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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0 영애-163화 (164/208)

163화.

5합까지는 공격하지 않고, 15합 이내로 승부를 내기로 한 약속.

툭.

교수님은 요한이 느릿하게 손을 움직일 때마다 검을 부지런히 가져다 댔다.

절로 눈이 가늘어진다.

‘진짜 저 남주는 어떻게 결승전에 올라온 거지.’

교수님은 머리가 좋은 A급 지능캐인 거 같은데, 이놈의 시스템은 등급만 높으면 아무래도 좋다는 식으로 남주 서열을 판별한 듯했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요한이 다치지 않고 질 것 같아서.

자존심은 많이 다치겠지만.

신체만 무사하면 됐다.

나는 바닥으로 늘어진 요한의 오른손을 쳐다봤다.

부디 늦지 않게 돌아가서 제대로 치료를 받아야 할 텐데.

툭.

그 순간이었다.

5합이 끝나는 순간, 교수님이 넘어지듯 앞으로 몸을 낮게 숙였다.

촤아악.

그리고 그대로 요한의 오른팔을 베었다.

쾅.

교수님은 바닥으로 철퍼덕 꼬꾸라졌다. 체력의 한계로 넘어진 모양이었다.

“하하하.”

누군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요한의 얇은 옷자락이 넓게 벌어지고 그 안으로 검은 팔뚝이 드러났다.

그리고 피가 흘렀다.

뚝뚝뚝.

검은 팔에서 분수처럼 터져 나온 피가 소나기처럼 손끝을 타고 떨어졌다.

요한은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는 아까와 달리 자세를 바로 했다.

요한은 검을 쥔 채 웅크린 남주를 바라봤다.

상대는 일어나려 부지런히 애를 썼지만, 갑옷의 무게에 짓눌려 버둥댈 뿐 일어나지 못했다.

교수 남주는 머리를 썼다. 지렛대의 힘을 이용하듯 검으로 바닥을 쿡 찌르고 힘주어 눌렀다.

조금씩 몸을 일으키는 남주에게 요한이 다가갔다.

검투 대회는 검을 놓치거나 상대가 항복하면 끝이 났다. 요한은 남주가 지지대 삼은 검을 치워 버리려는 모양이었다.

그는 정말로 제 검으로 남주의 검을 내리쳤다.

그러나 원래대로라면 멀리 날아가야 할 남주의 검은 바닥에 깊게 박혀 날아가지 못했고, 그저 나무를 파헤치며 기울 뿐이었다.

그 바람에 남주가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달라붙듯 무너졌다. 그는 혼비백산하며 손잡이를 세게 움켜쥐었다.

그 반동에 나무에서 뽑힌 검이 튕기듯 포물선을 그리며 날을 위로 세웠다.

“꺄악!”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아슬아슬하게 검이 요한의 옆구리를 스쳤다.

나는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고통에 시선을 내렸다.

주먹을 꽉 쥔 탓에 손톱에 찔린 손바닥에서 피가 났다.

나는 얼른 다시 시선을 들었다.

다행히 요한은 공격을 피했다.

그 덕에 가죽 보호대의 끈이 잘려 바닥에 떨어졌을 뿐 다치지는 않았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비에른도 어이가 없는지 헛숨을 흘렸다. 그러나 여전히 위기감은 없었다.

사고가 있긴 했지만, 우연일 뿐 요한이 이길 거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믿지 않았다.

이건 시스템의 법칙이었다.

이 우스운 우연은 결국 선택된 남주를 승자로 만들 거다.

순식간에 8합이 지났다.

챙.

요한은 15합을 넘으면 패배를 인정하기로 나와 내기했다.

나는 옷자락을 움켜쥔 채 초조하게 경기장을 바라봤다.

7합을 버틸 수 있을까.

요한은 말을 하지 못하니 검을 내리라고 상대를 설득할 수도 없었다. 그는 바닥에 웅크린 상대를 응시하다 천천히 검을 내렸다.

교수님의 손에서 검을 걷어 내려는 듯했다.

“악!”

그러나 자신을 찌른다고 생각한 남주가 비명을 지르며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그 바람에 손목으로 내려가던 요한의 칼날이 남주의 목을 향하게 됐다.

살인은 금지였다.

“꺄아아악!”

환호가 가득하던 이전 경기와 달리 이번 경기는 경악스러운 비명과 고함이 가득 찼다.

요한은 빠르게 제 팔을 거뒀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지 못한 남주는 옆으로 데굴데굴 굴러 도망쳤다.

우당탕탕탕.

옆 나무 기둥으로 떨어진 남주는 운 좋게 한 뼘 높게 솟은 계단식 기둥에 걸려 구르는 것을 멈췄다.

그는 한 칸 높은 기둥을 지지대 삼아 잡고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자세를 갖추었다.

하지만 걷는 것은 무리인지 그대로 선 채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버텼다.

요한은 나름대로 남주를 봐주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마음을 거둔듯하다.

