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맞아.”
웬디는 숨을 잔뜩 집어먹으며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그, 그, 그, 그런데 왜, 아가씨가 열쇠를 가지고 계세요?!”
얼굴이 붉어지는 걸 보니 무슨 오해를 하는지 알 것 같다만, 반응하는 시간도 사치였다.
“요한이 많이 아파. 우리가 챙겨 줘야 해.”
“네?”
웬디는 요한이 누워 있는 침대 방에 들어선 이후로 입을 다물었다.
나는 요한의 이마에 손을 올려 보았다.
어제보다는 온도가 낮아졌지만 여전히 뜨거웠다. 붕대에 감긴 팔을 잠시 눈에 담았다.
나는 익숙하게 대야에 새 물을 받아 와 거즈를 적셨다. 적당히 물기를 짜낸 천으로 요한의 몸을 닦아 체온을 낮췄다.
“제가 할게요, 아가씨!”
웬디가 기겁하며 거즈를 뺏으려 했다.
“아냐. 내가 할게. 너는 내가 하는 걸 잘 봐 둬.”
나는 요한의 몸에 물기를 남긴 후, 아샤가 만든 푸른 알약을 요한의 입안에 넣었다.
말랑말랑한 푸른 액체가 가득한 이 약은 의식이 없는 환자에게 수분을 공급하는 약이라고 했다.
작은 알약은 요한의 입안에서 녹으며 저절로 흡수됐다.
나는 놀라 굳어 있는 웬디를 보며 부탁했다.
“의원이 오기 전에 최대한 빨리 돌아오긴 할 건데 혹시 내가 없을 때 의원이 오면, 네가 방문을 열어 주고 옆에서 의원을 도와 천으로 요한의 체온 좀 낮춰 줘.”
“아아, 네!”
요한은 아직도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 하루 이틀이면 눈을 뜬다고 했는데.
그래도 불덩이 같던 몸은 이제 미열만 남아 있었다.
나는 웬디에게 설명을 마친 뒤 방으로 돌아와 외출 준비를 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워치가 쉴 새 없이 울었다. 그 빛에 숨이 막혔다.
다행히 내 방으로 나를 데리러 온 비에른 덕분에, 그 기분을 잠시 뒤로 미뤄 둘 수 있었다.
“준비는 다 끝났니?”
“네. 다 했어요.”
비에른은 어색하지만 미소를 지으려 노력하며 내게 팔을 내밀었다.
나는 오랜만에 피곤한 현실을 무시하고 비에른과 호텔을 나섰다.
***
“음식은 입에 맞니?”
비에른은 접시에 시선을 둔 채 가볍게 물었다. 하지만 아까부터 내 접시를 힐끔거리며 주시하는 걸 본 터라 그의 물음이 진지하다는 걸 알았다.
나는 큼직한 새우를 포크로 찍으며 웃었다.
“네, 맛있어요.”
음식은 맛있었다.
다만, 장소가 의외였다.
여긴 ‘현재’ 섬에서 유명한 해산물 레스토랑이었다. 얼마 전, 요한과 함께 온 곳이기도 했다.
애초에 상류와 하류 지역의 교류를 위해 황실이 인위적으로 조성한 섬.
그렇다 보니 이곳에서는 신분 고하를 가릴 것 없이 모두가 함께 식사할 수 있었다.
“이런 곳에 오실 줄은 몰랐어요.”
나는 비에른이 가을국 황도의 유명한 식당으로 데려갈 줄 알았다.
이곳이 싫다는 뜻은 아니었다.
의외였을 뿐이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여길 좋아한다고 들어서.”
비에른은 민망한지 저렇게 말하고는 큼큼거리며 물을 마셨다.
비에른의 나이는 30대 후반.
거의 스무 살이나 어린 동생을 데리고 나가려니 부담이 되었던 모양이다. 자신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섬에 들어올 정도로. 그 노력이 고마웠다.
“감사해요. 여기 와 보고 싶었거든요.”
나는 처음 온 척 저렇게 말하며 기쁨을 드러냈다.
그의 정제된 낯에 어려 있던 긴장이 풀리는 게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테이블에 놓여 있던 커다란 와인 병이 쓰러졌다.
탁.
반사 신경 좋은 비에른이 떨어지기 전에 병을 잡았지만, 붉은 술이 그의 하얀 재킷에 잔뜩 튀었다.
“어머, 죄송해요!”
테이블을 지나던 여자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했다.
비에른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나는 한숨을 삼켰다. 여자의 손목에 워치가 감겨 있었기 때문이다.
