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감상이 끝난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남주 시점 전개는 마치 놀이기구를 탄 기분이었다.
물 위를 떠다니는 배에 앉아 인형극을 감상한 기분.
나는 화장대 거울로 보이는 버그를 보며 입을 달싹였다.
“……요한이 마왕의 아들이야?”
“너도 눈치채고 있었잖아.”
버그는 내 머릿속을 열어다 본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녀의 넓은 비단 소매가 내 어깨에 내려앉았다.
“다른 유저들한테도 이래?”
“뭐가?”
“인간 모습으로 나타나서 이런 걸 보여 주냐고.”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한테나 이러지는 않아. 누구나 애착 가는 캐릭터가 하나 있기 마련이잖아. 넌 내 차애거든.”
거울 속에서 버그는 내 어깨를 토닥였다.
나는 찜찜한 기분을 느꼈다. 다른 유저도 이걸 겪었다는 말이 신경 쓰인다.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너무 많은 것 같아서.
나는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질문했다.
“내가 차애면 최애도 있다는 소리네.”
버그는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대답하지 않았다.
“최애는 누구인데?”
그녀는 대답하는 대신 내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톡 눌렀다.
“나는 네 생각을 읽을 수 있어.”
거울 속 버그가 고개를 틀어 내 옆얼굴을 쳐다봤다.
“머리 쓰지 말고 그냥 날 믿어. 나는 네 편이야.”
“이걸 왜 보여 준 거야?”
“보여 주다니.”
버그가 웃었다.
“그건 네 힘으로 얻은 아이템이잖아. 너 스스로 찾아본 거지, 난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그녀는 붉은 소매로 입을 가린 채 웃었다. 그리고 소매를 내리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물론, 널 위해 준비한 게 많긴 하지.”
나는 슬쩍 어깨를 움츠리며 앞으로 의자를 당겼다.
“네가 내 머릿속을 읽을 수 있다니까 하는 말인데.”
나는 버그에게 거리를 두며 거울 속 그녀를 노려봤다.
“나 지금 진짜 무섭거든. 너 무슨 귀신 같고, SF 영화 속 빌런 같고 그래. 진짜 날 아끼면 차애를 위해 사라져 줄래?”
그러나 기껏 거리를 벌린 보람도 없이, 버그가 뒤에서 다시 몸을 붙여 왔다.
“서운해라. 나는 널 위해 선물을 가져왔는데.”
“선물?”
그녀는 대답하는 대신 화장대에 있던 작은 분통을 열었다. 그리고 긴 손가락으로 하얀 가루를 콕 누르며 말했다.
“이 게임이 메이저 요소에 미쳐있는 거 알지?”
“알아. 캐시 보상도 ‘메이저 에피소드’ 획득하면 주잖아.”
버그는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하얀 가루가 묻은 손가락을 들고는 물었다.
“그럼 가장 대중적인 메이저 요소가 뭔지 알아?”
그녀는 손가락으로 원목 화장대 바닥을 찍었다.
하얀 점을 하나씩 찍으며 그녀가 단어를 끊어 말했다.
“회귀, 빙의, 환생. 회빙환이라고 불러.”
“알아.”
로판 독자라 멱살 잡혀 들어온 내가 그걸 모를 리가 있나.
버그는 어두운 바닥에 찍힌 세 개의 하얀 점을 내려다봤다.
그녀는 시선을 세 점에 둔 채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아?”
“뭐가?”
그녀가 하얀 점 하나를 짚으며 말했다.
“#회귀여주나 #회귀물 키워드가 없어도 누구나 ‘30분 회귀권’으로 회귀를 할 수 있고.”
그녀의 손가락이 옆의 점으로 움직였다.
“심지어 유저들 100명 모두 빙의 컨셉으로 #빙의물 키워드를 가지고 있는데…….”
까만 눈동자가 천천히 올라와 거울을 보고 있는 내 눈을 쳐다봤다.
그녀의 손가락이 마지막 점 위로 올라갔다.