요한은 허공에서 검을 한 번 돌려 제대로 움켜쥐었다. 그리고 낙하하듯 상대 남주의 기둥으로 뛰어 남주의 팔을 내리쳤다.

챙.

날카롭게 마찰하는 철갑옷과 검날 소리에 귀가 아팠다.

하지만 그 누구도 제 귀를 막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챙챙.

엉성하게 뒷걸음질 치던 남주는 중심을 잡으려 팔을 파닥이다 운 좋게 요한의 공격을 모두 막아 냈다.

심지어 한 번은 공격에 성공해 요한의 살갗을 베었다.

차츰 이 상황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말로만 들었을 뿐 직접 시스템의 영향력을 본 건 처음이었다.

제게 일어난 일을 이해하지 못한 요한은 잠시 뒤로 떨어져 상황을 가늠했다.

어느새 그의 하얀 튜닉은 피로 젖어 엉망이 되어 있었다.

반면, 눈앞의 사내는 달달 떨 뿐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

“와아아아악!”

“내리쳐! 끝내 버리자!!”

피를 보고 흥분한 관중이 광기 어린 고함을 쳤다.

“괜찮아. 운은 절대 실력을 이기지 못해.”

비에른이 바짝 굳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위로했지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세계관의 신이 행운을 주기로 마음먹었다면 운은 승리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때, 요한이 다시 남주에게 뛰어갔다.

챙.

남주는 얼른 검을 들어 사선으로 내려온 검격을 받아쳤다.

우지끈.

제 무게로 남주를 누르던 요한이 놀라 뒤로 확 떨어졌다.

요한의 검날에 금이 갔다.

요한은 믿을 수 없는지 인상을 썼다.

갑자기 떨어져 나간 요한 때문에 반동으로 휘청거리던 남주는 중심을 잡으려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 우다다다 앞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그대로 금이 간 검을 보고 있는 요한을 덮쳤다.

“요한! 그만해요! 그만 포기해!”

나는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와아아아아아!”

하지만 거대한 함성과 비명에 뒤덮여 닿지 못했다.

뺨을 잘라 내듯 내리꽂힌 칼날에 요한의 뺨과 목덜미가 붉게 물들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남주를 보다 제 칼날을 다시 움켜쥐었다. 요한이 차가운 눈으로 남주를 보다 그에게 달려들었다.

남주는 빠르고 쉴 새 없이 꽂히는 검을 얼결에 막아 냈고, 미끄러진 공격은 단단한 제 갑옷으로 튕겨 내며 버텼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실수로 남주가 검을 놀릴 때마다 요한은 살갗이 찢기고 살점이 떨어졌다.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만하라고!”

내가 소리를 칠 때마다 기가 막히게 밀려온 함성에 목소리는 파묻혔다.

아무것도 모르는 요한은 이 미친 시스템에게 제 피와 살을 내주며 놀아나고 있었다.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압도적인 힘이었다. 지금도 시스템은 피를 흩뿌리는 요한의 위로 빠르게 시간을 카운팅 하고 있었다.

시스템은 쥐를 가지고 노는 고양이처럼 요한을 제 손에 두고 가지고 놀았다.

“제발 그만해! 검 내려놔!”

나는 누가 보든 말든 마족어 버프까지 켜서 소리를 쳤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내 옆에 앉은 비에른만 움찔했을 뿐 그 누구에게도 들리지 못했다.

“와아아아아아!”

“죽여 버려!”

“하지 마! 그만해!”

유희 가득한 목소리와 그만하라는 걱정 어린 외침이 뒤섞이며 벽을 세웠다.

그때, 요한이 다시 일어났다.

시야가 흐릿했다.

억울함과 분함 그리고 무력감에 눈물이 차올랐다.

챙.

다시 소음이 들렸다.

그리고 역시나 미끄러진 남주의 검날이 요한의 옆구리를 스쳤다.

요한을 죽일 생각이다.

남주가 아니라 이 시스템이.

불현듯 머릿속에 의심이 스쳤다.

온통 썩어들어 가던 요한의 팔과 굳이 그를 결승까지 데려온 시스템의 짓이 해석됐다.

‘……내가 알렉스를 선택하길 바라서 요한을 사계국에서 없애려는 걸까?’

그때, 1열에 앉아 있던 알렉스가 고개를 뒤로 돌려 나를 쳐다봤다.

그는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아니, 아니면 내가 요한의 죽음을 막도록 선택을 강요하는 걸까?’

신중히 생각하겠다고 마음먹은 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잔인한 시스템은 내게 다시 선택을 강요했다.

온몸이 덜덜 떨렸다. 하얗게 핏기가 가신 손을 어찌하지 못하며 나는 튀어 나가 경기장 난간에 매달린 채 외쳤다.

제발 그만하라고.

15합이 지났으니 약속을 지키라고.

대체 내가 어떤 선택을 하길 바라는 걸까.

