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지금 제 청혼을 잊어버리라고 하신 게 아닙니까?”
알렉스는 등을 소파에 깊게 기대며 긴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나를 보며 답했다.
“아니. 난 지금 네가 레이디 데이지에게 청혼한 걸 처음 들었는데.”
알렉스가 지금까지 내가 본 미소 중 가장 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한테는 언제 말해 줄 생각이었어?”
“말씀을 드려야 하나요?”
두 사람에게는 빙속성 이능이 없는데도 주위 온도가 몇 도는 낮아진 기분이 들었다.
나는 원망을 숨기지 않으며 시선을 틀어 영애들을 쳐다봤다.
그러나 그녀들은 미안해하기는커녕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아침 드라마에 몰입한 사람처럼 음료를 마시면서도 눈과 귀는 이쪽에 집중하고 있다.
진짜 이 기분을 느끼지 않으려 노력했는데.
솔직히 짜증이 났다.
얼마 전 알렉스와 요한이 마주쳤을 때, 알렉스는 요한을 공격했다. 그리고 요한은 그 일로 지금…….
심장 언저리가 답답하게 꽉 막혀 왔다.
왜 알지도 못하면서 남의 일에 끼어들어 사람을 곤란하게 하는 걸까.
그러나 이미 벌어진 일. 누굴 원망해 봤자 소용이 없었다.
나는 이 자리를 정리할 방법을 고민하며 피곤한 뇌를 굴렸다.
엘런과 알렉스 중 누구 하나를 달래야 한다면 그건 알렉스였다.
엘런은 알렉스에게 피를 내지 않겠지만, 알렉스는 장담할 수 없었다.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틀었다.
그러자 황성이 보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없던 나무 경기장이 황성 바로 앞 광장에 크게 지어져 있었다.
섬에 있는 본선 경기장이 아닌, 황성의 성벽과 이어지는 결승 경기장이었다.
경기장 1층은 황족과 귀족의 자리. 연회 담당자들이 분주히 소파와 테이블을 배치하며 귀빈석을 꾸미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내일은 검투 대회 결승전이 열리는 날이기 때문이다.
나는 가만히 그것을 보다 다시 알렉스에게 시선을 틀며 입을 열었다.
“전하는 황족이시니 내일 1열에서 경기를 감상하시겠죠?”
알렉스는 대답 없이 살짝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뜻이냐고 묻듯.
“부러워요. 저도 1열에서 경기를 보고 싶었는데.”
나는 그의 생각이 길어지지 않도록 바로 말을 이었다.
“혹시 전하 옆에 남는 자리 하나 없을까요?”
장난인 척 말하자 알렉스와 엘런의 표정이 동시에 굳어졌다.
먼저 입을 뗀 건 엘런이었다.
“귀족석도 황족의 자리 바로 뒷줄이야. 큰 차이 없어.”
알렉스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2열과 1열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지.”
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엘런과 알렉스는 그 침묵을 매개 삼아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래도 알렉스의 시선에 담긴 날은 조금 풀어져 있었다.
알렉스는 엘런을 보던 시선을 내게 틀며 말했다.
“옆에 자리를 낼 수 있는지 알아보지.”
“그게 무슨…….”
“감사합니다. 전하.”
엘런이 뭐라 반박하려 하기에 나는 얼른 대화를 잘라 냈다.
“확정되면 말씀해 주세요. 전하와 옷을 맞춰 입어야 하니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너 지금 이럴 시간이 없다는 걸 돌려 말하자 알렉스가 의뭉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준비하지.”
“네. 기다릴게요.”
알렉스는 들어올 때와 확연히 달라진 표정으로 엘런을 쳐다봤다.
“안 일어나나?”
“공작님도 제가 말씀드린 거 한번 찾아봐 주세요. 초상화나 일기나. 마왕을 공략하는 데 제가 도움을 드릴 수도 있잖아요.”
저쪽에도 얼른 할 일을 상기시켜 주자 엘런은 찜찜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K-남주를 돌려보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일감 주기였다.
나는 비에른과 약속이 있다는 핑계를 대며 가까스로 두 남주를 먼저 내려 보냈다. 그리고 한참 뒤에 올라온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으며 피곤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문은 닫히기도 전에 틈을 비집고 들어온 여러 손에 의해 강제로 벌어졌다.
십수 명의 영애들이 와르르 밀려 들어왔다.
모두 라운지에 있던 유저였다.
몇몇은 환하게 웃고 있었고, 몇몇은 울적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영애도 알렉스가 S급이라고 생각하시는군요!”
“이 영애 눈치가 없네? 영애가 엘런의 전쟁을 도와준다고 했잖아요. 알렉스는 성질 더러우니까 달래려고 그냥 한 말이고요.”
“들리는 대로 듣고 보이는 대로 본 건데 뭐가 눈치가 없어요. 안 그래요, 영애?”
작은 소란에 나는 대답을 아꼈다. 그러자 내가 엘런을 선택하길 바라는 듯한 영애가 팸플릿처럼 기다란 종이를 건넸다.
“이건 저희가 알아낸 엘런의 스케줄이에요! 신년제는 마지막 날 폐회식에만 참석하더라고요. 다른 날에는 근교에 있는 상점에 가고요. 엘런은 마석이랑 스크롤 거래 때문에 온 거 같아요.”
“아, 우리도 저런 거 있어요! 영애 그것 좀, 고마워요. 자자, 이거 받아요. 황태자는 남은 연회 기간 동안 모든 행사에 참석하더라고요.”
