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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0 영애-161화 (162/208)

161화.

탁.

온 신경이 밖에 집중되어 있던 탓에, 문이 닫히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하지만 나는 먼저 나가는 요한을 잡지 못했다.

‘……괜찮아. 뭐 어때.’

어차피 결승 진출자는 경기 전에 신체검사를 받고, 대기 구역에서 따로 머무르니 입장 시간이 달랐다.

따로 가도 상관은 없었다.

‘그래도 한 가문에서 참가하는 거니 같이 가는 게 일반적이긴 하지만…….’

요한의 선택을 존중하자.

명목상 주군인 비에른도 불편할 텐데, 떠나 달라고 한 나까지 함께 이동하는 건 끔찍하겠지.

화장대 거울을 보던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얕은 바람에 가느다란 하얀 꽃잎이 살랑였다.

연회에 가는 것도 아닌데, 나는 치장을 하고 있다.

가을국 검투 대회는 귀족과 평민 모두 입장이 가능하지만 자리는 엄격히 구분됐다.

1열은 황족의 자리로 황족 자리 외에는 공석으로 남았으며, 2열부터는 귀족이 앉을 수 있었다.

그리고 2층부터는 평민이 앉았다.

귀족은 서열에 따라 한 칸씩 뒤로 밀려나 앉는데, 예외가 있었다.

결승 진출자의 가문은 신분에 상관없이 가장 앞 열에 앉았다.

유구한 공작 인플레이션이 존재하는 세계. 3국이 함께하는 축제니 원래대로라면 공작가라도 3열쯤에 앉을 가능성이 컸지만, 결승 진출자를 배출한 가문으로 이에테르가는 1열에 자리를 배정받았다.

그러니 치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황족들 다음으로 관중에게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야 하니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비에른의 명령이자 부탁이었다.

리안 영애한테 드레스 안 받았으면 어쩔 뻔했어.

나는 어깨를 드러낸 드레스 라인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안심했다.

의상으로 미감과 교양을 드러내는 귀족들 사이에서 욕을 먹을 뻔했다.

내가 욕먹는 건 상관없지만, 가문 덕후 비에른이 망신당하는 건 다른 얘기였다.

“역시 본 셰밍은 최고예요.”

머리에 붉은 리본을 달아 주던 웬디가 나지막이 감탄했다.

“이렇게 예쁜 옷을 소화하는 우리 아가씨는 더 최고시고요.”

웬디는 사람의 자존감을 올려 주는 타입이었다.

순수한 얼굴에 어린 웃음을 보고 있으니 울적한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고마워.”

“아니에요. 아가씨를 모실 수 있어서 제가 감사한걸요.”

웬디는 오늘 내 모습이 마음에 든 듯했다.

저렇게 웃는 거 오랜만에 보네.

이게 그렇게 좋아할 일인가?

앞으로 잘 씻고, 잘 꾸미고 다녀야겠다.

나는 씁쓸하게 자기반성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텔을 나온 나는 비에른과 마차를 타고 섬을 건넜다.

경기장이 보일 때쯤 마차가 멈춰 섰다.

도착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어마어마한 줄 때문이었다.

연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인파를 보며 나는 차창에 툭 이마를 기댔다. 그리고 기다리는 동안 황제가 친히 만들었다는 거대한 경기장을 눈에 담았다.

이걸 한 사람이 만들었다니.

알렉스도 황제와 비슷한 이능을 가졌으니 그도 이런 힘을 지녔을 거다.

알렉스가 S급이었던 걸까?

단순하게 가장 직급이 높고 이능이 강한 남주를 골랐어야 했나.

무거운 숨이 폐부 아래로 가라앉는다. 나는 답답한 감각을 외면하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시스템은 마왕을 이길 수 있는 인간은 없다고 했잖아.

힘이 절대적인 척도는 아닐 수도 있어.

대체 마왕은 얼마나 강한 걸까. 이토록 강한 사람들이 이길 수 없는 존재라니.

마왕을 없애고 싶어 하지만, 마왕을 이길 수 없는 알렉스.

마왕의 약점인 불의 이능을 지녔지만, 마왕을 배신할 수 없는 요한.

선택지가 좁혀졌는데도 명쾌한 답은 보이지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새 우리는 입장하게 됐다.

나는 연회 관리자가 안내한 자리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넓은 나무 의자에 푹신한 벨벳 쿠션이 놓여 있고, 앞에는 신선한 과일과 포도주가 놓인 테이블도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뒤쪽 자리를 쳐다봤다.

1층의 귀족 자리는 다 이런 식이었다. 그리고 2층부터는 일반 관람석처럼 의자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신분 차별은 어디에나 있구나.

