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햇살의 그림자가 긴 오후였다.
흩날리는 내 머리칼이 눈앞에 그림자를 드리우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푸른 눈동자는 내 눈이 아닌 이마와 뺨, 턱 끝을 쓸다 그림자가 사라질 때쯤 눈을 맞춰 왔다.
시야를 어지럽히는 빛 때문인지 의미를 알 수 없는 시선 때문인지 상태창의 글자가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반짝이던 상태창이 천천히 사라졌다.
그러자 수분을 거두어 가던 바람도 멈췄다.
요한은 모두가 저를 보고 있음에도 신경 쓰지 않고 다시 대기석으로 돌아갔다.
탄식하며 비에른이 말했다.
“이게 예의에 어긋난다는 건 알고 있는 걸까.”
아마 알고 있을 거다.
어설퍼도 사계국의 체계를 존중하려 노력해 왔던 요한이니.
그저 이제 신경 쓰지 않을 뿐이었다.
제 세계로 돌아갈 거니까.
나는 작은 점처럼 멀어지는 그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
요한은 결국 우승했다. 그리고 시상이 끝나자마자 사라졌다.
나는 지하 대기실에서 지상으로 이어지는 계단에서 홀로 걸어 나오는 요한을 쳐다봤다.
요한은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줄 몰랐는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관객들이 한꺼번에 빠져나가고 있는지, 경기장은 시끄러웠다. 사람이 없는 지하까지 그 소리가 들릴 정도로.
나는 고개를 내리고 주머니에서 꺼낸 종이를 건넸다.
“편하게 돌아가요.”
드레스 안에 늘 지니고 다니던 스크롤이었다. 1장은 비에른을 두고 몰래 여기에 오면서 썼다.
요한은 말없이 내가 내민 주황색 종이를 바라봤다.
“받아요. 그리고 상처가 다 나으면…….”
다시 사계국으로 와 달라는 말을 하고 싶은데, 나오지 않았다. 사계국으로 오면 다시 다치게 될까 봐.
애초에 상처가 심한 몸으로 참여했기에 경기가 끝난 후 요한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피에 젖은 옷과 이제는 흉터처럼 굳어 버린 핏자국들을 보니 부탁하려던 마음이 사라졌다.
어쩌면 이미 요한을 선택했기에 부릴 수 있는 여유였다.
요하네스는 내 선택 남주가 되었으니 계속 나와 엮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다시 스크롤을 내밀었다.
“봄국에서 마족 지대까지 걸어가면 오래 걸릴 거예요.”
그러나 요한은 웃음을 흘릴 뿐 스크롤을 받지 않았다.
“[걸어간다고 한 적 없습니다.]”
“그럼요?”
“[저는 데이지와 달리 말을 잘 타거든요.]”
“저도 잘 타요.”
그러나 전혀 신뢰가 안 가는지 요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주었다.
“진짜라니까요? 여기서 보여 줄 수도 없고.”
불만을 표정으로 드러내니 요한의 눈썹이 휘어졌다.
“[보지 못해서 아쉽습니다.]”
갑작스레 나온 쓸쓸한 말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것이 답이 되었는지, 요한은 가볍게 묵례를 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건강히 지내요.]”
요한은 그 인사를 마지막으로 봄국을 떠났다.
***
재앙은 해제되었지만, 세계의 일은 정해진 순서대로 흘러갔다.
마왕 토벌대는 폐회식이 끝나자마자 겨울국으로 떠났고, 나는 비에른과 봄국으로 돌아왔다.
유저들은 안정을 되찾았고, 얼결에 정체가 밝혀진 나는 풍요로운 나날을 보냈다.
“아가씨 이거 보세요!”
침대 헤드에 기대 있던 나는 웬디에게 시선을 틀었다.
그녀는 창가에 쌓아 둔 선물 상자들 위로 새로운 선물을 하나 더 올렸다.
“익명의 신사께서 또 선물을 보내셨어요!”
신사 아니야.
그거 다 여자가 보낸 선물이야.
하지만 상기된 웬디의 뺨을 본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웬디는 내가 잘 꾸미거나 밖에서 귀족들과 잘 어울릴 때면 기뻐했다. 그런 주인을 모시는 게 그들의 커리어에 도움이 되는 모양이다.
기분이 좋은지 웬디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녀의 가벼운 허밍 사이로 안내음이 파고들었다.
[아리아 장미셸로부터 선물이 도착했습니다.]
[‘버프 복사’ 아이템을 인벤토리에 추가하시겠습니까?]
실물 선물을 보내는 영애도 있고, 이렇게 아이템을 보내는 영애들도 있었다.
나는 눈앞에 뜬 상태창을 보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봄 햇살이 내려앉은 정원이 반짝반짝 빛났다.
평화롭기 그지없다.
검투 대회가 끝난 날, 아이템 제한이 다시 해제됐다. 그 이후로 나는 이렇게 종종 얼굴도 모르는 영애들에게 아이템 선물을 받았다.
덕분에 인벤토리가 풍족해졌다.
남주 교환권, 30분 회귀권, 버프 복사, 커뮤니티 연동권 등등 초고가 아이템부터 1캐시 아이템까지 상점처럼 다양하게 갖춰졌다.
게다가 검투 대회 이벤트에서 1등을 한 보상으로 받은 1만 캐시도 있었다.
하지만 의미 없는 보상이었다.
나는 이제 시스템이라면 치가 떨려서 아이템은 쳐다도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시 삐걱거리긴 했지만, 시스템의 악랄한 전개를 같이 이겨 낸 뒤로 공동체는 이전보다 더 돈독해졌다.
내부 결속에는 외부의 적이 최고였다.
