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OP 100 영애-169화 (170/208)

CH15. 

단 한 명을 위한 키워드, #환생물

169화.

소란한 대화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알아듣기 힘들지만, 얼추 이해할 수 있는 고통스러운 언어였다.

‘영어?’

천천히 손을 내리자 낯선 장소가 보였다.

버려진 신전 같기도 하고, 던전 같기도 한 이질적인 공간.

꽃봉오리처럼 둥글게 모아진 회색 벽을 따라 시선을 올렸다.

벽 사이에 박힌 긴 유리창으로 햇빛이 들어왔다.

그토록 많은 빛이 들이차는데도 분위기가 삭막했다. 색이 바랜 대리석과 곳곳에 쌓인 먼지 때문이었다.

‘……근데 묘하게 익숙하네.’

눈을 찌푸리며 기억을 더듬는데 엄청난 소음이 들렸다.

쾅!

나는 깜짝 놀라 몸을 흠칫했다.

벽에서 어마어마한 높이의 책장이 생겨났다. 건물 3층 정도 되는 아득한 높이의 책장이었다.

‘저게 뭐야?’

거대한 책장은 리본을 맨 선물 상자처럼 긴 주황색 종이에 감겨 있었다.

쾅. 콰쾅. 쾅. 쾅쾅. 콰쾅.

연달아 몰아치는 폭음 때문에 나는 더 생각을 잇지 못했다.

양손으로 귀를 막고, 마구 생겨나는 책장을 보며 흠칫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더 놀라운 건 책장에 매달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책장의 가장 높은 곳에서부터 바닥으로 주황색 종이를 찢으며 내려왔다.

그제야 나는 그 주황색 종이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이동 스크롤이었다.

전생이라고 해서 잔뜩 긴장했는데, 익숙한 물건을 보는 순간 안정감이 들었다.

‘근데 저렇게 비싼 종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 사람은 대체 누구지?’

제자리에서 몸을 틀던 나는 뒤에 서 있던 남자를 보고 움직임을 멈췄다.

검은 단발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남자가 나를 내려다보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그는 하얀 제복을 입고 있었는데, 단정한 차림새와 달리 손목과 손가락 그리고 귀에도 화려한 장신구가 가득했다.

보석으로 치장한 남자를 보며 나는 그가 저 스크롤의 주인이고, 스케일 크게 던전(?)을 서재를 꾸미고 있는 이상한 사람이라는 걸 눈치챘다.

높은 사람.

조심하자.

빠르게 캐릭터 해석을 끝낸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눈에 힘을 풀어 미소 비슷한 걸 지으려 노력했다.

내 추측을 증명하듯 책장을 옮긴 남자들이 달려와 그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부복했다.

그들은 바닥으로 시선을 내린 채 조용히 남자의 허락을 기다렸다.

“수고 많았다.”

아, 영어네 또.

그래도 짧은 말이라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았다.

그는 가볍게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고는 시선을 들어 아득히 높은 책장들을 응시했다.

남자는 혼잣말로 뭐라 뭐라 중얼거렸지만, 내가 현생에서 영어를 엄청나게 잘하던 게 아니라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대충 이런 내용 같았다.

“그대의 스승이 기록을 태우기 전에 옮겨서 다행이야.”

시선을 내린 남자가 검지로 내 뺨을 쓸었다.

“잘했어.”

함부로 손을 대는 게 불쾌해 나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자 남자가 피식 웃었다.

“아직도 화가 난 거야?”

그래, 앞으로도 계속 짧은 말만 해. 그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어.

나는 남자의 말에 안도하며 시선을 떨궜다.

다행히도 이 남자가 나한테 욕먹을 짓을 한 모양이다.

잘됐다. 입 다물고 삐진 척하면 되겠네.

‘그나저나 왜 또 언어 스킬이 차단된 거야? 지난번에 마족 지대에서도 그러더니……. 아?’

불현듯 떠오른 기억에 나는 퍼뜩 시선을 들어 실내를 살폈다.

여긴 마족성에 붙어 있던 도서관이었다. 그때는 계단도 있고 가구도 가득 차 있어서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놀라 홀을 살피는데 남자가 또 입을 열었다.

“설명했잖아.”

그는 짜증을 담아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우리에게 기회라고.”

