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OP 100 영애-159화 (160/208)

159화.

엘런은 S급 남주가 아니었다.

“청혼을 받아들인다는 말인 거지? 잠깐만, 지금 우는 거야?”

“…….”

“그래, 기쁠 만하지. 나도 그러니까. 맹세해, 그대가 이 선택을 후회할 일은 없을 거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할게.”

엘런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귓가에서 흩어졌다.

나는 초점이 흐려진 눈으로 다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9    13 : 12 : 38 : 27

유저의 숫자가 하나 사라졌을 뿐, 시계는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엘런은 S급 남주가 아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그러자 엘런이 반사적으로 나를 잡아 일으켰다.

“괜찮아?”

걱정 가득한 목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들어 엘런을 보다 입을 뗐다.

“공작님.”

엘런은 말하라는 듯 눈썹을 살짝 들었다.

나는 눈가를 닦아 내고 웃었다.

그리고 떨리는 숨을 삼키며 부탁했다.

“저 좀 호텔에 데려다주실래요?”

그는 바로 제 마차에 나를 태웠다. 어차피 황도에 가는 길이었다며, 호텔에 먼저 내려 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평소보다 한 톤 높아진 엘런의 목소리를 들으며 타임워프를 했다.

***

눈을 뜨니 호텔 입구였다.

마차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기에 뒤를 돌았다. 엘런의 마차가 멀어지고 있었다.

거리가 한적하다.

호텔 앞에서 서성이는 유저도 없고, 강변 너머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어느새 하늘도 새까맣게 변해 버렸다.

그러나 그 위로 자리한 숫자는 여전했다.

9    13 : 09 : 01 : 25

부정적인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워 제대로 된 생각이 되지 않았다.

나는 요한을 구하지 못했고, 재앙을 막지도 못했다.

나는 호텔 안으로 걸음을 옮기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괜찮을 거야.’

그러나 다리에 힘이 풀려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주저앉았다.

부정하고 억지로 의미 없는 생각의 꼬리를 잡아 봐도, 현실은 차갑게 나를 옭아맸다.

내가 다 망쳤다는 현실.

기회를 날려 버렸다.

“데이지?”

익숙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흐린 시야로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시에나였다.

“왜 여기서 울고 있어요?”

시에나는 나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무릎을 굽히며 물었다.

그녀는 작은 손가방을 열어 손수건을 꺼내더니 내 눈가를 닦아 주었다.

공연을 보러 가던 길인지 그녀의 가방 안에 담긴 티켓과 부채가 보였다.

이 상황에도 태연한 모습이 시에나다워서 헛웃음이 나왔다.

S급 남주 관람권을 쓴 날, 나는 시에나에게 남주가 누군지 공유하려 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거부했다. 시스템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그녀가 손수건으로 닦아 준 보람도 없이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나는 시에나의 손을 조심스럽게 치우며 말했다.

“죄송해요.”

“뭐가요?”

아무것도 모르는 시에나가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물었다.

“제가 다 망친 것 같아요.”

나는 다시 눈물이 터져 고개를 숙였다. 머리 위로 한숨 소리가 들렸다. 시에나가 가방을 닫으며 물었다.

“방에 올라가서 얘기할까요?”

***

따뜻한 차가 테이블 위로 놓였다.

눈치를 보던 웬디가 방을 나가고, 시에나와 나만이 적막한 거실에 남았다.

“3년 차 영애들이 좀 짓궂기는 하죠.”

웬디가 나가자마자 시에나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3년 차쯤 되면 플레이가 익숙해져서 권태감을 느끼고 다른 데 눈을 돌리게 돼요. 열정을 쏟을 대상이 필요한지 남의 전개에 기웃거리는데, 참 타이밍이 안 좋았네요. 하필 3년 차 영애들이 가장 많을 때, 영애한테 이런 일이 생겨서.”

시에나는 태연한 얼굴로 차를 마셨고, 나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하늘의 숫자를 읽었다.