직원이 다가와 상황을 정리하는 바람에 그녀는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갔지만, 뭔가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돌아가며 나를 쳐다보고는 인상을 찡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비에른을 제3의 남주로 오해한 모양이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비에른이 제3의 남주라도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러나 크게 일이 벌어진 건 아니니 그냥 넘어갔다.
쾅.
애써 기분을 가다듬기 무섭게 또 큰 소리가 났다.
비에른은 뒤에서 그를 덮친 여자 때문에 접시에 코를 박을 뻔했다.
다행히 그가 양손으로 테이블을 짚고 버틴 탓에 얼굴이 소스에 비벼지는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괜찮으세요?”
제 등으로 그를 뭉갠 영애가 일어나며 괜히 드레스를 탁탁 쳤다.
“아휴, 발이 꼬여서요. 정말 죄송합니다.”
비에른은 떨떠름한 얼굴로 천천히 상체를 들어 올렸다.
그는 이번에도 말없이 작게 고개를 끄덕여 괜찮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영애는 비에른의 뒷모습을 무섭게 노려보다 나를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나는 테이블 주변을 돌아봤다. 여자 손님들의 손목에는 대부분 워치가 감겨 있었다.
방금 비에른을 덮친 영애가 제 테이블로 돌아갔다. 그러자 같은 테이블에 있던 일행이 그녀의 팔을 찰싹 때리며 뭐라고 속삭였다.
그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무래도 비에른이 제3의 남주가 아니라는 소리를 들은 모양이다.
먼저 자리를 차지한 영애들이 지인을 부르기 시작한 건지, 한 명 한 명 새로 올라오며 식당을 채웠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비에른에게 나가자고 말했다.
“여기 너무 복잡한데 우리 일어날까요?”
“반도 안 먹었잖아.”
“아쉽긴 한데, 이 섬엔 먹을 게 많으니까 괜찮아요.”
“길거리 음식을 말하는 건가?”
비에른이 드물게 인상을 썼다.
“저는 산책하면서 먹는 것도 좋은데. 아니면 호텔에 돌아가서 먹어도 되고요.”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듯 비에른이 무섭게 표정을 굳혔다. 그는 뭐라고 말하려다 갑자기 몸을 틀었다.
비에른이 몸을 피한 자리로 커피가 쏟아졌다.
“아, 손이 미끄러져서. 정말 죄송합니다.”
비에른과 나는 말없이 서로 시선을 마주했다.
“여긴 복잡해서 위험한 거 같아요. 나갈까요?”
“그래.”
비에른은 더 이상 따지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온 나는 입구에서 걸음을 멈췄다. 축제라 거리에 사람이 많은 건 당연하지만, 이 레스토랑 앞에 유독 사람이 몰려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여자였다.
나는 익숙하게 시선을 내려 그녀들의 팔목을 살폈다.
목이 긴 장갑이 워치 모양으로 불룩 튀어나와 있거나, 손목에 대놓고 워치를 감고 있었다.
“대체 요즘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모르겠군. 봄국에 있을 때는 길에서 여자들이 날 안으려 들더니, 가을국은 꼭 날 죽이려고 덮치는 것 같아.”
그는 피곤한 미간을 문지르며 말했다.
나는 움직이지 않는 입술을 겨우 벌려 말했다.
“저희 빨리 호텔로 돌아가요.”
“왜?”
“몸이 안 좋아서요.”
나는 나를 힐긋거리는 영애들을 응시한 채 말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무서웠다.
모두가 나를 지켜보며 내 행동 하나하나를 감시하는 게.
손가락에 핏기가 가시는 기분이 든다. 나는 두 손을 서로 맞잡아 꾹꾹 누르며 그 불쾌한 긴장감을 털어 내려 했다.
그러나 가슴 앞에 모인 손목에서 쉴 새 없이 빛이 반짝였다.
계속 메시지가 수신되고 있었다.
그녀들은 내 손목과 나를 번갈아 보며 빨리 읽으라고 권했다. 아니 권하는 것 같지만 강요였다.
나는 못 본 척 비에른에게 시선을 틀고 그의 팔을 잡았다.
“빨리 돌아가요.”
***
웬디가 방에 없길래 요한의 객실로 갔더니 아샤와 웬디가 요한을 돌보고 있었다.
수액을 걸던 아샤가 나를 보고는 답지 않게 허리를 숙여 정중히 인사했다. 웬디 때문이었다.
