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14. 재선택
160화.
똑똑똑똑.
똑똑.
똑똑똑.
누군가 계속 문을 두드렸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자 새벽빛이 스민 천장이 보였다.
차츰 어젯밤의 기억이 돌아왔다.
검게 물든 요한의 팔을 보고 충격받았었고.
아샤에게 진료를 부탁했고.
깨어난 요한에게 마족 지대로 돌아가 달라고 했고, 요한은 돌아가겠다고 약속해 주었다.
그리고 침대에 같이 누웠고…….
잠이 든 나를 요한이 방으로 옮겨 둔 모양이다.
언제 잠든 거지.
두 손으로 미간을 누르는데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똑.
나는 일어나 문을 열었다. 그런데 의외의 사람이 문 앞에 있었다.
시에나였다.
팔짱을 낀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대뜸 이상한 말을 했다.
“엘런은 S급 남주가 아니에요.”
“네?”
놀란 나와 달리 시에나는 평온한 목소리로 계속 제 말을 이었다.
“성녀 영애한테 얼른 예언 공지하라고 하세요. 어차피 전체 공지로 예언이 오픈되거든요.”
시에나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한 시간쯤 뒤면 시스템이 하늘에 숫자를 띄우고 카운트다운을 시작할 거예요.”
몽롱한 정신이 날카로워진다.
시에나가 늘어놓는 황당한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혹시 회귀하셨어요?”
나는 곧 내 물음의 모순에 직면했다.
“아이템 사용은 막혔잖아요.”
시에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누구나 비밀은 있는 거죠.”
그녀는 내 어깨를 가볍게 톡톡 쳤다.
“영애만 입이 무거운 건 아니랍니다.”
시에나는 엘리베이터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다급히 그녀의 팔을 잡았다.
“엘런이 S급 남주가 아닌 건 어떻게 아셨어요?”
“데이지가 엘런을 선택했는데 A급이었다고 엉엉 울어서 알게 됐어요.”
미래의 나는 엘런을 선택한 모양이었다.
“……저, 저희 정말 동면하게 되나요?”
“그건 모르겠어요. 영애는 지금으로부터 이틀 뒤에 엘런을 선택했고, 나는 밤에 영애를 위로해 주다가 버프를 쓴 거라.”
“버프요?”
시에나가 손으로 제 입을 꾹 누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떼며 웃었다.
“비밀이에요. 특히 아리나한테는 말하면 안 돼요.”
나는 눈을 깜빡였다.
갑작스러운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왜, 왜 저한테 버프를 쓰신 거예요?”
시에나는 피식 웃었다.
“나는 결과가 바뀌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영애는 바뀔 수 있다고 믿으니까요.”
고맙다고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시에나가 살짝 눈을 찌푸렸다.
“너무 먼 과거를 바꾸면 다른 사람들한테 나비 효과가 생길 거 같고, 그러다 과거가 바뀌면 예측하기 더 어려울 거 같아서 적당하게 회귀했어요. 이 시점이 딱, 흐름이 잘못된 지점 같아서.”
그녀는 피곤한지 기지개를 켜며 덧붙였다.
“일단 저는 좀 자야겠어요. 좀 있다가 점심이나 같이 먹어요. 그때 궁금한 거 물어보면 알려 줄게요.”
시에나는 장난치듯 가볍게 툴툴거렸다.
“영애 때문에 오페라 못 봐서 밥 먹고 바로 이틀 뒤 공연장으로 타임워프 할 거니까, 질문 확실하게 정리해서 가져와요.”
한 발짝 물러난 그녀는 손을 흔들고는 복도를 걸어갔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지는 시에나를 보다 문틀을 잡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결국, 난 엘런을 선택했고.
‘……틀렸어.’
그래도 다행이야. 일단 엘런이 S급 남주가 아니라는 건 알게 됐잖아.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나는 알렉스를 떠올렸다.
그럼 알렉스가 남주였던 걸까.
‘아니, 그것보다…….’
서늘한 생각이 머릿속을 파고든다.
시에나는 내가 이틀 후에 선택을 하고 실패했다고 말했다.
16일이나 남았는데 왜 그렇게 선택을 서두른 거지?
