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OP 100 영애-158화 (159/208)

158화.

웬디의 말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나는 일어나 건넛방으로 달려갔다. 방은 정말로 텅 비어 있었다. 심지어 소지품과 옷도 없었다.

나는 요한의 방을 전부 돌아봤지만, 요한이 남긴 쪽지나 메시지를 찾지 못했다.

거실 창가를 지나치던 나는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

얇은 빛이 바닥에 길게 늘어져 있다.

고개를 드니 한 뼘 정도 벌어진 커튼 틈이 보였다.

나는 요한이 푹 잘 수 있도록 커튼을 꼼꼼히 닫아 두었다. 이 천을 건드렸을 사람은 요한뿐이었다.

나는 창가로 다가갔다.

커튼 틈으로 황성과 그 앞에 자리한 임시 원형 경기장이 보였다.

경기장을 점검하는 중인지 바닥에서 굵은 나무 기둥이 마구 솟았다가 사라지고, 벽에서 뻗어 나온 가지가 수풀을 만들었다 물러나길 반복했다.

요한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것 같았다.

“아가씨 어쩌죠? 기사님 많이 아프시잖아요. 그 몸으로 대체 어딜 가신 건지.”

“경기장에 갔나 봐.”

“예? 설마요!”

웬디가 경악하며 내 뒤로 바짝 다가왔다.

그녀는 경기장을 보며 흠칫했다.

“어, 어쩌죠? 공작님께 말씀드려야 할까요?”

요한은 내게도 비에른에게도 언질 없이 홀로 먼저 갔다.

그만큼 몸이 안 좋았을 거다.

우리가 반대할 걸 알았단 소리니까.

생각은 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나는 치장을 해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호텔을 나갔다.

그러나 다급히 나온 보람도 없이 입구에 서 있던 수많은 여자에게 붙잡혔다.

“영애, 어디 가요? 검투 대회 가는 거 아니죠?”

“가면 안 돼요! 알렉스 말고 지금 엘런한테 가요. 우리가 마차도 빌려놨어요.”

“알렉스가 영애 부탁 때문에 1열에 한 자리 더 만들었는데 약속은 지켜야죠.”

“근데 영애 이러고 갈 건 아니죠?”

“아아, 물론 영애의 미모가 아름답지만, 그래도 사계국 사람들이 몰리는 자리인데 조금만 치장을 할까요?”

쉴 새 없이 고막에 박혀 오는 소리에 머리가 아팠다.

“여기 언제부터 계셨어요? 혹시 은발에 푸른 눈동자 가진 남자 못 보셨어요?”

“봤어요! 저쪽으로 갔어요!”

한 영애가 역시나 황성 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쪽으로 가려 하자 다시 길이 막혔다.

“여, 영애. 치장부터 해요.”

“그냥 지금 마차에 타세요. 엘런은 자연스러운 모습도 사랑해 줄 거예요.”

“안 돼요! 엘런은 정말 S급이 아니라니까요?”

내가 비켜 달라고 하는 말은 무시한 지 오래였다. 다시 날카로워지는 대화를 자르고 나는 진심으로 부탁했다.

“제발 비켜 주세요.”

나도 몰랐는데 목소리가 떨렸다.

그제야 사람들이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지나가려 했다. 하지만 내 말을 들어 주는 것과 별개로, 그들은 내가 그들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혹시 그 은발 남주가 세 번째 후보예요?”

고개를 끄덕이자 잠시 흔들렸던 그녀들의 표정이 단호해졌다.

“미안하지만, 그분은 정말 아닌 것 같아요.”

“차라리 알렉스를 선택해요.”

“맞아요!”

“맞긴 뭐가 맞아요! 엘런이라니까요!”

지금까지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는데 진심으로 화가 올라왔다.

“대체 언제까지 이러실 거예요?”

“언제까지라뇨?”

“아직 시간이 남았잖아요. 왜 절 못 믿으세요?”

