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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0 영애-162화 (163/208)

162화.

나는 다시 경기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름국 검사가 제 세검을 칼집에 넣고 있었다.

다시 여름국 유저를 쳐다보니 여름국 영애는 손을 내리고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도 2열에 앉아 있는 걸 보니, 저 여름국 검사를 선택한 유저인 듯하다.

동양 남주는 쾌활한 미소를 지으며 제 앞의 상대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을국 검사는 씁쓸히 웃으며 그 손을 잡았다.

그야말로 훈훈한 마무리였다.

“1조 토너먼트 승자는 여름국 카시아스가의 아담 베리타스입니다.”

뜨거워진 열기와 달리 연회 관리자는 차분한 목소리로 경기의 결과를 알렸다.

“요하네스는 3조였지?”

비에른이 기대감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경기장을 정돈하는 동안 쉬는 시간이 주어졌다.

‘차라리 빨리 끝나 버렸으면.’

두 번째 경기는 그런 내 바람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빠르게 끝났다.

선택 남주라는 치트키로 운 좋게 올라온 건지, 달달 떨던 미소년 남주는 거대한 풍채를 가진 남주에게 속절없이 밀려났다.

어찌어찌 3합을 버티긴 했지만.

챙!

미소년 남주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제 얼굴을 보호하려 손을 들었다. 그 반동에 칼이 허공을 팽글팽글 돌며 날아갔다.

“와아아아.”

두 번째 경기의 승패가 결정되자 또 환호가 밀려왔다.

하지만 아까보다 확연히 소리가 적었다.

두 번째 경기라서 그럴 수도 있고, 싱겁게 끝나서 그럴 수도 있다.

나는 바짝 긴장한 채 대기석을 보았다.

이제 요한이 나올 차례였다.

두 번째 경기를 마친 기사들이 돌아가고, 다시 경기장이 재정비됐다.

관리자들이 휠을 열심히 돌려 나무 지형을 새로 세팅하는 사이, 두 기사가 나왔다.

“와아아아!”

기대감 어린 함성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먼 거리임에도 요한은 바로 눈에 띄었다.

다른 검사들은 대기하는 동안 무기를 점검하거나 몸을 풀던데 요한은 입구의 벽에 기댄 채 가만히 있었다.

혼자 다른 세상으로 분리된 것처럼.

그런데 갑자기 태풍처럼 여인들의 숨소리가 크게 밀려왔다.

뭐야?

나는 여인들의 시선이 고정된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그리고 그들이 놀란 이유를 깨달았다.

그들의 시선 끝에는 황족의 자리가 있었다. 경기 시작을 앞둔 알렉스가 일어나 텅 빈 1열을 걷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불안하게도 알렉스는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돌발행동인지, 유저뿐 아니라 캐릭터들도 놀란 표정이었다.

아니. 유저들은 놀랐다기보다는 흥미 어린 시선으로 알렉스를 쳐다봤다.

알렉스를 모르는 유저는 거의 없었다. 그는 히든 S급 남주 투표에서 1등을 차지한 남주였으니까.

나는 시선을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구름처럼 하얀 숫자는 여전히 빠르게 차감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S급 남주 후보 1위가 움직이니 다들 그가 어디로 가는지 주목할 만했다.

‘아니, 근데…….’

너 왜 이쪽으로 와?

오지 마, 오지 말라고!

나는 속으로 그의 접근을 거부하며 알렉스의 시선을 피했다.

‘S급 남주 관람권’을 획득한 익명의 영애로 남고 싶었는데, 강제로 신상을 공개하게 생겼다.

나는 침착하게 손에 들고 있던 쌍안경을 팔걸이에 두고 비에른의 팔을 당겼다.

“오라버니, 저 자리 좀 바꿔 주세요.”

그러나 비에른이 입을 열기도 전에 거대한 그림자가 덮쳐 왔다.

“괜찮으면, 이것 좀 치워 주지 그래.”

어느새 2열로 훌쩍 올라온 알렉스가 옆에 서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알렉스를 보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제국의 작은 태양, 생명과 풍요의 가을의 선물. 존귀하신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왜 이래. 하던 대로 해.”

의미 없지만 혼신을 다해 거리감을 조성해 봤다.

부디 영애들이 눈치채지 못하길 바라며. 그러나 예상했듯 부질없는 짓이었다.

황태자는 피식 웃으며 내 쌍안경을 치우고 팔걸이에 걸터앉았다.

아주 친근하게.

나는 바닥으로 시선을 내린 채, 알렉스의 뒤에 숨기 위해 등받이에 몸을 바짝 붙였다.

그때, 심해 바닥을 기어가듯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가을국의 작은 태양 알렉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전하, 이 자리는 이에테르가를 위해 마련된 자리입니다.”

비에른의 목소리였다.

역시 가족이 최고다.

