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다시 요한을 응시했다. 미소 지은 부드러운 표정과 달리 눈동자는 설원 위에 놓인 루비처럼 차가웠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요한은 주변에 한기가 이는 걸 느꼈다.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첫 동면에서 깨어난 날, 인간들에게 잡혔습니다.”
파스스.
얼음벽이 조각나며 금이 갔다.
요한은 마왕의 감정이 어떻든 간에, 동요 없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구속구에 결박되어 감금되었습니다. 아버지의 미끼로 절 이용할 생각이었다고 들었습니다.”
밀랍 인형처럼 무표정한 요한의 얼굴이 잠시 풀어졌다.
“그때, 절 도와준 인간이 있습니다.”
맑은 눈동자가 제 주군이자 아버지인 그를 올곧게 응시했다.
한 점 두려움 없이 인간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며 요한이 입을 열었다.
“그녀를 다시 만났습니다. 이번엔 제가 지켜 주고 싶습니다.”
지독한 침묵이 흘렀다.
허공을 부유하던 찬 공기가 땅으로 달라붙는 느낌이다. 묵직한 압박감에도 그들의 표정은 미동조차 없었다.
먼저 소리를 낸 것은 그의 주군이었다.
“인간은 결국 죽는다.”
“알고 있습니다.”
“너는 잊지 못할 거고, 인간은 늘 너를 잊을 것이다.”
“상관없습니다.”
그는 커다란 손으로 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왜 이런 걸 닮아서…….”
요한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거의 백 년 만에 만난 아버지는 제가 했던 말을 잊은 듯했다. 인간의 시간과 마족의 시간이 다름을 처음 알려 준 이는 마왕이었다.
그리고 멋대로 과거를 발설하면 인간은 마족을 괴물로 여기니 조심해야 한다고 조언한 이도 그였다.
작게 한숨을 내쉰 마왕은 소파에서 일어났다.
“일어나거라.”
요한이 일어나자 남자는 문을 지나 계단을 올랐다.
바로 위층에 그의 침실과 같은 침실이 있었다.
침대 위에는 여자가 누워 있다.
그녀도 동면에 들었던 것인지 하얀 시트 위로 눈가루가 지저분하게 놓여 있었다.
마왕이 침대 한편에 걸터앉았다.
요한은 그가 허락하지 않았음에도 벽난로에 불을 켰다. 믿을 수 없었기에 제대로 봐야 했다.
덮쳐 온 불빛이 그녀의 모습을 선명히 드러냈다.
그의 어머니였다.
동면이 끝나던 날, 죽었던 그녀가 잠들어 있다.
고요히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은 그녀가 살아 있음을 알려 주었다.
차츰 마음속에 일었던 동요가 가라앉았다.
‘어머니가 아니다.’
어머니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 인간일 뿐이다.
요한의 시선이 마왕에게로 흘러갔다.
그는 여자의 이마를 어루만지며 검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이번 생을 마지막으로 끊어 내려 했다.”
요한은 그제야 마왕이 왜 사계국을 멸하려 했는지 이해했다.
인간이 모두 죽으면 그녀는 다시 돌아올 수 없었다. 그는 그녀를 더 이상 만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의 끝은 불안한 상상으로 이어졌다.
어쩌면 그도 죽으려 했다는 생각.
“그런데도 또 이렇게 만났고, 동면 후에 이 분노가 가라앉으면…… 그녀와 함께 살다 생을 끝내기로 마음먹었는데, 너를 다시 만났구나.”
그는 입가에 살풋 미소를 머금었다.
“너 또한 이 끔찍한 운명에 계속 끌려다니게 될 거다.”
끔찍하다고 말하는 표정이 왜 행복해 보일까.
침묵에 담긴 요한의 의문을 이해한 듯 그가 비소를 흘렸다.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 한 번은 마음을 얻을지도 모르지. 하나, 대부분의 시간은 너를 끔찍이 혐오할 텐데…… 감당할 수 있겠느냐?”