결국 울먹이는 소리가 나왔다. 영애들은 당황하며 나를 달래려 들었다.

“저희는 영애를 도와주려고…….”

“도움은 필요 없어요! 제발 저 좀 믿어 주세요.”

“근데 영애…… 사실 이건 영애뿐만 아니라 모두의 [결]이 걸린 일이잖아요.”

따뜻한 갈색 머리의 유저가 굉장히 미안한 얼굴로 우물쭈물하면서도 끝까지 제 말을 이었다.

“영애에게 이런 부담을 지워서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재앙을 막고 싶은 저희 마음도 이해해 주세요.”

그 말에 모두 동의하는 모양인지 서로 떨어져 있던 두 무리의 영애들이 가까이 붙으며 촘촘하게 내 앞을 가로막았다.

불안함과 두려움.

그건 나도 느끼고 있으니 이해했다.

하지만 미안함과 죄책감 그리고 불신, 내게 없는 그 감정들은 그녀들과 나 사이에 선을 그었다.

그 빗금에 아슬아슬하게 놓여 있던 끈이 잘린 기분이 들었다.

나는 반쯤 포기한 마음으로 숨을 길게 내쉬었다.

“제가 선택을 할 때까지 이러실 거죠?”

그 질문에 기대감 어린 시선과 불안한 시선이 모두 내게 꽂혔다.

그러나 누구도 아니라고 답하지 않았다.

그때, 강변 너머로 함성이 밀려왔다. 거리의 소음에 희석된 소리임에도 살갗이 크게 울렸다.

광장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이제 입장을 시작한 건지 톤이 높은 목소리에 즐거움이 가득했다.

나는 건물 틈으로 작게 보이는 경기장을 보다 입술을 깨물었다.

가야 하는데.

그러나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내게는 선택권이 없다.

나는 마주한 유저들에게 다시 시선을 내렸다.

“와아아아아.”

또 함성이 밀려왔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어 심장이 마구 뛰었다.

나는 몇 번 입술을 깨물었다 놓기를 반복하다 AI를 불렀다.

지금 해 버리자.

엘런.

어차피 남주는 엘런이지 않을까?

디아나와 아이시스와 함께 분석했을 때도 엘런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탈리아의 이야기가 커뮤니티에 퍼진 후로, 엘런이 S급이라 생각하는 영애들의 수도 알렉스보다 근소하게 높아졌다.

다수의 결정을 곱씹어 보니 확신 비슷한 것이 느껴졌다.

와아아아악!

아까보다도 더 긴 함성이 밀려왔다.

마음이 조급해진 나는 속으로 남주 선택을 시도했다.

‘담당자님, 엘런을 남주로 선택해 주세요.’

[‘엘런 아이스타스 카이엘드’를 남주로 선택하시겠습니까?]

‘네.’

[서치중…….]

[현재 ‘엘런 아이스타스 카이엘드’가 탐지되지 않습니다.]

[남주 선택은 같은 장소 안에서만 할 수 있습니다.]

같은 장소.

기본 동기화 메시지와 같은 조건이었다.

두 사람이 한 장소에 있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나는 아까 엘런에게 가자며 마차를 준비했다 말한 영애에게 부탁했다.

“영애. 저 엘런한테 가려는데, 마차 좀 빌려주세요.”

그녀가 환해진 얼굴로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네! 지금 그냥 타시면 돼요.”

“안 돼요! 가지 말아요! 영애 검투 대회 가야죠!”

마차에 오르는데, 다른 영애들이 내 팔을 붙잡았다.

나는 그녀들의 손을 천천히 떼어 내며 말했다.

“엘런에게 다녀와서 검투 대회에 참석할게요.”

타임라인 진행이 긴 영애들은 선택이 사실 선택이 아니라고 말했다.

상황이 나를 그렇게 몰고 간 거였다고. 그래서 후에 생각해 보면 내가 한 선택은 사실 오로지 내 선택이 아니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

힘을 빼라는 뜻으로 한 조언은 내게 힘이 되었다.