그는 손에 든 가죽 책을 들어 보였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저건 내가 아는 책이었다.

겨울국 황녀의 그림책.

남자는 여자가 아이를 안고 있는 그림을 펼친 채 내 눈앞에 들이대고 있었다.

“생각해 봐.”

뭐를?

입을 다문 채 올려다보니 남자가 설명을 이었다.

“새끼는 불의 이능까지 다룰 수 있어. 이놈이 마왕이 되면 사계국이 사라질 수도 있잖아.”

사실 내가 알아듣는 게 진짜 저 뜻인지 확신은 없다.

블랙 기업 탈출을 위해 이직 준비차 열심히 스피킹 자격증 공부를 했다만, 현실 영어는 격이 달랐다.

눈과 귀로 몰아치는 영어의 습격에 머리가 혼미해졌다.

가뜩이나 지금 어떤 상황인지 정확히 파악도 안 되는데!

그나마 판타지 소설을 많이 봐서 맥락으로 남자의 말을 이해하고 있었다.

나는 처음 요한을 따라 이곳에 왔던 기억을 떠올리며 고개를 높이 들었다.

아직 사다리도 가구도 없지만 분명 마족성의 도서관이었다.

‘원래는 그냥 홀이었구나.’

근데 왜 굳이 이 높은 곳에 홀을 둔 거지?

“화 풀어. 응?”

남자의 말에 다시 시선이 내려왔다.

“그대가 꿈에 그리던 동면 수정을 보게 됐잖아. 기뻐하라고.”

그는 또 허락도 없이 내 양어깨를 움켜쥐고 억지로 몸을 뒤로 돌렸다.

나는 그대로 숨을 멈췄다.

눈앞에 거대한 수정이 있었다.

나는 천천히 그 수정을 눈에 담았다.

바닷속에서 헤엄치는 인어처럼 수정 한가운데에서 여자가 부유하고 있다.

시선을 내리자 그녀가 품에 안고 있는 소년이 보였다.

아이는 낮잠을 자는 것처럼 아주 평화로운 표정으로 그녀의 가슴에 뺨을 기대고 있었다.

“마왕 수정은 들고 도망치던데, 왜 이건 두고 갔을까. 인간이라 버린 건가? 수호성은 목숨을 걸고 마왕을 지킨다더니, 정말 오직 마왕만 지키는 건지 블라블라…….”

블라블라 쏼라쏼라.

진짜 저렇게 들렸다.

말 좀 천천히 해, 이 자식아. 외국인 배려해 줘.

남자가 쉴 새 없이 중얼댔지만, 지껄이는 말의 대부분은 알아듣지 못했다.

사계국에 온 요한의 마음이 이랬을까. 알아들을 수 없으니 답답하다.

쩌어억.

그때, 무언가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폐하, 위험합니다.”

책장을 가져왔던 남자들이 앞으로 나서며 그를 보호했다.

폐하?

잠깐, 65년 전의 폐하면…….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남자를 쳐다봤다.

남자는 수정에 시선을 고정한 채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걱정할 것 없다. 내가 한 일이니.”

남자는 보이지 않는 공을 움켜쥐듯, 허공에서 손끝을 말아 쥐었다.

그러자 수정 주변의 공기가 묘하게 일그러졌다.

“윽!”

뜨거운 열기에 살갗이 타는 것 같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몇 걸음 물러섰다.

그러자 상황이 한눈에 담기기 시작했다.

불의 이능.

남자는 불의 이능을 쓰는 인간이었다.

검은 제복을 입은 기사들과 붉은 망토를 휘적이며 쇠사슬을 정리하는 남자들이 수정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마족 지대에서 일주일간 머문 적이 있지만 저런 차림새는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사계국 사람이었다.

불의 이능을 쓰는 것을 보니 저 남자는 겨울국의 황족. 그를 폐하라고 부르며 모시고 있으니 저 남자들은 겨울국의 기사와 마법사들일 것이다.

그리고 65년 전의 겨울국 황제라면, 51년 전 겨울국의 멸망을 이끈 마지막 겨울국 황제였다.

나는 황제가 뱉은 단어들을 머릿속에서 되뇌어 봤다.

스승에 의해 불타 사라질 뻔한 기록.

겨울국 황녀의 일기.

마왕의 왕좌를 건네받을 불을 쓰는 마족.