요한의 죽음을 방치하고 알렉스를 선택하길 원하는 걸까. 아니면 요한의 죽음을 막아 그를 선택하길 바라는 걸까.

식은땀이 났다.

이마를 적신 땀과 뺨을 타고 흐른 땀방울이 턱 끝으로 고여 떨어졌다.

나는 그 불쾌한 감각을 느끼면서도 닦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꽉 맞잡은 손을 풀 수가 없었다.

전신을 휘감은 불안과 공포 속에서 나는 요한과 선택 남주의 싸움을 계속 눈에 담았다.

그때,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선택 남주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제 앞에 서 있던 요한에게 달려들었다. 눈도 뜨지 않은 채로.

검날은 요한의 몸통을 향했다.

남주는 죽일 생각이 없을지 모르지만, 과연 그의 실력으로 죽이지 않고 요한의 검날만 쳐낼 수 있을까.

방금 힘줄을 베인 요한은 손에 힘을 주어 검을 다시 잡으려다 검을 놓칠 뻔했다.

나는 더 이상 생각을 이어 갈 수 없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며 모든 소음을 제 심박으로 뭉개 버렸다.

‘요한! 요한을 남주로 선택해 주세요!’

[‘요하네스 히엠 실렌티아’를 남주로 선택하시겠습니까?]

다급한 나와 달리 여유로운 AI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챙.

요한의 가슴 앞에서 검격이 막혔다. 그리고 요한의 검날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남주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최선을 다해 힘을 쏟고 있었다.

미쳤어.

저러다 검이 완전히 부러지면, 그대로 칼날이 가슴을 파고들지도 모른다.

“미친놈아!! 하지 마!!”

나는 욕을 하며 떨어질 듯 난간에 매달렸다. 하지만 막 승부를 앞둔 장면에 광분한 함성의 벽을 뚫지 못했다.

쩌적, 검날 조각이 또 떨어졌다.

나는 두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소리를 질렀다.

“선택! 선택해 줘! 선택한다고!”

육성인지 마음의 소리인지 터져 나온 결심이 오직 내 고막을 울렸다.

[‘요하네스 히엠 실렌티아’가 남주로 선택됐습니다.]

차분한 기계음이 고막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 온화한 소리를 비웃듯 날카로운 파열음이 들려왔다.

챙!

신호처럼 검날이 부딪히는 소리가 침묵을 끌고 왔다.

“하아, 하아.”

바들바들 떨리는 내 숨소리가 시끄럽게 들릴 정도였다.

적막이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나는 떨리는 손을 내리고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서 희미한 상태창이 빛나고, 그 검은 상자 아래로 남주와 요한이 보였다.

멀리 날아간 검이 바닥에 박혀 있고, 남주는 뒤로 나동그라진 채 양손을 제 가슴에 붙이고 있었다.

그리고 요한은…….

그는 반으로 잘린 제 검을 남주의 목에 대고 있었다.

뿌우.

경기가 끝났음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에 함성이 밀려왔다.

“와아아아아아!”

그러나 앞의 두 경기보다도 그 소리가 작게 느껴졌다.

그럴 수밖에.

나를 포함한 수십 명이 넋을 놓고 있었다.

10    13 : 15 : 38 : 27

시계가 멈췄다.

결승이 끝난 것처럼 팡파르 소리가 들려오고, 하늘에서는 꽃가루가 떨어졌다.

내게만 보이는 건 아닌지 반대편 자리에 앉은 유저가 멍한 얼굴로 손을 뻗어 그 꽃가루를 잡았다.

[전체 공지]

새로운 상태창이 하나 더 떠올랐다.

[축하합니다! S급 남주 시나리오가 오픈되었습니다!]

[재앙 ‘마왕의 기상’이 해제됩니다.]

“꺄아아악!”

가쁜 숨소리와 돌고래처럼 새된 비명이 들려왔다.

재앙이 해제되었다.

나는 공지 창을 보다 경기장으로 시선을 내렸다.

어느새 우승자 호명이 끝났는지 요한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대기석으로 돌아가지 않고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 이상한 행동에 경기장은 다시 고요해졌다.

요한이 아무렇지 않게 황족의 영역인 1열로 올라왔기 때문이다.

나는 숨을 죽인 채 내 앞으로 다가온 요한을 내려다봤다.

난간을 사이에 둔 채 요한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한쪽 눈썹을 가만히 내려 눈을 좁히더니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러나 핏물이 진득하게 엉킨 손가락은 내 머리칼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사아아아.

갑자기 불어온 서늘한 바람에 나는 눈을 깜빡였다.

무슨 상황인지 알 것 같아서.

땀이 말라 가는 시원한 감각을 따라 차츰 현실감이 돌아왔다.

나는 천천히 시선을 내려 요한에게 겹쳐진 상태창을 바라봤다.

믿을 수 없는 문장이 눈에 담겼다.

[남주 ‘요하네스 히엠 실렌티아’의 등급은 S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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