혼잣말하듯 읊조리는 말이 가볍게 들려온다.
전혀 우울하지도 슬프지도 않다.
오히려 기쁨이 어려 있다. 후회를 담은 내용과 다르게.
요한은 말을 해야 하나 잠시 망설이다 시선을 침대 끝으로 내리며 입을 열었다.
“그녀는 절 혐오하지 않습니다.”
마왕이 피식 웃었다.
“그야 네가 어린아이였으니 인간이 동정심을 가졌던 거겠지.”
잠시 침묵하던 요한이 머뭇거리다 다시 말했다.
“몇 달 전에 그녀를 다시 만났습니다.”
마왕의 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잠시 후 마왕은 애써 다시 웃으며 말했다.
“그래. 네가 마족인 걸 모르니 그러는 거다. 네가 마족인 걸 알면 달라질 테니 말하지 말거라.”
요한은 작게 벌렸던 입을 다물었다.
무거운 침묵이 다시 시작됐다.
마왕이 고개를 획 돌리더니 인상을 썼다.
“네가 누군지 아는데도 혐오하지 않는다고?”
“예.”
“널 기억도 못 하는데?”
요한은 입술을 달싹이다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왕이 벌떡 일어났다.
그는 한달음에 달려와 요한의 멱살을 잡았다.
“감히 내게 거짓말을 하다니.”
짓씹듯 새 나온 분노에도 요한의 표정은 평온했다.
“거짓을 말씀드린 적 없습니다.”
마왕의 눈에 황망함이 스쳤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 것이냐?”
그의 아버지는 그동안 보아 온 모습 중 가장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요한은 어떻게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래서 데이지가 왜 자길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혼란스러워했던 것일까.
요한은 왜 그녀가 자신을 혐오하지 않는지 알 수 없어 마왕의 기대 어린 질문에 답을 줄 수 없었다.
하지만 간절한 눈빛을 모른 척할 수도 없어서 요한은 시선을 피한 채 에둘러 답했다.
“세 번째 생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면 물어보겠습니다.”
“확신하지 마! 세 번째 생은 널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
마왕은 버럭대다가 씩씩대며 손을 내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화가 나는지 그는 침대로 돌아가려다가 다시 돌아와 화를 냈다.
“너랑 나랑 뭐가 다르단 말이냐. 왜 너는 사랑받고 나는 미움부터 받는 거냐고! 왜!”
요한은 왜 아버지가 저렇게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죄송하지만, 왜 화를 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억울하잖아! 나는 수천 년 동안 죽여 버리겠다는 욕만 듣다가 저번 생에 겨우겨우 네 엄마를 만난 건데! 넌 고작 두 번의 생을 마주쳤는데! 두 번이나 사랑을 받아?!”
“……사랑을 받은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면?”
요한은 그가 어떻게 살아 돌아왔는지,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는 묻지 않았으면서 이 질문에 집요하게 구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더 난감한 건 아버지가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은 것 같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마왕의 자괴감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그저 어린 반려 동물을 대하는 마음 같았습니다. 말이 잘 통하지 않아 저를 미숙하게 여겨 동정한 거겠죠.”
그러자 마왕이 발을 쾅 굴렸다.
“내가 개가 되겠다고, 목줄을 채워 달라고 빌어 본 적이 몇 번인 줄 아느냐!”
……알고 싶지 않았다.
요한은 눈을 질끈 감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한숨에 속이 답답해졌다.
그때, 바스락하는 소음이 들렸다.
눈을 뜨니 그가 어머니의 모습을 한 여인을 안고 있는 게 보였다.
“뭘 그렇게 보느냐. 비키거라.”
“어디에 가십니까?”
“일단은 마족 지대로 돌아가야 하니 그녀를 되돌려 놔야 할 것 아니냐.”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요한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슨 뜻인지 가늠해 보는데 그가 쉽게 답을 주었다.