천천히 짚어 본 정보가 상황을 단숨에 그려 낸다.

나는 다시 뒤돌아 황제를 쳐다봤다.

내 기억이 맞다면, 봄국의 기록자는 모든 기록을 불태우려 했지만 딱 하루 결정을 망설이는 바람에 모든 고서를 도난당했다.

그리고 기록자는 몰랐겠지만, 설정집에 의하면 그는 겨울국의 멸망을 초래할 자료도 보유하고 있었다.

왜 전쟁 전에 기록이 사라졌는데도 겨울국이 멸망한 건가 했더니…….

겨울국 황제 놈이 그의 기록을 모두 가로챈 거였다.

그리고 ‘그대의 스승’이라는 걸 보면, 나는 그 기록자의 제자인 것 같다.

주어진 정보가 많지 않아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내 전생은 봄국의 기록자였나 보다.

스승을 배신하고 겨울국 황제에게 이 기록을 지켜 달라고 부탁한 것 같고.

다만,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책들을 겨울국도 아니고 왜 여기로 옮긴 걸까?

기록은 전 대륙에서 탐내는 보물이었다.

겨울국 황제는 제가 빼돌렸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마족 지대로 가져온 걸까?

저 혼자만 이 정보들을 독식하려고?

그런 생각이 들자 팔에 소름이 돋았다.

겨울국 황제가 마족성을 안전하다고 느꼈다는 소리니까.

여긴 마족 성의 가장 높은 곳.

저 귀한 서적을 여기다 보관한다는 건, 이미 마족성을 함락했다는 뜻이었다.

눈을 내리깐 채 시즌 2의 초기 설정을 가늠하는데, 웃음소리가 들렸다.

황제가 한쪽 눈을 찌푸린 채 제 단발머리를 쓸어 넘기고 있었다.

“데이지.”

아, 이름은 또 왜 전생이랑 현생이랑 같은 거야.

버그 자식 찜찜하게 왜 남의 신상 정보를 전생에 누출하고 그래.

상황이 대충 파악되니 긴장이 풀려 저런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데 황제 놈이 불쑥 고개를 숙여 내 어깨에 입을 맞췄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또 옆으로 한 발짝 물러섰다.

아니, 우리 무슨 사이인데 이래요!

하지만 이번엔 황제가 내 허리를 꽉 잡는 바람에 움직이지 못했다. 그는 내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내게만 들릴 듯 속삭였다.

“오늘 밤에는 못 보는데 이 정도는 참아 줘.”

“……오늘 밤이요?”

전생의 나는 이놈과 밤도 보내는 사이야?

소름이 쫙 돋았다.

황제가 멋쩍게 웃으며 팔을 풀었다.

“말했잖아. 성 함락도 끝났고, 마족을 몰아냈으니 황성에 다녀와야지.”

스크롤이 있는 세상이라 그런가. 황제는 원하면 전시 상황에서도 쉽게 겨울국에 다녀올 수 있는 듯하다.

“내일은 에일린의 생일이라 꼭 가야 하거든.”

“에일린이요?”

그런데 에일린을 입에 담자 옆에 서 있던 겨울국 기사들이 인상을 썼다.

“하하.”

황제는 뭐가 웃긴지 크게 웃었다.

“제국의 황후를 감히 그렇게 부르는 여자는 너뿐일 거야.”

“그분이 황후세요? 폐하의 아내?”

짧은 영어로 물었다.

원래는 너 유부남이냐고 묻고 싶었는데.

내 딱딱한 질문을 오해한 건지 황제가 신음을 흘리며 인상을 썼다.

“데이지, 입궁은 안 된다고 했잖아.”

“……?”

뭐지. 어법 오류인가.

그 여자가 황후냐고 묻는 게, 입궁하고 싶다는 관용어야?

“난 에일린한테 다른 아내를 들이지 않겠다고 약속했어.”

뭐라는 거야.

나만 이 대화의 흐름이 이해가 안 가는 거야?

언어의 벽이 이렇게 높은 거였어?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미간을 찌푸리니 황제는 또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대와 밤을 보내는 건 나도 즐겁지만, 황실에 함께 들어가는 건 안 돼. 에일린이 상처받을 거야.”

“…….”

나는 뭘 마시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벌어졌던 입을 다물었다.

내 전생은 아침 드라마 재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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