비에른은 그에게 선을 그으며 간 크게도 축객령을 내렸다.

나는 마음이 평온해지는 걸 느끼며 다시 시선을 들었다.

북해처럼 차가운 눈으로 제국의 황태자를 노려보는 비에른이 보였다. 그리고 가을볕처럼 밝은 미소를 짓고 있는 황태자도.

그렇다.

알렉스는 타격감이 없었다.

그는 오히려 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비에른에게 답했다.

“데이지 양이 머무는 호텔로 가거나, 내 성으로 부르려 했는데…….”

그는 말꼬리를 늘리다 덧붙였다.

“그러면 데이지 양과 이에테르 공작에게 실례일 것 같더군. 그래서 모두가 보는 지금 말을 전하려 했던 건데 내 생각이 짧았나 봐. 나중에 따로 보는 게 낫겠어.”

그간 알렉스가 날 찾아왔다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떠올렸는지 비에른의 턱 근육이 움찔했다.

알렉스가 일어나려는 제스처를 취하자 비에른이 말했다.

“아니요. 지금 대화를 나누고 가십시오.”

비에른은 고작해야 10분 남짓인 쉬는 시간에 황태자를 만나는 게 낫다고 판단했는지 시선을 경기장으로 틀고 침묵했다.

알렉스가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 간지러운 소리는 아주 잠시 이어졌을 뿐이다.

곧 진지한 목소리가 웃음을 가렸다.

“결국, 폐하를 따라갔다더군.”

폐하를 따라가?

아아, 내 수집품들 보여 준 걸 말하나 보네.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의 명을 거절할 수는 없으니까요.”

알렉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 청은 잘 거절하잖아.”

“……그야, 전하는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하시잖아요.”

예를 들면 귀족 영애한테 마왕 동면지를 탐색하러 가자고 한다든지.

더 대답하지 않자 알렉스가 짧게 웃음을 흘리다 다시 말을 이었다.

“폐하가 뭐라고 하셨던 간에 한 귀로 흘려.”

황제를 말하는지 황후를 말하는지 알 수 없다.

어느 쪽이든 이 자리에서 꺼낼 수 없는 얘기였다. 듣는 이가 많다. 보는 이도 많고.

이번에도 대답할 수 없으니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알렉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일 폐회식이 끝나면, 바로 출병을 할 거야.”

나도 모르게 번쩍 고개가 들렸다. 그 바람에 입매를 비스듬히 기운 알렉스와 바로 눈이 마주쳤다.

“엘런의 청혼을 고려하고 있다면서.”

갑자기 그 얘기가 왜 나온 건지 모르겠다.

출병 다음에 나온 엘런의 얘기에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뿌우.

그때,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가 들렸다.

알렉스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떠나기 전에 그대로 상체를 기울여 내 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승낙할 생각 하지 마.”

웃음 가득하던 얼굴과 달리 차가운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그는 천천히 얼굴을 떼어 내며 내 코앞에서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숨이 닿는 그 거리에서 알렉스가 내리깐 시선을 천천히 들어 올려 눈을 맞춰 왔다.

“다 끝나면 내가 널 데려갈 거니까.”

내게만 들릴 작은 소리였다.

늘 생글거리던 알렉스답지 않게 그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분명 조금 덥다 싶을 정도로 따뜻한 날씨인데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는데도 온몸이 꽁꽁 묶인 기분.

나는 얼어붙은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 순간의 표정이 마음에 든 걸까. 알렉스가 짙은 눈웃음을 한 번 짓고는 자세를 바로 폈다.

그는 인사도 없이 고개를 숙여 내 손등에 입을 맞추고는 돌아갔다.

당황한 나와 달리 알렉스는 빠르게 표정 관리를 했다.

심지어 자리로 돌아가서는 금세 조각상처럼 흔들림 없는 자세를 갖추었다.

나는 한 프레임에 담기는 석상 같은 황족들을 보며 새삼 깨달았다.

#피폐남주를 구원하는 #햇살여주들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알렉스 곁으로 보이는 사패 황제와 비극 황후.

저 어두운 굴로 들어가 자외선으로 알렉스의 불운과 불행 서사를 소독해 준다는 건 엄청난 대의였다.

그걸 내가 해야 할지 모른다 생각하니 정신이 아찔해졌다.

뿌우.

다시 한번 뿔피리 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신호라도 되듯 거센 바람이 밀려온다.

사아아아.

건조한 바람이 경기장 안으로 고이더니 얇은 장막처럼 모래가 시야를 가렸다.

나는 그제야 황족에게서 시선을 떼고 경기장을 쳐다보았다.

순간 흠칫했다.

분명 눈이 마주친 것 같았는데, 요한이 고개를 빠르게 틀었다.

와르르르.

그러나 정말 눈이 마주친 건지 의심할 시간이 없었다.