그때, 열린 창문을 따라 다소 강한 바람이 들어왔다.
햇살에 달구어진 바람이 머리칼을 스치는 감각에 흠칫했다.
뺨을 간질이는 가벼운 촉감이 그날을 떠올리게 한다.
‘……우울하네.’
어쩌면 나는 남주 없이 [결]을 완성할지도 모른다.
근데, 이거 사기 아닌가?
S급 남주를 비공개 지역에 넣어 두면 어쩌자는 거야?
억지로 게임 난이도를 어렵게 만들려고 했던 건지, 아니면 찾지 못하게 하려는 거였는지 의도를 모르겠다.
후자면 사기인데.
나는 유저들에게 요한이 미공개 지역인 마족 지대 남주라는 말은 하지 않았었다. 지방의 산에서 수련하던 검사라고 했는데 신의 한 수였다.
요한이 마족 지대 남주라는 걸 밝혔으면 다들 뒤집어졌을 거다.
히든 S급 남주가 마족 지대에 있었다는 것도 이상하지만, 더 이상한 게 하나 더 있었다.
요한은 마왕을 어떻게 물리치게 되는 걸까?
요한은 마왕을 이길 수 없다고 했다. 그를 배신할 수도 없고.
대체 그의 시나리오에 무슨 전개가 숨겨져 있는 건지 모르겠다.
골똘히 생각하던 나는 머리가 복잡해져서 이불 속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앗, 아가씨 낮잠 주무시게요?”
“응.”
“커튼 쳐 드릴게요.”
“아냐, 됐어.”
“네. 그럼 필요한 거 있으면 불러 주세요.”
웬디가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불 속에서 혼자 마왕과 요한의 관계를 고심하던 나는 숨이 답답해져 이불을 내렸다.
‘치료는 잘 받고 있으려나.’
그러나 그 또한 답을 알 수 없었다.
길게 한숨을 내쉬는데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아가씨.”
하레네의 목소리였다.
“들어와요.”
허락하기 무섭게 하레네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잠시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왜요?”
하레네는 입꼬리를 잔뜩 올린 채 가슴을 은근히 폈다.
“아가씨께 또 선물이 도착했습니다.”
“아, 저기다 가져다 두세요.”
“아뇨. 실내에 둘 수 없는 선물이라 나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하레네가 고개를 저었다.
뭔데 저래?
나는 순순히 일어나 하레네를 따라나섰다. 건물 밖으로 나온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눈부신 햇살 사이로 하얀 말 한 마리가 투레질하고 있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날렵한 말이었다.
“설마, 내 말이에요?”
놀라 하레네를 보니 그가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데이지 아가씨께 드리려고 준비했다고 하네요.”
“누가요?”
“아, 요하네스 경이 몇 주 전에 선금을 치르고 말 장수에게 부탁했다고 합니다. 아가씨가 탈 만한 말을 구해 달라고요.”
계속 머릿속을 채우고 있던 이름을 귀로 들으니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러나 요한이 단순히 황도 생활에 질려 제 고향으로 돌아간 줄 아는 하레네는 계속해서 그 이름을 쉽게 입에 올렸다.
“말 장수 말로는 요하네스 경이 아가씨가 말을 탈 줄 모르는 걸 걱정했다고 합니다. 직접 알려 드리려 한 것 같은데, 왜 그렇게 빨리 떠났는지 모르겠네요.”
“…….”
그래서 이능 부산물을 팔고도 그런 허름한 곳에서 지낸 건가?
마족 지대에서 기본 스킬이 사라진 탓에 나는 승마를 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그걸 기억하고 사계국에 오자마자 내게 승마를 알려 주려 한 모양이었다.
“온순하면서 건강한 말을 찾는다고 시간이 좀 걸렸다더군요. 어떠세요, 아가씨?”
하레네는 제가 선물받은 것도 아닌데 좋아하며 내게 물었다.
말 장수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하얀 말은 순종적인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다 가만히 제 코끝을 내 어깨에 댔다.
“승마는 제가 알려 드릴 테니, 지금 한번 타 보시겠습니까?”
나는 손바닥으로 보드라운 말의 뺨을 쓰다듬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중에요.”
“예. 그러면 편하실 때 알려 드리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요.”
나는 새하얀 말을 쓰다듬으며 거절했다.
울적해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비에른이 오는 모습이 보였다.
비에른은 상기된 얼굴로 숨 가쁘게 말했다.
“데이지, 방금 황실에서 연락이 왔는데 마왕의 동면지가 사라졌다는구나.”
“동면지가 사라져요?”
비에른은 기쁘게 말하는데 나는 기뻐할 수 없었다.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왕이 깨어난 건가요?”
“글쎄. 깨어난 거 같긴 하다만, 토벌대 말로는 마왕이 마족 지대로 돌아간 것 같다더군.”
그는 파릇파릇한 정원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겨울국이 해빙됐어.”
해빙.
겨울국의 남부는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을 품은 영토였다. 마왕의 저주를 받아 얼어붙었지만, 한때는 3개의 계절을 가진 산맥이었다.
비에른이 말하는 해빙은 그 남부 지역이 제 계절을 찾았다는 뜻이었다.
“이제 더 이상 황실과 엮일 일은 없을 거야.”
그는 은근히 내가 마왕 토벌단에 추가 출병될까 봐 걱정했던 모양이다.
비에른은 환하게 웃으며 내 어깨를 툭툭 다독였다.
나는 그를 따라 웃었지만, 속으로는 웃지 못했다.
겨울국이 해빙됐다는 뜻은 사계국에서 마왕이 사라졌다는 거고, 마왕을 물리치는 건 S급 남주의 시나리오였다.
그건 요한이 마왕을 만났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