시에나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아이시스한테 예언을 공유하라고 한 그 조언이.
그녀는 우리가 숨긴 비밀을 시스템이 폭로한다고 덧붙였다.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겠지만, 유저들이 무언가 오해를 하게 되는 모양이었다. 나는 떠밀려서 급하게 선택을 서두른 거 같고.
쾅.
나는 바로 문을 닫고 침대로 달려갔다.
그리고 노트북을 꺼내 아이시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제목: 성녀 영애 예언 진짜였어 ㄷㄷ 하늘 봐 시계 뜸 ㄷㄷ [0]
제목: 그럼 진짜 종말이 온다는 거야? [1]
제목: 현생에서 같이 플랫폼 고소할 영애? 내가 총대 맴 ㅇㅇ 들어와 [14]
제목: *S급 남주 투표* 알렉스 VS 익명 남주 [76]
『성녀 영애 말대로라면 S급 남주 후보를 본 영애가 있고, 알렉스랑 익명의 남주가 후보라는 거잖아?
우리 집단 지성을 모아 투표해보자! 16일이면 우린 찐남주를 찾을 수 있다! +ㅁ+
목숨을 건 투표, 지금 시작합니다(확성기 이모티콘)
알렉스 1
익명의 남주 2』
┗ 내 남주면 무섭지만 남의 남주라면 닥 111. 황태자 잘생기고 돈 많은데… 여주가 좀 고생하겠지만 고생해도 맛있을 거 같아 보고시포 ㅇㅅㅇ
┗ 윗댓 영애 이 와중에 제정신 아니네;; 우리 목숨 걸렸어 입맛 버리고 현명하게 투표해!
┗ 나는 222 평민에 혼자 산에서 살던 남주면 50년 동안 S급 못 찾은 거 설명 되잖아! 갑자기 나타난 재야의 평민? 미친 이건 무조건 #힘숨찐이다
┗ ㄴㄴㄴ 알렉스는 원작이 초히트 스테디셀러잖아 S급 남주 시나리오가 랭킹 1위라는 거 보면 알렉스 빼박 플랫폼 취향~ 자본주의 시대에 매출 보장된 원작? 투표할 필요도 없이 프리패스지
┗ 근데 산속이면 평범한 플레이존은 아니잖아…… 그냥 버그 아니야? 나 버그에 20억 걸기 싫은데 ㅠㅠ
┗ 아 이거 진짜 골때리네 ㅠㅠㅠㅠㅠㅠ 나도 돌겠는데 S급 남주 관람권 받은 영애 불쌍하다 ㅠㅠ 진짜 얼마나 머리 터질까 ㅠㅠㅠ
┗토닥토닥 영애 이거 보면 넘 스트레스받지 말고 단거 많이 먹고 천천히 고르자 ㅠ.ㅠ
┗ 맞아 ㅠㅠㅠㅠ 힘내!! 우리도 잘 고민해볼게 ㅠ0ㅠ
┗ (+중간평가) 지금까지 알렉스 22명 익명남주 14명인데 계속 업뎃하면서 토론하쟈!
┗ 아 중간 평가…. PTSD 오네;;; 시스템 새끼 때문에 이제 중간고사도 못 보겠어 ㅜㅜㅜ
┗ 아씨 난 영애 때문에 PTSD옴; 왜 로판에서 중간고사를 언급해여!!! (빼액)
S급 남주가 이미 누군가의 슬롯에 있다는 걸 들어서 그런지, 사람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대체 이틀 뒤의 나는 왜 겁을 먹고 선택을 서두른 걸까?
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불안함을 몰아내려 애썼다.
한숨을 내쉰 나는 창밖을 쳐다봤다.
15 15 : 14 : 25 : 48
아직 남주를 선택하지 않은 유저의 수와 남은 시간이 하늘에서 반짝였다.
그사이 2명의 유저가 선택을 했다.
무슨 마음인지 알 것 같았다.
이대로 게임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선택을 부추긴 게 아닐까.
나는 빠르게 뛰는 심장 위에 손을 올리고 진정하려 노력했다.
솔직히 무서웠다.
내가 50%의 확률을 뚫고 제대로 고를 수 있을지.
그러나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신중하게 잘, 선택해 보는 것 외에는.