9    13 : 08 : 31 : 21

사라지는 시간이 주는 압박감에 심장이 뛰었다. 그러나 내 앞에 앉은 유저는 평소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아무런 감흥 없이 그녀는 다시 찻잔을 들었다. 소리도 내지 않고 우아하게 차를 한 모금 마신 시에나가 소서에 잔을 내려 두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다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 않으세요?”

“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섭지 않으세요? 죽을 수도 있다는데.”

시에나는 피식 웃으며 그제야 시선을 들어 나를 쳐다봤다.

“게임에서 죽는 거지 진짜 죽는 것도 아니잖아요.”

맑은 연보랏빛 눈동자에는 일말의 두려움도 없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이상했어요. [결]을 클리어 하면 20억을 준다는데 그렇게 쉽게 [결]을 주는 게 수상하잖아요.”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면 다들 너무 부정적이라고 해서 2년 차부터는 입을 다물고 현재를 즐겼어요.”

“처음부터 게임을 포기하신 거예요?”

“아뇨. 이놈들이 하는 소리를 믿지 않았다는 뜻이죠.”

시에나는 빙긋 웃었다.

“게임 자체는 너무 재밌었어요. 솔직히 현생에서 20억 받아도 여기서 사치 부린 것만큼 살긴 힘들걸요? 언제 이런 호사를 누리겠어요.”

그녀는 정말로 아무런 미련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그녀의 눈에는 짙은 만족감이 담겨 있었다.

“이제 끝이 왔구나 싶어요. 이놈들이 원하는 데이터는 다 뽑았나 보죠.”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 수는 없잖아요. 다시 현생으로 돌아가야죠. 영애는 돌아가기 싫어요?”

돌아가기 싫은가?

생각해 보지 않았다.

누군가 억지로 끝을 내니 관성처럼 무섭고 두려웠을 뿐, 게임이 끝난 후를 생각해 보지 않았다.

나는 입을 달싹이다 반항하듯 말했다.

“하지만…… 아플걸요. 고통은 그대로 다 느껴져요.”

“아, 그건 생각 안 해 봤네요. 동면 전에 미리 로그아웃 할까.”

시에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미간을 구기다 뒤를 돌아 하늘을 쳐다봤다.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까, 좀 더 놀다가 끄죠.”

“제가…… 제대로 했으면 다 같이 [결]을 완성했을지도 몰라요. 하다못해 동면이 일어나는 일은 없었을 텐데…….”

평온한 시에나의 모습에 잠시 묻어 두었던 죄책감이 다시 밀려와 죽음을 생각하게 했다.

부은 눈두덩이 사이로 물이 흘렀다. 예민해진 점막이 쓰라릴 정도로 뜨거웠다.

나는 태연하지 못했다.

시에나처럼 다른 사람의 감정까지 헤아려 줄 수 없었다.

이렇게 좋은 사람의 결말까지 망쳐 버렸다는 생각에 죄책감이 들었다.

방법을 찾을 능력도 없고, 위로를 받고 있는 주제에 괴로웠다.

나 때문에 비난받던 아이시스나, 내 이름을 말하지 않고 기다려 주던 다른 사람들에게도 부끄러웠다.

행운이라 생각했던 아이템이 족쇄처럼 느껴졌다.

내가 아닌 다른 유저가 그 세 명의 남주를 만났다면 분명 모두가 행복해질 결말을 만들었을 텐데.

나는 이따위 말들을 주절주절 떠들며 울었다.

시에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했을지도 모르지만 들리지 않았다.

고막을 도려 낸 듯 짙은 침묵만이 감돌았다. 그 적막이 숨 막혀 나는 소매로 얼굴을 대충 닦아 내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찻잔을 내려다보고 있는 시에나의 모습이 보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미소를 짓던 시에나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나는 억지로 웃으며 분위기를 바꾸려 다른 말을 했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공연도 놓치시고…….”

“영애는 계속 플레이를 해 온 거고, 그건 다들 같아요. 이건 영애의 잘못이 아니에요.”

시에나는 내 말을 자르며 고개를 들었다.

