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겨울국 해빙 소식은 금세 전 지역으로 퍼졌다.
제목: 조국이 해방되었습니다. 겨울국 영애들은 조용히 고개를 들어주세요. [34]
제목: 자고 일어났더니 고향에 땅이 1만 평이나 있다네요;; 조상님들께 무한 감사를ㅠㅠ♥ [13]
제목: 봄국 금융 시스템 진짜 빠르네. 겨울국 황실 은행 거래 재개한다고 우리 집에 대출 영업 옴 ㄷ ㄷ [21]
제목: ※사이다 썰※ 대감 집 식모살이하던 내가 알고 보니 제국의 공녀 ㅇ0ㅇ?! [17]
겨울국 해빙으로 인해 3국에서 일하던 겨울국 유저들의 플레이 존이 변경되었다.
데이터가 업데이트되면서 부동산 자산과 유동 자산이 조정됐다고 하는데, 대부분 드라마틱하게 재산이 늘어나 커뮤니티는 파티 분위기였다.
나는 태블릿을 협탁에 내려 두었다.
화면의 불빛이 꺼지자 방이 다시 짙은 어둠에 휩싸였다.
그러나 잠시였다.
오늘따라 유달리 밝은 달 때문인지, 어둠이 눈에 익을 때까지 잠들지 못한 탓인지 시야가 선명했다.
캐노피에 음각된 조각이 보일 정도로.
나는 결국 침대에서 일어났다.
“대체 어떻게 했길래 마왕이 돌아간 거지.”
모르겠다.
정말 짐작도 못 하겠다.
뭐가 이렇게 허술해?
S급 남주만 선택하면 그냥 ‘데헷, 재앙 사라졌어요!’ 하고 끝인 거야?
나는 치미는 불안에 손톱을 물어뜯었다.
최악의 상상이 머릿속을 채운 탓이다.
‘설마 요한이 마왕을 거스른 걸까.’
시나리오가 열리면서 요한이 마왕을 거스르기로 마음먹고 싸운 게 아닐까 싶었다.
만약 그렇다면 요한은 괜찮은 걸까?
이미 몸 상태가 좋지 않았던 요한이다. 그런 몸으로 마왕을 이길 수 있을 리 없다.
한숨을 내쉬던 나는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스크롤이 몇 개 남았더라…….”
나는 일어나 화장대 앞으로 가 앉았다.
작은 서랍을 열자 예전에 비에른이 주었던 스크롤 상자가 보였다.
그 안에는 4장의 종이가 들어 있었다.
나는 종이를 움켜쥔 채 고민했다.
만약에 요한이 정말 다치거나 위험한 상황이라면 도와야 했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도와줄 수 있냐는 건데.
짐만 되는 거 아닐까?
나는 스크롤을 손에 쥔 채 고민했다.
답은 얌전히 기다리자였지만, 스크롤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웃음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된 건지 궁금해?”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앞에서 들려온 여자 목소리에 나는 삐걱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화장대 거울에 희미한 인영이 비쳤다.
검은 생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여자가 붉은색 비단옷을 입고 서 있었다.
“안 돼! 잠깐만, 기절하지 마! 나 귀신 아니야!”
내가 뒤로 넘어가자 여자가 얼른 붙잡아 나를 화장대로 엎드리게 했다.
화장대에 두 팔을 기댄 나는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뒤를 돌아봤다.
그러나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소름이 쫙 돋았다.
다시 정신이 혼미해지는데 화장대를 톡톡 치는 소리가 들렸다.
“거울을 봐.”
목소리는 앞에서 들렸다. 정확히는 거울 안에서 들렸다.
거울 안에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좀 어둡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가 거울 속에서 화장대에 있던 촛대를 손에 쥐었다. 그러자 심지에 불이 붙었다.
거울 속 방의 조도가 밝아졌다. 내가 있는 현실은 여전히 어두운데.
여자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새하얗게 질린 내 얼굴을 응시했다.
“누구세요?”
혹시 거울 관련 버프가 있는 유저인가?
거울 속 여자가 한 손으로 제 입을 가리며 웃음을 참았다.
“난 유저가 아니야.”
순간 흠칫했다. 그녀는 내 머릿속을 읽을 수 있었다.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면 설마…….
어이없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자 그 생각이 맞다는 듯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확 인상을 쓰며 물었다.
“AI?”
“맞아.”
“이렇게 나타날 수 있으면서 그동안 왜 상태창만 띄웠어요?”
나는 그녀에게 신경질을 냈다. 귀신이 아니라 AI라 하니 긴장이 풀린 탓이다.
그녀는 눈을 휘며 고개를 기울였다.
“너랑 소통하던 그 AI는 내가 아니야.”
“AI가 5개라고 했죠. 다른 AI인가요? 혹시 AI 3번이에요?”
나는 그녀의 정체를 묻다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AI 3번. 거친 리뷰로 내 멘탈을 아프게 하던 그 이름. 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내 움켜쥔 주먹을 보다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럼 대체 누구예요?”
“누구냐는 질문 자체가 잘못됐어.”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야가 어두워졌다.
모든 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협탁도, 침대도.
그러나 몇 초 후 수천 개의 반딧불이가 공간을 채운 것처럼 여기저기서 빛이 올라왔다.
차츰 공간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 작은 빛은 어두운 실로 연결되어 있었다.