천천히 잘 골라 보자.
***
“[…….]”
“왜 그렇게 봐요?”
창가에 서 있던 요한이 날 물끄러미 쳐다봤다.
시에나에게 들은 미래는 내게 많은 도움이 되었는데 그중 하나는 쓸데없는 걱정이 사라졌다는 거였다.
요한이 이틀 후에 깨어나고, 아침에 말도 없이 사라진다는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는 그게 무슨 소리인가 했다.
하지만 정말로 요한은 이틀간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
만약 미래를 알지 못했다면 불안했겠지만, 나는 그가 아샤 덕분에 깨어날 걸 알았다.
나는 차가운 시선으로 요한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요한과 내 발 사이에는 햇빛이 사선으로 얇게 내려앉았다. 반쯤 걷힌 커튼 틈으로 오전 햇살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요한은 지금 홀로 검투장에 가려다가 나한테 걸렸다.
나는 요한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커튼을 마저 걷었다.
촤악.
상쾌한 가을 하늘 아래 드러난 넓은 황도. 요한의 시선이 창밖으로 움직인다.
그의 시선은 정직하게도 황도 한가운데를 응시했다.
나무로 만들어진 원형 경기장.
툭.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증서를 유리창에 붙여 요한의 시선을 가로막았다.
그제야 푸른 시선이 내게로 흘러왔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이거 찾고 있었죠?”
요한은 부정하지 않았다.
‘진짜였네……?’
배신감에 울컥했다.
지난 이틀 동안 나는 아샤 영애의 도움을 받으며 정성껏 요한을 치료했다.
요한이 일어나게 된다는 미래를 알면서도 이따금 불안했다.
판타지 세계관 최고의 영약, 엘릭서. 그 엘릭서를 두 통이나 들이부었는데도 바로 눈을 뜨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일어나자마자 검투 대회를 나 몰래 나갔다니.
어떻게 요한이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믿어 왔던 남주라 배신감은 배가됐다.
혹시 몰라 결승전 진출 증서를 숨겨 둔 보람이 있다.
저 차분한 태도를 보니 정말로 미련 없이 떠나려 했던 모양이다.
나는 잠시 일었던 배신감을 내려 두고 요한의 팔을 걷었다.
“얼마나 나았는지 보고, 돌려줄게요.”
조심스럽게 그의 손목에 감긴 붕대를 풀었다.
그러나 멀쩡히 서 있는 것과 달리 팔은 아직도 새까맸다.
“안 되겠어요. 검투 대회 결승전은 지형이 변해서 위험하다고 들었어요. 한 손으로 검을 쓰는 것과는 전혀 다른…….”
“[데이지.]”
요한의 부름에 고개가 올라갔다.
그러자 긴 은빛 속눈썹이 다물렸다 벌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그 사이로 드러난 푸른 눈동자가 어둡다.
“[저는 그대의 마음을 존중합니다.]”
요한은 내 손에 쥐어져 있던 증서를 천천히 제 손으로 거둬 갔다.
달라진 눈빛이 이제야 보이기 시작했다.
요한은 이틀간 잠들어 있었다. 많은 일이 있던 나와 달리, 그에게는 지금 이 아침이 그 밤의 바로 다음 날이었다.
내가 마족 지대로 돌아가 달라고 부탁했고, 요한은 대회가 끝나면 돌아간다고 약속했던 그 새벽.
그 밤이 끝난 새로운 아침.
증서가 빠져나간 손안이 허전했다. 나는 괜히 손을 몇 번 쥐었다 피며 내렸다.
요한은 침묵하다 다시 부탁했다.
“[데이지도 제 마음을 존중해 주시겠습니까?]”
“마음이요?”
그는 표정 없는 낯으로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친절하지 마십시오. 제게는 그게 독이 됩니다.]”
그 차가운 모습이 낯설어 나는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요한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내게서 시선을 거두고 옷을 개켜 둔 곳으로 가 제 셔츠를 벗었다.
요한은 마치 내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제 할 일을 했다.
돌아가 달라고 한 건 나인데, 냉정한 태도에 당황하는 건 무슨 심보일까.
나는 그런 내가 부끄러워서 외면하듯 그대로 방에서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