비에른은 이런 대접이 익숙한지 자리에 크게 감흥이 없어 보였다.

나도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에 앉았다.

칸막이벽이 세워진 이에테르가의 관람석은 딱 비에른과 나의 자리만 있었다.

지정석이니 황제가 가문의 참석 인원에 따라 공간을 조정한 듯하다.

나는 자리에 앉아 테이블에 있던 안내서를 읽었다.

식순과 경기 방식을 적은 간결한 안내서였다.

경기는 토너먼트 방식으로 운영됐다.

8명의 검사가 토너먼트로 4번, 2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1번 대결을 한다.

그렇게 최종 우승자가 결정됐다.

각 경기 시간은 20분.

그 순간을 구경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모였다. 오래 지나지 않아 관람객이 모두 착석했다.

웅성웅성.

경기장은 소란스러웠다.

그저 일상적인 대화를 하는 걸 텐데, 그 작은 소리가 모이니 귀가 터질 것처럼 시끄럽게 느껴졌다.

“이렇게 많은 구경꾼이 모인 건 처음이네.”

비에른의 목소리가 소음을 누르며 고막으로 들어왔다.

나는 모래 냄새가 이는 경기장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돌렸다.

“전 대륙에서 구경꾼이 몰려왔나 봐.”

그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지금 이 오후 하늘처럼 그의 푸른 눈동자가 맑게 빛난다.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팔랑.

비에른은 다시 안내서로 시선을 내리고는 흐뭇하게 웃었다.

안내서에는 결승 진출 가문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적혀 있었는데, 말이 소개지 거의 찬양이었다.

비에른은 그 낯간지러운 말이 어지간히 뿌듯했나 보다.

역시 가문 덕후.

반면 나는 요한의 상대 이름을 보고 씁쓸함을 삼켰다.

그는 봄국 황실 아카데미의 교수였다.

평생 검 한번 잡아 본 적 없는 지식인이자, #병약미 키워드가 있는 남주. S급 남주 순위에서 23위를 차지했던 노아 장 아르노였다.

그가 이곳에 온 이유는 하나다.

‘남네다’ 법칙의 수혜자.

어떡하지. 누가 봐도 약해 보이는 사람한테 지면 요한이 충격받을 텐데.

가뜩이나 제 실력에 자신감이 넘치는 요한이라 자존심에 상처를 입을까 봐 걱정됐다.

반면 비에른은 요한의 상대가 만족스러운 듯했다.

“준결승은 따 놓은 당상이군.”

호리호리하고 연약한 안경 미남 교수님. 비에른은 그가 운으로 올라왔다고 믿었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죠.”

“아니, 이건 모를 수가 없는 일이야.”

그는 피식 웃으며 내 말을 무시했다. 나는 비에른의 흥을 깨지 않도록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그래. 몇 분이라도 좋아하게 두자.

그때, 쇠뿔 나팔 소리가 울렸다.

뿌우.

검투 대회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

모래벌판 위로 신년제를 주최한 가을국 연회 관리자들이 나왔다.

그들은 참석한 전 대륙의 제국민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는 검투 대회를 안내했다.

안내가 끝나자 그들은 결연한 얼굴로 이쪽을 쳐다봤다.

정확하게는 첫 줄에 앉은 세 제국의 황제들을 바라봤다.

그들은 곡선으로 휘어지듯 부드럽게 허리를 숙였다.

그러나 심장 위로 올라간 손과 허리 뒤로 뻗은 손에서 묘한 절도가 느껴졌다.

“올 한 해도 제국의 안녕과 번영을 이끌어 주실 황제 폐하께 존경을 담아 인사드립니다.”

모두가 그 말에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몸을 움직이는 자연스러운 소음이 지나가자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수천 명의 자리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거대한 원형 경기장.

광활한 장소를 메운 침묵은 그 어떠한 포효보다도 청자를 압박했다.

이내 황족의 자리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침묵을 갈랐다.

“사계국의 평화를 위해.”

여름국 황제, 디아나의 목소리였다.

“제국민의 일상을 위해.”

봄국 황제가 이어 말했다.

이것은 사계국의 인사를 끝맺는 황제의 허락인 듯했다.

올해 신년제를 주관하고 가장 나이가 많은 가을국 황제의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이어졌다.

“오늘의 평화와 일상을 선물한 역사를 위해, 황실은 목숨을 바칠 것이다.”

가을국 황제와 나누었던 차분하고 담담한 대화가 떠오른다.

전혀 같은 사람이라 생각할 수 없는 힘 있는 목소리. 진심처럼 들려 신뢰감이 든다.

그에 화답하듯 구름처럼 뭉근하게 뭉쳐진 대중의 소리가 사방에서 밀려왔다.

