카롭게 등을 찔렀다. 등으로 차가운 감각이 번졌다.
굳은 나를 보며 기사들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렸다.
그때, 누군가 소리를 쳤다.
“어이! 할 일 없어?”
“여기 와서 일 좀 도와!”
모두의 시선이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언제 나타난 것인지 수레가 하나 있었다.
주황색 종이가 감겨 있는 걸 보니 겨울국에서 온 물건인 듯했다.
나는 내려가려는 기사들에게 용기 내 한 번 더 물었다.
“제 방 위치가 기억이 안 나서요. 알려 주시면 혼자 갈게요.”
“3층 서쪽 두 번째 방.”
기사는 짧게 대답하고 뒤를 돌았다.
나는 그들이 사라지는 걸 보다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캐해 고맙다.’
“살아서 돌아가고 싶다면, 당신의 쓰임을 잘 기억하십시오.”
쓰임이라.
시선을 내려 두툼한 책 두 권을 눈에 담았다.
기록을 모두 훔쳐 오면서 황제는 날 위해 그랬다고 말했고, 기사들은 이 책을 건드리면서 내 쓰임을 기억하라고 당부했다.
나는 여기서도 기록에 환장한 인간이었나 보다.
버그의 하찮은 창의력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거 자가 복제 아니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어쨌든 여기서도 내 캐릭터 설정은 다를 게 없어 보인다.
무력도 없고, 뛰어난 미인도 아니고, 비밀스러운 정보를 가진 사람.
마침내 계단을 다 내려온 나는 넓은 마족성 정원을 바라봤다.
정원이랄 것도 없긴 하다.
풀 한 포기 없는 질척한 흙밭.
현생에서 봤을 땐 새하얀 설원이었는데, 지금은 전쟁이 끝난 직후라 그런지 진흙과 핏물로 땅이 더러웠다.
겨울국 기사들은 질척한 길 위로 발을 퍽퍽 내디디며 금박이 씌워진 상자와 싱싱한 과일이 담긴 수레를 옮겼다.
성을 함락한 지 적어도 며칠은 지난 모양이다.
벌써 저렇게 안일해진 걸 보면.
겨울제국. 강하고 오만한 나라.
지금까지 눈으로 본 그들의 모습이었다.
나는 성을 둘러보며 방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성 자체는 예전에 봤을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구조도 그대로였다.
달칵.
나는 문을 잠그고 내 방을 훑어보았다.
침대와 책상, 벽난로, 소파.
굵직한 가구는 그게 다인데 방이 매우 비좁아 보였다.
책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나는 책상 위에 펼쳐진 책 두 권과 잉크 그리고 펜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의자에 앉아 책 내용을 살피는데 눈이 가늘어졌다.
하나는 봄국어였고 하나는 마족어였다.
“또 마족어도 하는 캐릭터였나 보네.”
감이 온다.
나는 봄국에서 마족어로 스승의 기록을 번역하던 자였나 보다.
보아하니 마족성에 있는 데이터 집을 내가 만들었다는 설정을 넣은 거 같은데, 그 방대한 양을 생각하면 절대 여기서 번역한 건 아닐 거다.
거의 평생을 번역해 왔을 텐데, 그러려면 스승의 허락이 있어야 가능했다.
“하, 나 진짜 배신자인가 보네.”
오랫동안 따른 스승의 뜻을 거스르고 황제에게 기록을 전부 내준 걸 보면 나는 진심으로 황제를 좋아했나 보다. 아니면 이 기록들을 지키고 싶어 환장했던지.
어느 쪽이든 변태 같다.
나르시시스트 불륜남을 사랑했건, 없애야 할 기록을 사랑했건.
나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확실한 건 내가 전쟁이 일어나도록 기여했다는 사실이다. 전쟁을 초래할 기록을 넘긴 모양이니.
그리고 그렇게 이바지했음에도 공로는커녕 경멸을 받고 있다.
‘……살려 두긴 하려나.’
황후를 신경 쓰는 황제의 태도나 이단자를 보듯 나를 소름 돋아 하던 기사들을 보면…… 아마도 사계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나를 마족성에서 죽일 것 같다.