“웬디, 이제 가 봐도 돼. 수고했어.”
“아, 아니에요! 제가 계속 할게요.”
“내가 너무 피곤해서 그런데, 가서 목욕물 좀 받아 줄래?”
다른 일을 부탁하자 웬디는 그제야 순순히 일어나 방을 나갔다.
웬디가 나가자 아샤가 편한 숨을 내쉬었다.
“어색해 죽는 줄 알았네요.”
“죄송해요. 빨리 나오긴 했는데 길이 막혀서…….”
영애들에게 막힌 거였지만.
아샤는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힘내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한 모양이었다.
스트레스가 심해 메시지도 보지 않고 있는지라, 나는 커뮤니티에 들어갈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했다.
아샤의 반응을 보니 커뮤니티에 아까 비에른과 있던 일도 공유된 모양이었다.
나는 침대로 다가와 걸터앉았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요한의 이마에 손등을 올려 온도를 쟀다.
이제 거의 정상 체온이었다.
물론 웬디가 물수건으로 체온을 낮춰 두어서 그런 걸 수도 있지만.
“많이 나아졌어요. 혹시 몰라서 엘릭서를 한 번 더 놓았으니까 내일은 일어날 거예요.”
“감사합니다.”
지쳐서 그런가. 아샤의 호의에 눈물이 핑 돌았다.
“이 친구가 영애가 제일 좋아하는 남주죠?”
그녀는 침대에 걸터앉아 요한의 붕대를 풀며 말했다.
“슬롯에 여럿을 담아도 대부분 가장 좋아하는 남주가 있더라고요.”
어제 붙여 둔 약초를 떼어 내며 아샤가 말을 이었다.
“커뮤니티에서는 이 친구가 가장 인기가 없는 것 같던데.”
그 말에 다시 현실감이 돌아왔다. 나도 모르게 좀 날카로운 말이 나왔다.
“제 마음이 어떤지 중요한가요. 어차피 선택권은 저한테 없는데.”
아샤는 알코올로 요한의 팔을 닦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말은 정확히 해야죠. 다들 난리긴 하지만, 선택권은 영애한테 있어요.”
나는 물끄러미 아샤를 보다 물었다.
“아샤 영애는 제가 요한을 선택하길 바라세요?”
“아뇨.”
짧은 답이 돌아왔다.
“아샤 영애는 제가 누굴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저는 알렉스요.”
아샤의 대답이 놀랍지는 않았다.
대부분 엘런이나 알렉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믿었으니까.
“그치만 제 생각은 중요하지 않아요. 선택은 데이지 영애의 몫이니까. 다들 그걸 알아야 하는데.”
아샤는 새 약초를 요한의 팔에 붙이며 혀를 찼다.
“본인들은 마음이 가는 선택을 했으면서, 남한테는 제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는 걸 모르더라고요.”
“…….”
“상황이 이렇다고 해도 타인의 선택을 존중하는 예의를 갖춰야 하는데 말이죠.”
아샤는 그 이후로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꼼꼼하게 새로 붕대를 갈아 주고는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아샤에게 감사 인사를 한 나는 내 방으로 돌아가려다 다시 요한의 방으로 들어갔다.
혹시나 금방 정신을 차릴까 싶어서.
꽤 오랜 시간 침대 옆에 앉아 있었지만, 요한은 자정이 되도록 눈을 뜨지 못했다.
그래도 혈색이 많이 돌아왔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
처음에는 깨어나기만을 바랐는데, 괜찮아지는 게 눈에 보이니 욕심이 생겼다.
나는 요한이 의식을 조금만 더 늦게 차리길 바랐다.
오전이 아니라 오후쯤에 눈을 떠 주길 바랐다.
어차피 이렇게 사람 피를 말릴 거라면, 내일 검투 대회가 끝난 후에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깨어난 요한이 바로 제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다.
적어도 내가 가장 아끼는 남주를 안전한 곳으로 돌려보내는 선택은 할 수 있기를 바랐다.
***
“……가씨!”
어렴풋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헤집었다.
꿈을 꾸고 있었는데 기억나지 않는다.
천천히 벌어진 눈꺼풀 사이로 웬디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몇 번 눈을 깜빡여 초점을 제대로 맞췄다.
선명해지는 시야와 함께 소리가 제대로 들리기 시작했다.
“아가씨! 일어나세요!”
사색이 된 웬디가 차마 내게 손을 대지 못한 채 소리만 지르며 나를 깨우고 있었다.
“……왜?”
“요하네스 기사님이 없어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