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괜찮아요.”
나는 불륜남과 거리를 멀찍이 두며 옆으로 물러났다.
“데이지.”
어떻게든 영어 수업을 끝내고 싶은 나와 달리 그는 계속 대화를 이어 가려 했다.
“사서 자리를 줄까?”
나 진짜 황족들이 선호하는 인재 타입인가. 왜 황족들은 자꾸 나를 채용하려 들지?
하다못해 전생의 연인인 것 같은 황제마저 입사를 권했다.
말없이 쳐다보니 남자가 눈을 휘며 말했다.
“넌 읽는 것도 좋아하고 쓰는 것도 좋아하잖아. 능력이 있어. 지난 합방일에 에일린이 내가 줬던 편지들을 몇 번이고 꺼내 보더라고. 네가 대신 써 준 그 편지 말이야.”
“이거 쓰레기네.”
나도 모르게 한국어로 욕을 뱉으며 확 고개를 물렸다.
황제는 얼떨떨한 얼굴로 멍하니 나를 보다 물었다.
“지금 뭐라고 한 거야?”
말을 뱉고 나니 아차 싶었다. 지금은 내 편이 하나도 없는데.
나는 발음이 어눌했던 척 또박또박 영어를 발음했다.
“감격했다고요(It’s thrilled).”
그러자 황제 놈이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못 읽는 언어가 없는 그대가 발음은 어색한 게 참 매력적이야.”
그는 기분 좋게 웃으며 굳이 내 옆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귀여워.”
아아…….
황후 에일린 씨를 찾아가 도시락 싸 들고 쫓아다니며 이혼하시라고 설득하고 싶어졌다.
버그는 거짓말을 못 하는 게 분명하다.
스토리텔링에 자신 없다는 그 말은 진실이었다.
시즌 2 초기 스토리에 나를 넣었다고 하는데, 전쟁이 시작되는 이야기에 마족도 황족도 아닌 내가 중요한 부분을 담당할 리 없다.
버그가 제 취향대로 황제와 로맨스를 억지로 엮은 거 같은데 …….
불륜이라니.
이거 미친 설정 아니냐.
나는 깊은 한숨을 쉬며 다시 뒤돌아 동면 수정을 바라봤다.
불의 이능에 얼음이 녹아 황녀가 절반이나 모습을 드러냈다.
버그가 부여한 못된 설정 때문에 일었던 분노가 가라앉았다.
요한의 시점으로 들었던 말이 생각난 탓이다.
“어머니가 죽은 건 제 탓이에요. 제가 미숙해서.”
그는 제 실수로 어머니가 죽었다고 했다.
……실은 그게 아니라 이 황제 때문에 죽은 건가?
파스스.
녹는 속도가 빨라지며 기화한 얼음이 수증기처럼 수정 주변을 감쌌다. 마치 오래된 서적을 펼쳤을 때 이는 먼지 같았다.
그 하얀 장막 너머로 인영이 보였다.
흑단처럼 검은 머리칼 아래로 드러난 창백한 얼굴. 색이 바랜 연보랏빛 입술.
전혀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툭.
발목을 감싼 얼음마저 녹아 사라지자, 그녀가 끈이 잘린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바닥으로 떨어졌다.
대리석 바닥 위로 검은 머리칼이 바닷속 해초처럼 넓게 퍼졌다.
나도 모르게 그쪽으로 다가가려다 멈칫했다.
촤아아악.
뺨 위로 통각이 번졌다. 손을 들어 만져 보니 피가 묻어났다.
촤아악. 촤악.
기다렸다는 듯 붉은 망토를 입은 남자들이 쉴 새 없이 구속구를 던져 댄 탓이다.
족쇄는 며칠 굶은 뱀처럼 아가리를 좁히며 요한의 팔과 다리를 옭아맸다.
나는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채 그 기괴한 장면을 눈에 담았다.
챙.
큰 움직임이 한 번 일고, 여진처럼 미세한 파동이 사슬을 따라 요한에게 전해졌다.