“왜 #환생물 키워드는 모두에게 허락되지 않을까?”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부분이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환생.
그러고 보니 별별 글이 다 올라오는 커뮤니티에서도 #환생물에 대한 글은 없었다.
“#환생물 키워드가 아예 없는 건 아니야. #환생여주가 한 명 있긴 하거든. 마왕에게 동면당한 겨울국 황녀가 #환생여주야. 다만, 마왕이 그녀를 기억할 뿐이지, 그 유저의 시나리오에도 환생 서사는 없어.”
“왜?”
생각할수록 이상했다.
#환생여주가 있는데 왜 환생 서사가 없다는 걸까?
내 생각을 읽었는지 버그는 “왜?”라는 질문에 답해 주었다.
그녀는 테이블에 올린 손가락을 쭉 미끄러뜨려 하얀 선을 그었다.
“#회귀는 캐릭터가 지닌 시간선 안에서 움직여. 현재에서 과거로.”
그녀는 미끄러진 손가락을 다시 가져오며, 마치 과거에서 미래로 올라오듯 천천히 말했다.
“그러니 주변 인물을 새로 만들거나 다른 시대의 세계관을 설계할 필요가 없어. 여주의 주변 인물도, 세계관도 그대로니까.”
선의 끝, 현재에 다다른 손가락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녀는 검지 옆에 중지를 붙였다.
“하지만 #환생은 달라.”
그녀는 두 손가락을 미끄러뜨리며 하얀 선을 그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검지와 중지가 벌어졌다.
아까와 달리 하얀 선은 두 개로 쪼개지며 두 개의 선을 그렸다.
“전생과 현생으로 시간이 나뉘니까, 두 개의 시간 선이 필요해.”
그녀는 V자로 쪼개진 선의 끝에서 손가락을 멈췄다.
“주변 인물도 세계관도 달라져. 조선 시대에는 역모로 모함을 당해 여주가 죽었다면, 현대에서는 주가 조작 누명을 써서 구속을 당하는 것처럼 두 개의 서사를 구상해야 해.”
버그가 삐딱한 미소를 지었다.
“유저 한 명을 위해 세계관을 새로 만드는 건 너무 비효율적이잖아? 예산은 한정되어 있는데. 게다가…….”
“게다가?”
그녀의 말에 집중하고 있던 나는 말끝을 늘리는 버그를 따라 되물었다.
그게 웃겼는지 버그가 웃었다.
“전생 서사를 구현할 새로운 시간 선을 만드는 건 불가능해. 시즌 1의 타임라인은 52년밖에 없거든. 아, 이거 비밀이야. 쉿.”
그녀는 검지로 제 입술을 꾹 누르며 당부했다.
52년.
그럼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타임라인이 끝나면 종말하는 거야?”
“아니. 더 이상 종말은 없어. 네가 막았잖아.”
그녀는 칭찬하듯 내 머리를 톡톡 쓰다듬었다.
나는 고개를 기울여 그 손을 털어 냈다.
“운이 좋았지.”
“운이 아니야. 운명이야.”
나는 반사적으로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뭔 저런 오그라드는 단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담냐.
속으로 생각하는데 버그가 한쪽 눈을 찌푸렸다.
“오그라들다니. 네가 요하네스를 선택하도록 내가 얼마나 다양한 설계를 짜 뒀었는데……. 말 섭섭하게 한다, 너.”
“네가 설계한 거라고?”
버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다양한 경우의 수를 고려해서 수많은 시나리오를 짜 놨어.”
“거짓말하네.”
나는 어이가 없어서 헛숨을 흘렸다.
“내가 만약에 경기장에서 요하네스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알렉스를 선택했으면? 그것도 다 생각해 뒀어?”
버그는 반가사유상처럼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설계를 해 둔 모양이었다.
소름이 끼쳐서 나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어떻게?”
“별로 알고 싶지 않을 거야. 네가 좋아할 만한 서사는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알기는 해?”
“응.”
“뭔데?”
그녀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내 어깨에 턱을 묻었다.
“그것보다 내가 널 위해서 준비한 게 더 있는데, 궁금하지 않아?”