“재앙을 만든 게임이 잘못한 거지, 영애가 재앙을 일으킨 건 아니잖아요.”

그녀는 나를 똑바로 응시한 채 다시 말했다.

“다들 좋아하는 남주를 고르는데, 영애만 이런 고민을 하게 된 걸…… 나는 마음 아프게 생각해요. 심지어 자기가 잘못했다고 죄책감을 느끼는 것도요.”

“제가 잘못한 게 맞으니까요. 마음 아파하실 필요 없으세요.”

시에나가 실소하며 물었다.

“대체 영애가 뭘 잘못했어요?”

시에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는 사실 이대로 모두 미완결을 내는 게 큰일인지 모르겠어요. 애초에 [결]이라는 게 준비됐었는지도 의심스럽고요. 50년간 플레이를 했는데 그동안 한 명도 [결]을 치지 못한 게 이상하지 않아요?”

시에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몇 초 후 다시 물었다.

“데이지가 어떤 선택을 해도 우리가 원하는 [결]은 오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에요. 그래도 영애 탓 같아요?”

그녀는 내 대답을 원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선택을 잘했으면 적어도 아프지 않게 끝났을 거예요.”

소파가 눌리는 소리가 들렸다.

등받이에 몸을 깊게 기댄 시에나가 한쪽 볼을 부풀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생각에 빠진 듯했다.

얼마 뒤 그녀가 입을 열었다.

“비밀을 공유하지 않은 건 잘못이 아니에요.”

그녀는 관자놀이 근처를 손가락으로 누르며 천천히 말했다.

“S급 남주가 누군지 알고 있다고 해서 그걸 미리 말하지 않은 게 잘못은 아니죠. 이기적인 것도 아니고요. 물론 여기 영애들이 좋은 사람인 건 알지만, 그 사실을 알면 데이지한테 어떻게 나왔을지 모르는 거고…….”

“…….”

“그리고 누구나 비밀은 있어요. 다른 영애들도 털어놓지 않은 치트키나 버그 경험이 있을걸요?”

시에나는 몸을 일으키더니 내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그녀가 내게 눈을 맞추며 물었다.

“때로는 아이템과 버프가 비슷한 거 알아요?”

그녀는 목소리를 줄여 속삭이듯 말했다.

“30분 회귀권은 과거로 돌아가서 30분만 있다 돌아오지만, 회귀 버프는 과거로 돌아가서 계속 살아야 한대요. 딱 한 번밖에 쓰지 못하고요.”

시에나는 한쪽 입꼬리를 높이 들어 올렸다.

“그래서 저는 평생 버프를 쓸 일이 없을 줄 알았어요. 영애들이랑 보내는 시간이 좋았거든요. 과거로 가면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거 같아서 싫었어요. 아!”

그녀가 한쪽 눈을 찌푸렸다.

“아리나한테는 비밀이에요. 계속 남주 바꾸고 싶다고 우는데도 말 안 했었잖아요.”

위로였다.

그녀는 내가 S급 남주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숨긴 걸, 자신의 비밀과 비교하며 달래 주었다.

마음은 따뜻했지만, 위로가 되지 않았다.

시에나의 비밀은 재앙을 버려두지 않았으니까.

미안하지만, 이런 위로는 오히려 해가 된다. 나약해진 틈을 비집고 들어온 자책감에 눈물이 다시 뚝뚝 떨어졌다.

나는 또 우는 내가 한심해서 고개를 숙였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시에나가 책상을 톡톡 치며 말했다.

“데이지, 날 봐요.”

고개를 들자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시에나가 보였다.

“다시 선택하고 싶어요?”

“…….”

“제대로 선택하면 바뀔 것 같아요?”

다정한 목소리에 눈물이 말랐다.

차츰 시야가 선명해졌다.

시에나는 한숨을 쉬고는 웃었다.

그녀는 내 표정에서 답을 얻은 사람처럼, 그녀의 결정을 말했다.

“그럼 내가 영애의 선택을 바꿔 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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