마침 엘리베이터가 내가 지내는 층에 도착했다. 나는 그 두 장을 돌려주며 최대한 예의 있게 거절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하지만, 제가 알아서 할게요.”
“안 돼요!”
“저희도 돕게 해 주세요!”
돕는다는 표현을 쓰지만 사실 간섭에 가까웠다.
기분이 좋지 않다. 그들은 자신의 선택이 내 선택보다 옳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제가 천천히 고민해 보고 싶어요. 그럼 조심히 가세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나는 애써 미소를 짓고 있던 보람도 없이 인상을 구겨야 했다.
“어! 왔다 왔어!”
“신문 사진이랑 똑같이 생기셨네.”
내 호텔 방 복도에도 한 무리의 영애가 있었다.
“영애, 여기에 그 영애가 말한 인외남주가 있는 거죠?”
한 유저가 요한의 방을 힐긋 쳐다보며 물었다.
“인외남주라니. S급은 무조건 그 남주예요. 제가 판타지 게임 많이 해 봤는데, 이런 건 무조건 인외 혼혈이 최강이에요.”
그들은 내게 다가와 요한을 선택하길 권했다.
어제 방 주변에 마력 차단 금속을 설치해 준 오라 영애가 고마워졌다.
이 중에 이동 스크롤을 가진 영애가 있었다면, 내 방 안에 들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표정을 굳히고 있는데도 그녀들은 말을 쉬지 않았다.
어차피 할 선택이라면 지금 요한을 선택하는 게 어떠냐고 설득했다.
“미쳤어요?!”
“저, 저, 저 취향 마이너한 영애들이 이게 무슨 돌발 행동이에요! 우리 목숨이 걸린 선택이라고요!”
“S급은 엘런이에요. 영애, 스트레스받지 말고 빨리 선택해서 저 시계를 지워 버려요.”
“나, 참 역대급 베스트셀러 원작 남주를 두고서 코딱지만 한 영지 가진 공작을 들이대네. 알렉스를 선택해야 해요, 영애.”
이렇게 시끄럽게 굴면 요한의 방에도 들릴 텐데. 요한이 사계국 언어를 몰라서 다행이었다.
아니, 일어나긴 했을까?
그런데 호텔 방 앞에서 시끄럽게 떠들며 싸우던 영애들이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띵.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모두의 시선이 금빛 문으로 움직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건 웬디였다.
“아가씨?”
맞다. 비에른이 날 감시하라고 웬디를 불렀지.
잠시 기분이 울적해졌지만, 주변의 영애들이 당황하며 입을 다문 모습을 보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캐릭터 앞이라 S급 얘기를 못 하는구나.
그녀들은 말을 아끼고 부채질만 했다.
웬디는 복도에 사람들이 몰려 있으니 우물쭈물 걸어오며 몇 번이나 복도를 돌아봤다.
복도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층에 방문이 고작 네 개인 게 이상한 모양이었다.
“저어, 아가씨.”
웬디는 이 사람들이 누구냐고 묻듯 그녀들을 힐끔힐끔 보며 말을 삼켰다.
“어제 축제에서 만난 분들인데 내 방이 궁금하다고 하셔서 방금 방을 구경시켜 드렸어.”
“아아.”
왠디는 왜 남의 방이 궁금한 건지 모르겠으나, 가을국의 이상한 취미라고 여긴 듯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더 말을 하지 않는 걸 보니 그런 거 같았다.
“흠흠. 감사합니다, 레이디 데이지. 방 구경 잘 했어요. 저는 이만 가 볼게요.”
“다음에는 저도 오라 호텔 스위트룸에서 지내 봐야겠어요.”
“검투 대회 때 봬요.”
그들은 손을 흔들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말없이 묵례로 인사하고 방문을 열었다. 따라 들어온 웬디는 한참 안으로 들어와서야 입을 열었다.
“아가씨, 방금 공작님께 먼저 인사를 드리고 왔는데요. 오늘 저녁은 밖에서 같이 드시자고 준비를 하라고 하셨어요.”
“오라버니가?”
“네, 이걸 전해 주라고도 하셨고요.”
웬디는 짐 가방 사이로 들고 있던 작은 상자를 건넸다.
나는 웬디에게 짐을 풀고 지낼 방 하나를 알려 주고, 창가 소파에 앉아 상자를 풀었다.
상자 안에 든 것은 노트였다.
제지 기술이 발달한 가을국에서 만든 패브릭 커버의 단단한 노트.
아기자기한 패턴을 보니 절대 비에른 본인이 쓰려고 산 건 아니었다.
나는 안에 담긴 작은 카드를 열었다.
「생전에 숙부께서 네가 뭔가를 적는 걸 좋아한다고 하셨는데, 이곳에 와서는 그런 모습을 못 보게 되어 아쉽구나. 늦게 챙겨 줘서 미안하다. 돌아가면 더 신경 쓰마.」
딱딱한 편지지만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화해의 손길이었다.
말도 없이 연회에 갔다고 화를 냈던 게 신경 쓰였나 보다.
나는 고개를 들어 벽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은 벌써 1시에 접어들고 있다.
“저 짐 다 풀었어요. 준비하시는 거 도와드릴게요.”
나는 웬디가 나오는 걸 보고 일어섰다. 그리고 액세서리 함에 있던 키를 들고 웬디에게 따라오라고 말했다.
웬디는 이유를 묻지 않고 뒤를 따라오다 내가 맞은편 객실의 문을 여는 걸 보고 당황했다.
“아, 아가씨. 여긴 기사님이 지내시는 방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