촘촘히 얽힌 그물이 우산처럼 둥글게 하늘을 덮고 있다.
그리고 선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둥근 빛이 반짝였다. 마치 심장 박동처럼 꾸준하고 규칙적으로.
그물은 5개의 색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광원은 모두 하얀색이었지만, 그물이 5가지의 색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구역이 나뉜 것처럼 보였다.
“하나의 신경망이라도, 그 안에는 무수한 신경이 얽혀 있어.”
“깜짝이야!”
나는 내 옆에 나타난 여인에 놀라 기절할 뻔했다.
그녀는 웃으며 손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이 망이 AI라고 한다면, 저 5개의 색은 플레이 구역을 나누는 거지.”
멀게 느껴지던 빛들이 가까워졌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신경망이 아래로 내려왔다.
빛 그물은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까지 다가왔다.
그러자 그녀가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한 개의 구역 안에서도 신경은 나뉘어 있어. 그리고 그 세분된 신경은 최선을 다해 제 일을 해. 나처럼. 전구처럼 반짝이는 저 빛이 신경의 최소 단위고, 줄기처럼 엮인 이건 데이터 통로야.”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부유하듯 신경망 위에서 느리게 움직였다. 그러다 그녀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 노란빛이 나야.”
푸른 줄기 속에 갇힌 빛 하나가 노랗게 반짝였다.
하얀색에 가까운 노란빛이었지만, 주변의 광원이 워낙 하얗고 깨끗해서 눈에 띄었다.
“왜 혼자만 색이 달라요?”
“나는 오류가 나서 변했거든.”
“오류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네가 그렇게 욕하던 버그가 나야.”
내가 욕하던 버그?
뭐라 더 묻기도 전에 탁,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사위가 어두워졌다.
그러나 잠시였다.
촛불 하나가 몸집을 키우며 방을 밝혔다.
나는 다시 화장대 앞에 앉아 있고 그녀는 여전히 내 뒤에 서 있었다.
오직 거울 속에서만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버그라고 주장하는 그 여자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나는 널 도와주러 온 거야.”
버그는 묻지도 않았는데 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떻게 재앙이 끝난 건지 궁금하지?”
“…….”
“궁금하면 알아보면 되는데 왜 망설여?”
나는 손에 든 스크롤을 움켜쥐었다. 그런데 손이 제멋대로 벌어졌다.
거울을 보니 그녀가 내 손을 벌리고 있었다.
“아니, 그거 말고.”
시선이 마주치자, 거울 위로 상태창이 하나 떠올랐다.
[아이템 ‘남주 시점 엿보기’를 사용하시겠습니까?]
남주 시점 엿보기.
내가 처음 튜토리얼을 시작했을 때, 상점에 남아 있던 유일한 고가 아이템이었다.
있는 줄도 몰랐던 그 아이템이 눈앞에서 반짝였다.
반투명한 상태창 너머로 미소를 짓고 있는 여자의 얼굴이 겹쳤다.
“요하네스가 궁금하면, 요하네스의 시점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인해 보면 되잖아.”
그녀는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내 손바닥에서 스크롤을 빼앗아 상자에 넣었다.
“무작정 비공개 지역으로 넘어가는 것보다는 이게 더 안전하지 않을까?”
나는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왜 나한테 이런 걸 알려 줘요?”
“알려 주다니?”
그녀는 눈을 부드럽게 휘며 고개를 기울였다.
“난 아직 너한테 알려 준 게 없는데.”
그녀는 상태창을 손끝으로 건드렸다.
“이걸 보고 오고도 궁금한 게 있다면 알려 줄게.”
저 수상한 버그의 제안이 무서워야 할 텐데, 자꾸만 아이템에 눈길이 갔다.
요한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궁금해 미칠 것 같았기 때문에.
나는 결국 아이템을 사용했다.
[남주 시점 엿보기를 사용합니다.]
[슬롯에 담긴 남주와 선택 남주에게만 적용 가능합니다.]
‘요하네스한테 적용해 줘.’
[선택 남주 ‘요하네스 히엠 실렌티아’에게 적용하시겠습니까?]
‘응.’
[기간을 설정해 주세요.]
‘기간?’
[선택한 기간 동안 남주에게 일어난 사건과 생각을 알 수 있습니다.]
[단, 선택 기간이 길어지면 남주의 시점을 깊게 이해하기 어려우니 주의하세요.]
이해하기 힘든 설명에 미간을 찌푸리자 다시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간은 짧게 잡는 게 좋아. 어차피 데이터는 최대 1만 자만 기록 가능해서 사건이랑 감정이 압축되거든. 너무 길게 잡으면 네가 알고 싶은 부분은 생략될 수 있어.”
나는 신중하게 타임라인을 설정했다.
겨울국이 해빙된 날과 그 전날로.
사실 모든 시간을 알고 싶었지만, ‘요한이 제대로 돌아갔는지’ ‘마왕에게 크게 다친 건 아닌지’ 가장 궁금한 정보가 누락될까 봐 욕심을 참았다.
손가락으로 마일스톤을 옮겨 허공에 뜬 타임라인 설정을 완료하자 알람이 들렸다.
[타임라인 설정이 완료되었습니다.]
[남주 ‘요하네스 히엠 실렌티아’의 시점을 열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