남자들은 긴장한 얼굴로 기둥에 사슬을 단단히 고정했다.
당겨진 쇠줄을 따라 요한의 상체가 물에 건져진 천 자락처럼 무겁게 올라왔다.
요한의 옆에 서 있던 남자들은 재빠르게 아이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구속 철재로 만들어진 마스크까지 채워 재갈을 뱉지 못하도록 봉쇄했다.
그제야 요한이 움찔했다. 그저 미간에 잠시 주름이 잡혔던 것뿐인데 기사가 도망치듯 빠르게 물러났다.
나는 요한이 눈을 뜨지 않기를 바랐다.
아직 황녀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해 그의 옆에는 황녀가 쓰러져 있었다.
하지만 요한은 그대로 눈을 뜨기 시작했다.
아이의 것이라 상상할 수 없는 차가운 눈이 천천히 제 초점을 찾아갔다.
푸른 눈동자는 무언가를 찾듯 바닥으로 움직였다. 그러자 아이의 보드라운 미간에 얇은 실선이 생겼다.
챙.
요한이 손을 뻗자 쇠사슬이 날카롭게 울었다.
챙. 채앵. 챙.
그는 구속에 반항하며 마구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은 한 뼘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요한의 시선이 다시 올라왔다.
무섭도록 차분한 표정으로 소년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도약하기 위해 잠시 근육을 압축하는 맹수처럼.
“윽!”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거운 열기가 해일처럼 덮쳐 온 탓이다.
하지만 그 열기는 잠시였다.
나는 다시 서늘해진 공기를 느끼곤 천천히 눈을 떴다.
순간 내가 뭔가 잘못 본 줄 알았다.
구속구가 이능을 게걸스럽게 빨아먹으며 꿀렁거렸다.
붉은 쇠사슬이 샛노랗게 변할 정도로 열기가 무섭게 쏟아졌지만, 불이 일기는커녕 실내 기온은 다시 차가워졌다.
“믿을 수가 없군.”
웃음기가 담긴 목소리가 들렸다.
황제는 제 턱을 매만지며 웃음을 참았다.
“그대들 실력이 이 정도일 줄이야. 돌아가면 꼭 상을 내리도록 하지.”
붉은 망토를 두른 마법사들이 허리를 숙여 침묵으로 치하에 화답했다.
나는 미간을 좁히고 다시 요한에게 고개를 틀었다.
요한은 밀랍 인형처럼 아무런 표정도 내비치지 않았지만, 불규칙하게 들썩이는 몸과 떨리는 사슬은 고통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재갈을 문 채 말을 하다 혀를 씹은 건지 턱 끝으로는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황제는 그 모습마저 기쁜 듯했다. 날카로운 쇳소리 사이로 웃음소리가 섞였다.
아이의 차가운 눈동자가 바닥에 쓰러진 여자에게 고정됐다.
“-.-.-.”
재갈이 물려 있어 또렷하진 않지만 무언가를 발음하는 목소리도 들렸다.
알아듣지 못하는 단어의 뜻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아이는 쓰러진 여인을 부르고 있었다.
“-.-.-.”
반복되는 그 소리가 심장을 긁었다.
나는 팽팽히 당겨진 사슬을 피해 앞으로 걸어가 바닥에 앉았다.
발끝까지 내려온 검은 망토가 바닥에 넓게 퍼지고 그 바람에 뿌연 먼지가 일었다. 나는 바닥에 늘어진 황녀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았다.
순간 날 선 소음이 가라앉고 사위가 고요해졌다.
챙.
당겨진 쇠사슬 소리가 날카롭게 고막을 파고들었다.
나는 천천히 무릎걸음으로 다가갔다.
무릎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손을 들어 요한에게 보여 주었다.
그리고 아주 느리게 요한의 손등 위로 손을 내렸다.
피하고 싶다면 언제든 뿌리칠 수 있도록.
요한은 피하지 않았다.
나는 그 작고 차가운 손 아래로 여자의 손을 가져다 댔다. 요한은 황녀의 손을 쥔 채 굳어 버렸다.