“나의 계절에 생을 맡깁니다.”

이런 공식 행사가 처음이라 나는 따라 답하지 못하고 흐름을 놓쳤다.

기분 탓일까.

그 말이 끝나자 경기장에 미세하게 일던 모래 바람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자리에 앉자 연회 관리자가 경기의 시작을 알렸다.

드르륵.

그가 이름을 읊기 무섭게 경기장에 놓인 두 개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각각의 문에서 검사가 나왔다.

“와아아아아악!”

경기장이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거센 함성이 쏟아졌다.

이내 양분화된 목소리가 두 검사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대부분 여름국과 가을국 사람들의 목소리였다.

유독 사이가 안 좋은 나라라 그런지 관람객들조차 함성으로 제 조국의 검사를 응원하며 싸웠다.

“여름국과 가을국 검사의 결투라. 누가 대진표를 짰는지 몰라도 뭘 좀 아는 인간이군.”

비에른은 과열된 분위기가 마음에 드는지 웃으며 제 앞에 놓인 포도주를 한 모금 마셨다.

그저 첫 경기의 검사가 등장했을 뿐인데 경기장이 후끈 달아올랐다.

자극적인 요소는 이게 끝이 아니었다.

두 검사가 중앙을 향해 열 걸음 정도 걸었을 때, 갑자기 땅이 진동했다.

와르르르.

바닥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모래가 모두 빠져나가는 소리였다.

한차례 모래바람이 일고 나자 진짜 무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울퉁불퉁하게 솟은 나무 기둥들이 마치 산지처럼 높낮이를 달리하고 있었다.

검사들은 결승 진출자답게 당황하지 않고 나무 위로 안착해 차분히 지형을 파악했다.

그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어렸다.

그때, 1열에 선 가을국 신하들이 바닥에 꽂힌 철제 휠을 돌렸다.

콰르르르.

나무 기둥들이 불규칙하게 오르락내리락하며 지형을 계속 바꾸기 시작했다.

경기장은 아주 위험했다.

바짝 붙은 나무 기둥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짓이겨지고, 아래에서 올라온 두툼한 나무 기둥이 이동하는 검사를 밀어 버리기도 했다.

결승전 무대가 현란하다는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이건 현란하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아슬아슬하고 잔인했다.

탁.

몸을 날린 여름국 검사가 높은 기둥에 안착했다. 가을국 검사에게 달려들 기회를 포착하던 그는 옆에서 불쑥 솟아난 기둥에 손이 끼일 뻔했다.

다행히 여름국 검사는 바로 몸을 틀어 다른 기둥으로 옮겨 갔다.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손가락이 절단될 뻔했다.

경악한 나와 달리 관중들은 즐거워 보였다.

남네다 법칙으로 학습된 안전 불감증 탓이다.

나는 주먹을 말아 쥔 채 안절부절못했다.

물론 요한도 뛰어난 무인이긴 하지만, 그는 남네다 법칙을 받는 남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데이지, 왜 그래?”

“별거 아니에요. 경기장이 조금 위험해 보여서요.”

비에른은 나를 보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 네가 보기엔 조금 과격할 수도 있겠군. 하지만, 이런 경기에서 다치는 검사는 없으니 걱정 말아라.”

그는 정말 근심 한 톨 없는 표정으로 여상히 말했다.

그리고 비에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여름국 검사와 가을국 검사는 가볍게 몸을 날리며 대부분의 시간을 허공에서 맞붙었다.

그들에게 움직이는 바닥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챙.

푹 꺼진 경기장에서 검날이 날카롭게 부딪히는 소리가 올라왔다.

높이 뛰어오른 검사들이 1합을 나누고 다시 다른 기둥으로 옮겨 붙었다.

경기는 계속 이어졌다.

추격하고 피하고, 검을 맞추다 상대를 찌르고. 누구 하나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진짜 전투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남주들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저 옷만 너덜너덜해졌을 뿐.

채앵.

그 순간 맑은 파열음이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쉴 새 없이 고막을 긁던 쇳소리는 그게 마지막이었다.

넓은 나무 기둥 위로 떨어진 두 검사가 드디어 결판을 냈다.

바닥으로 날아간 제 검을 황망히 쳐다보는 가을국 검사.

그리고 그런 가을국 검사의 목으로 벼려진 칼날을 들이미는 여름국 검사.

가을국 검사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왼손을 높게 들었다.

항복의 수신호.

여름국 검사의 승리였다.

“꺄아아아악!”

나는 갑작스레 들려온 여자의 비명에 놀라 고개를 틀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동양 미녀가 두 손으로 황급히 제 입을 막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녀의 손목에 워치가 감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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