바로 경기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쿠구구구궁.

모래가 꺼진 바닥에서 나무 기둥이 마구 솟아올랐다.

탁.

요한은 높은 기둥에 발을 디딘 채 상대를 응시했다.

그의 앞에 있던 기둥이 하늘을 찌를 듯 더 높이 올라갔다.

그 그늘에 파묻힌 요한은 저보다 높은 곳에 안착한 봄국 검사를 올려다보았다.

요한은 갑옷이라 말하기도 민망한 값싼 가죽 보호대를 차고 있었다.

팔과 복부만 겨우 가린 모습.

비에른이 헛기침하며 말했다.

“갑옷과 검을 주었는데도 거부하더라고.”

나는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틀어 비에른을 쳐다봤다.

그는 조금 민망한 듯 살짝 한쪽 눈을 찌푸린 채 덧붙였다.

“신경 쓰지 않은 게 아니야.”

비에른의 눈에도 요한의 차림은 말이 안 되는 듯하다.

그치만 비에른이 준비해 준 옷을 거절한 건 요한다운 행동이었다.

요한은 혹한 속에서도 방어는커녕 방한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 마물을 사냥하면서도 로브와 장갑, 가면 정도만 찼으니까.

그래도 위험 마물의 숨통을 손쉽게 끊었고.

‘같잖다는 건가.’

아포칼립스 남주의 허세에 왜 내 심장이 쪼그라드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요한의 상대를 다시 본 순간 불안함이 사그라들었다.

철그덕.

봄국 황실 아카데미 교수님이 무거운 몸을 이끌고 넓은 나무 기둥 위를 걷고 계셨다.

대체 누가 그에게 저런 철갑옷을 입힌 걸까.

가느다란 체형으로는 감당하기 버거울 텐데 그는 투구부터 부츠까지 철제 방어구로 풀착장을 하고 있었다.

철그덕. 철그덕.

그는 극기 훈련을 하듯 달달 떨며 발을 힘겹게 내디뎠다.

저러다 체력 부족으로 실격할 것 같다.

사람 생각은 다 같은 건지, 모두가 안쓰러운 눈으로 그를 보며 침묵했다.

그때, 2열 관람석에서 어떤 여자가 소리를 질렀다.

“교수님 화이팅! 이기면 결혼해요!”

그녀는 방방 뛰며 양손에 쥔 손수건을 흔들었다.

그 안에는 그를 응원하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황실 아카데미의 백합! 아르노의 매력에 질식할 준비 됐습니까?!’

응원 문구를 보니 전에 커뮤니티에서 봤던 글이 떠올랐다.

황실 아카데미의 한 떨기 백합, 뇌가 섹시한 교수님을 주야장천 찬양하던 그 글.

저 영애는 짝사랑하던 교수님을 기어이 남주로 선택한 모양이다.

그런데 그녀의 사랑이 좀 이상했다.

교단에 있던 남주를 모래밭으로 끌어 내리다니…….

남주의 직업의식을 존중하지 않는 #아카데미물 #사제지간 여주의 모습에 절로 한탄이 나왔다.

냉철한 카리스마를 뽐내기로 유명했던 교수님은 검이 손에 익지 않으신지 장검을 들고 팔을 덜덜 떠셨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흐린 눈을 했다.

‘혹시 일부러 괴롭히는 건가.’

저 교수님이 영애의 학점을 엉망으로 주기라도 한 건가?

신나서 팔짝팔짝 뛰는 영애를 보면 또 그건 아닌 것 같다.

순순한 호의로 괴롭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시선을 거두었다.

그러자 바로 요한이 눈에 들어왔다.

요한의 눈에 진한 탈력감이 느껴졌다.

“…….”

학생 영애를 욕할 게 아니었다.

마족 제1 수호성을 여리여리한 교수님과 붙게 만든 내가 제일 나쁜 사람인 것 같았다.

그리고 더 가슴 아픈 건 요한이 저 남주에게 지게 된다는 사실이다.

나 같아도 자존심 상할 거 같아.

‘미안해요, 요한.’

죄책감을 주체할 수 없어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사뿐히 튀어 오른 요한이 교수님이 선 기둥의 끝에 걸터 섰다. 그는 힘겹게 움직이는 교수님을 보며 가만히 있었다.

요한은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듯 잠시 상대를 바라보다 검을 들어 툭 그의 검날에 맞대었다.

화들짝 놀라 교수님이 손에 힘을 주셨다.

툭.

어린아이가 손바닥을 맞대는 장난을 치듯 검이 얌전하게 맞닿았다.

툭.

툭.

긴장감 없는 검투의 시작이었다.

“……뭐 하는 거지?”

비에른이 의아한 듯 혼잣말을 했다.

요한은 싸우기 전 최소 합인 5합을 채우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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