그녀의 손등 위로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환생물 키워드를 추가하시겠습니까?]
나는 하얀 글자를 보다 다시 버그를 쳐다봤다.
굳어 있는 내 얼굴과 장난기 가득한 그녀의 얼굴이 동시에 시야에 담겼다.
“내가 #환생물 키워드를 만들어 봤어.”
그녀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널 위해서.”
나는 입을 달싹였다.
“내가 #환생여주라는 거야?”
“이 키워드를 추가하면 그렇게 되는 거지.”
그녀가 눈을 휘며 말했다.
“아니, 잠깐만. 그럼 나는 원래 환생여주가 아닌데 네가 내 환생 서사를 만들었다는 거야?”
“응.”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수줍게 웃으며 덧붙였다.
“난 제작진처럼 스토리텔링에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세계관을 새로 짤 만큼 안목이 좋은 것도 아니야. 사실, 시즌 2의 초기 스토리를 끌어와서 편집한 거라 환생 서사가 길지는 않아.”
그녀는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나를 응시했다.
“그래도 버리긴 아쉬워서.”
거울 너머의 그녀가 손을 들었다.
“내가 널 위해 만든 서사를 한번 완성해 볼래?”
그녀의 손길에 밀려나듯, 거울에 붙어 있던 상태창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환생물 키워드를 추가하시겠습니까?]
“강요하지는 않아, 이대로도 충분하니까.”
그녀는 내게 선택권을 주듯 말했다.
“‘재앙’은 이미 해제됐고, [전] 글자 수도 순조롭게 쌓여 가고 있어. 이대로면 최소 분량도 안정적으로 달성하고 랭킹도 보장받을 거야.”
나는 그녀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필요 없는데 내가 왜 이걸 추가해?”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필요하지는 않지만, 네가 원하던 거니까.”
버그는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환생물 키워드를 추가하면 네가 그렇게 궁금해하던 요한의 과거를 알 수 있잖아.”
“…….”
“왜 널 좋아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던 거 기억 안 나?”
그녀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선택은 네 몫이야.”
처음 게임을 시작했을 때 읽었던 안내문이 떠올랐다.
선택에 따른 데이터를 수집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라는 말이.
버그는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봤는데, 그 시선에서 나는 그녀가 이미 내 선택을 알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망설이다 내 앞에서 반짝이는 상태창으로 손을 뻗었다.
만질 수 없던 기존의 상태창과 달리 이것은 만질 수 있었다.
보드라운 천이 손끝에 감기는 느낌이 묘했다.
접힌 천이 펼쳐지듯 상태창 아래로 또 다른 상태창이 떠올랐다.
[Y/N]
처음 보는 선택지가 눈앞에 있다.
나는 오톨도톨하게 튀어나온 알파벳 버튼에 손을 올렸다. 이건 시스템이 아닌 이 버그가 만든 서사라는 게 피부로 느껴진다.
버그는 미소를 머금은 채 조용히 내 선택을 지켜봤다.
나는 긴장한 손끝에 힘을 주어 Y를 눌렀다. 그러자 상태창이 바뀌었다.
[#환생물 키워드가 추가됩니다.]
[키워드 추가에 따른 전개를 점검합니다.]
[스토리 점검 중…….]
[점검이 완료되었습니다!]
상태창이 떠오르더니 갑자기 방 안이 흐릿하게 뭉개졌다. 마치 화면이 고장 난 것처럼.
당황한 나와 달리 버그는 평온한 얼굴로 웃었다.
“아무래도 좀 불안해서. 타임라인이 52년이라고 말했던 건 기억에서 지울게.”
그녀가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내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무슨 소리냐고 되물으려는데 거울이 사라졌다. 사위가 암흑에 완벽히 삼켜지자 상태창이 다시 떠올랐다.
[65년 전으로 [전] 타임라인을 이동합니다.]
상태창이 모두 사라지며 전구가 터지듯 하얀빛이 시야를 덮쳤다. 나는 신음을 삼키며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