나는 쉴 새 없이 강변에서 밀려오는 함성을 들으며 마차에 올랐다.

마차 밖에서 다른 유저들이 뭐라고 말을 걸고 정보를 늘어놓았지만, 심장이 뛰는 소리에 짓눌려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타임워프를 했다.

***

눈을 뜨자 붉은 노을에 물든 하늘이 보였다.

엘런의 저택은 내 생각보다도 시간이 더 걸리는 곳이었던 모양이다.

쌀쌀한 바람이 작은 정원의 수풀을 쓸며 다가왔다. 적막한 정원을 둘러보던 나는 그제야 내가 연락도 없이 왔다는 걸 깨달았다.

엘런이 저택에 있을지 그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나 정말 제정신이 아니구나.

새삼 내 멘탈이 나갔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혼곤한 머릿속으로 익숙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데이지?”

외출을 하려던 건지 저택에서 나오던 엘런이 나를 발견하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급히 나온 듯 그는 채우지 못한 커프스단추를 만지작거리며 걸어왔다.

나는 엘런을 보는 순간 마음이 안정되는 걸 느꼈다.

마치 준비된 스위치처럼 그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선택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이 세상이 선택을 유도하고 있다는 그 트릭.

엘런이 여기 있었다. 그것도 내가 도착하자마자 그가 나왔다.

나는 떨리는 손을 몇 번 쥐었다가 펴고는 시선을 들어 엘런을 응시했다.

가을국에 자리한 엘런의 저택은 작았다.

자주 찾지 않는 곳인지 잔디도 무성했고, 몇백 년은 되어 보이는 고목은 노란 나뭇잎을 잔뜩 매달고 있었다.

붉게 저물어 가는 하늘까지, 눈에 담기는 모든 것들이 시간이 꺼져 가고 있다는 걸 억지로 깨우치려 들었다.

이미 뜯어내고 싶은 숫자들이 빠르게 움직이며 사라지는 시간을 보여 주고 있는데도.

나는 엘런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숫자를 애써 무시하며 그의 표정에 시선을 고정했다.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해요.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무슨 말인데?”

엘런은 조금 곤란한 듯 제 마차를 보다 내게 시선을 틀었다.

“괜찮으면 황도로 가면서 얘기해도 될까? 내가 선약이 있는데 늦어서…….”

“공작님의 청혼을 받아들일게요.”

나는 엘런의 말을 막듯 말했다.

그의 붉은 눈동자 안에 자리한 검은 동공이 커졌다. 나는 그런 엘런을 보며 AI를 불렀다.

‘엘런 아이스타스 카이엘드를 선택해 주세요.’

[‘엘런 아이스타스 카이엘드’를 남주로 선택하시겠습니까?]

‘네.’

바로 알람이 들렸다.

[‘엘런 아이스타스 카이엘드’를 남주로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축하하듯 팡파르 같은 우스운 연주가 들렸다.

발랄한 소리에 맞추어 노란 꽃가루가 허공에서 내려오며 축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 모든 게 내 눈에만 보이는 거란 걸 눈치챘다.

엘런은 그 화사한 조각에 시선을 주지 않고 오직 나를 응시한 채 입을 벙긋거렸으므로.

“지금 내가 들은 게 맞다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눈앞에 뜬 상태창으로 시선을 내렸다.

[‘엘런 아이스타스 카이엘드’가 남주로 선택되었습니다.]

[‘엘런 아이스타스 카이엘드’의 등급을 확인하시겠습니까?]

핏기가 가신 손가락이 저릿하다.

나는 손을 가슴 사이에 올리고 꽉 막힌 흉부를 눌렀다.

기절할 것만 같았다.

전신을 덮쳐 오는 긴장을 털어 내며 정보를 읽어 갔다.

나는 떠오른 알파벳 하나를 눈에 담았다.

순간 숨이 멈췄다.

[‘엘런 아이스타스 카이엘드’의 등급은 A급입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