아이는 잠시 그녀에게서 손을 떼었다가 머뭇거리며 다시 잡았다.
몇 번이나 반복하던 요한의 눈에 투명한 물이 차올랐다. 천천히 올라온 파란 시선이 부정하듯 물었다.
죽은 거냐고.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다시 쇠사슬이 날카롭게 울었다. 시야에 담기는 차가운 시신을 보다 나는 목에 묶인 망토 끈을 풀었다.
느릿하게 내려가는 검은 천을 보며 요한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검은 천이 조금씩 그녀의 모습을 가렸다.
내 가슴에 붙은 황녀의 높은 콧날과 그 아래로 이어진 가파른 턱선이 검은 천 아래로 사라졌다.
요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안에 있던 어떠한 끈이 끊어진 것처럼 반응하지 못했다.
홀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나는 요한의 어머님을 품에 안은 채 조심스럽게 그녀를 완전히 망토로 감쌌다.
자박자박.
그때,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황제뿐만 아니라 홀 안의 모든 인간이 나를 알 수 없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다가온 황제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가볍게 나를 다독이던 그가 입을 얼었다.
“그녀는 내가 데려가지. 겨울국 황족이니 그녀도 황실 묘에 안치될 자격이 있어.”
황제가 무어라고 더 말을 했지만,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다음 말은 확실히 알아들었다.
“잘했어.”
칭찬이었다.
맥락을 이해할 수 없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정신적 충격으로 죽기라도 하면 마왕과 협상할 수 없지. 이건 아직 성체도 아니잖아. 내가 없는 동안 죽지 않게 잘 감시해 둬.”
그는 내가 저를 위해 자해하는 요한을 달랜 거라 여겼다. 날뛰던 요한이 진정된 걸 보며 감명받은 듯했고.
나는 어떤 한 단어에 서늘한 기분을 느꼈다.
협상?
“협상이요?”
“마왕이 일어나면 제 새끼를 찾으러 오겠지.”
황제가 피식 웃었다.
“이걸 잘 이용하면 놈의 약점을 잡을 수 있을 거야.”
이용이라니.
지금 막 황족이라고 요한 어머니의 시체를 챙겼으면서, 요한을 이용해 마왕을 협박한다고?
대체 애한테 무슨 짓을 하는 거야.
황제의 야비한 생각에 나는 표정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러나 황제는 이미 제 기사들을 향해 등을 돌린지라 내 표정을 보지 못했다.
딱.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기사들이 다가와 요한 어머니의 시체를 들고 갔다.
“아, 데이지.”
홀을 나가려던 황제가 갑자기 뒤를 돌았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일기장을 높이 들었다.
“그대의 공이 커. 상을 주고 싶은데 뭘 줄까?”
황제는 나를 믿는 것 같았다.
나는 시선을 들어 홀을 가득 메운 책장을 응시했다.
내 말만 듣고 이 기록들을 모두 옮긴 걸 보면, 전생의 데이지가 신뢰를 준 듯하고.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나는 움직이지 않는 입꼬리를 억지로 들어 올리며 답했다.
“이동 스크롤이요.”
“음. 지금은 군수용밖에 없는데 다른 건 원하는 거 없어?”
“황후 자리요.”
“이동 스크롤을 가져다줄게.”
황제는 빠르게 말을 바꾸며 홀 밖으로 나갔다.
나는 물끄러미 황제가 나간 뒷모습을 보다 다시 요한을 바라봤다.
붉은 망토를 입은 자들은 마법사였는지, 그들은 요한의 근처에 마법진을 그리고 있었다.
요한은 문밖으로 옮겨지는 어머니를 쳐다보고 있었다.
요한의 뺨이 젖어 있다. 그러나 아이는 제가 울고 있는 것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요한의 손을 잡아 주려다 그만두었다.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가 나간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창밖의 하늘에 붉은 기가 어렸다.
날이 밝을 때, 마족 성의 구조가 그대로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요한을 데리고 여기서 탈출할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