“네가 사계국을 인간에게 돌려주라 청하지 않았느냐. 겨울국 또한 해빙될 것이니 황제가 필요해지겠지. 내 기억이 맞다면 그녀가 겨울국의 마지막 황족이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피식 웃었다.
“그 모자란 놈이 새끼를 쳤다면 또 모르겠지만.”
마왕은 여자를 품에 소중히 안아 들었다.
성이 차츰 무너져 갔다.
정교하게 사라지는 탓에 진동조차 느낄 수 없었다.
1분도 되지 않아 모든 게 사라지고 그들은 설원 위에 서 있었다.
“황성에 재워 두고 돌아가자.”
물론 요한은 그의 명이라면 따를 생각이었으나, 왜 자신까지 데려가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인간은 추위에 약하다. 네 힘으로 방을 데워야 하니 따라 오거라.”
불과 30분 전에는 꽤 감동적인 부자의 재회를 한 것 같았는데, 어느새 자신은 걸어 다니는 벽난로가 되어 있었다.
요한은 가라앉은 눈으로 아버지를 보다 그의 품에 안긴 여자를 보았다.
오랫동안 죄책감을 느끼고 그 몇 배로 그리워했던 얼굴이었다. 요한은 제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느꼈다.
그는 마왕을 따라 가벼운 걸음을 뗐다.
“하하, 그나저나 알요사가 널 눈엣가시로 여기겠구나.”
요한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천 년 동안 제1 수호성 자리를 한 번도 다른 놈들에게 내준 적이 없는데 얼마나 약이 올랐을까. 아, 빨리 그 못생긴 얼굴을 보고 싶구나.”
영생에 가까운 삶을 사는 마왕. 수호성도 마찬가지였다. 마왕과 비슷한 해를 살아온 이가 알요사였다.
그는 힘의 차이로 마왕에게 복종하긴 하나, 그에게 서슴없이 막말하고 대들었다.
특히 재미없는 농담을 할 때면 거친 욕설로 답을 주고는 했다. 권위로 찍어 누르지 말라고, 그래도 웃어 줄 생각 없으니까 직권 남용 좀 작작 하라고.
그러다 가끔 선을 넘을 때가 있었다.
인간을 혐오하는 알요사는 요한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마왕에게도 인간을 성에 들였다고 서슴없이 욕설을 퍼붓던 마족인데 요한에게 다정할 리 없었다.
아버지는 한 번도 살지 않은 요한의 지난 시간을 쉽게 이해한 듯했다.
마족들의 배척.
생존을 위한 싸움.
그 끝에 제1 수호성이 된 지난날.
웃으며 알요사의 낯짝을 보고 싶다고 말하는 걸 보니 그는 이 결과가 퍽 마음에 든 듯하다.
요한은 마음에 무언가 따뜻한 온기가 고이는 걸 느꼈다.
수십 년간 잊고 지냈던 평온함이었다.
눈 결정이 흩날리는 겨울바람 사이로 마왕의 웃음소리가 섞여 들었다.
요한은 심장을 시원하게 긁어내리는 웃음을 들으며 밤하늘에 뜬 별들을 쳐다보았다.
동이 트기 시작한 모양인지 하늘의 끝이 청록빛으로 물들며 밝아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언제 다시 만나러 갈 거냐.”
요한의 푸른 눈동자에 어리던 무언가가 사라졌다. 천천히 내려온 시선이 마왕을 향했다.
마왕이 다시 물었다.
“다시 만나고 싶어서 살려 달라고 청한 거 아니냐.”
“아닙니다.”
“그럼?”
“인간은 인간 속에서 살아야 하니까요.”
요한이 미소를 지으며 그와 그의 품에서 잠든 여인을 눈에 담았다.
“시간이 허락하면 다시 만날 수 있겠죠.”
마왕은 못마땅한 눈으로 요한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
“……인간 여자들은 너 같은 놈을 좋아하는 거냐?”
요한은 대답 대신 작게 웃으며 후드 자락을 썼다. 그는 하얀 천을 깊게 누르며 잠시 하늘에 두었던 시선을 설원으로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