나는 차가운 손으로 목덜미를 한 번 쓸어내렸다.
요한도 구해야 하지만 나도 빨리 여기서 도망가야 했다.
나는 창가로 다가가 밖을 살폈다.
창밖의 전경이 다소 낮긴 했지만 그래도 성벽 안은 확인이 가능했다.
무너진 성벽에 나무 기둥을 덧대는 사람들이 보이고, 골목마다 서 있는 마차와 마족의 집에서 자재를 가져오는 겨울국 사람들도 보였다.
‘길에 사람이 너무 많아.’
마왕성을 나가 바로 성벽까지 가는 건 무리일 듯싶었다.
겨울국 황제에게 포상으로 스크롤을 달라고 했으니까, 그걸 받으면 이용해서 도망치자.
황제인데 쪼잔하게 한 장 주는 건 아니겠지? 딱, 두 장…… 아니 네 장만 있으면 되는데.
지금 생각나는 방법은 스크롤로 경계로 이동하는 거였다. 거기서 사계국으로 넘어가서 봄국으로 도망치고.
만약에 사계국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경계에 갇힌다고 해도 괜찮았다.
경계에서 안전하게 버티다가 마왕이 깨어날 때쯤 열심히 걸어서 빠져나오면 되지 않을까?
생각을 정리하던 나는 책상으로 와서 책을 두고 앉았다.
그리고 여름국어와 마족어로 적힌 책 두 권을 펼치고 읽으며 단어를 찾았다. 요한에게 도망치자는 쪽지를 쓰기 위해서.
***
얇은 이불을 목 근처에 돌돌 말아 목도리처럼 맸다. 그리고 식당으로 가서 남은 수프를 챙겨 다시 탑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모두 오르니 거대한 철문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은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매끈한 문이었다.
보초를 서고 있던 기사는 나를 보고도 그대로 서 있었다.
나는 쟁반을 들고 있어서 손이 모자랐다. 그의 호의에 기대 문을 열어야 했는데 남자는 문을 열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겨울국 매너 무슨 일이냐.
아무래도 시즌 2는 미연시가 아닌 던전물인 거 같다. 로맨스보다는 생존이 주인 모양인지 남주들의 적대감이 대단했다.
나는 끙끙거리며 등으로 문을 밀었다.
끼이익.
나는 겨우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실내라고 탑 안에 들어서니 따뜻한 공기가 훅 밀려왔다.
겨울국 황족의 치트키.
불의 이능.
중간중간 벽난로처럼 돌 위에 작은 불이 피어 있다.
그래도 워낙 공간이 넓어서 실내를 환히 밝히지는 못했다.
오히려 육안을 밝혀 주는 건 자연이 만든 빛이었다.
꽃봉오리처럼 돔형으로 다물린 홀. 꽃잎 사이로 파고드는 햇살처럼 천장까지 높게 트인 창으로 달빛이 들어왔다.
홀 중앙에는 마치 제물처럼 한 아이가 앉아 있었다. 거리가 멀어 손톱만 하게 보이지만.
요한에게 다가가던 나는 미간을 좁혔다.
요한의 윤곽을 따라 빛무리가 어린 것처럼 가느다란 연기가 흩어졌기 때문이다.
황족의 이능은 제 기사들이 보초를 서는 입구 주변에만 발현됐다.
당연히 그 온기는 요한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한참 안쪽에 있는 요한의 자리는 얼음판 그 자체였다. 아이의 숨을 따라 마스크 주변으로 입김이 일었다.
사실 요한은 불의 이능을 쓸 수 있었기에 추위를 타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이능을 쓸 수 있을 때 얘기 아니냐고.
겨울국 이 미친놈들은 애한테 구속구를 잔뜩 끼워 두고도 외투 하나 걸쳐 주지 않았다.
아무리 마족이 기본적으로 한대 지방에서 거주하는 종족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장시간 추위에 노출되면 괴로울 수밖에 없잖아.
……아닌가?
얼음 속에서 동면하니까 괜찮은 건가?
이능이 없는 나는 마족의 신체 메커니즘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고민하며 계속 요한에게 걸어갔다.
그러다 잘게 떨리는 쇠사슬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요한이 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