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아샤가 먼저 떠나고 나는 엘릭서가 다 들어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방을 정리하고 나왔다.
정말 요한이 내일 일어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내 객실 문을 열려는 찰나,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라가 문진처럼 생긴 쇠막대를 복도의 벽과 바닥 사이에 끼우고 있었다.
“……뭐 하세요?”
“아, 구속구 만들 때 쓰는 특수 금속이에요. 혹시라도 스크롤 써서 데이지 영애 방에 몰래 찾아오는 유저들 있을까 봐 설치하는 거예요.”
설마 그렇게까지 할까 싶었다.
그러나 굳이 거절할 호의는 아니라서 그냥 두었다.
방으로 들어온 나는 노트북부터 열었다. 그리고 심호흡을 한 번 하고 글을 올렸다.
마왕의 기상 정보가 전 유저에게 공개된 게 새삼 실감이 났다.
커뮤니티에 적을 수 없던 마왕의 이야기가 필터링 없이 올라갔다.
S급 남주 관람권.
내 슬롯에 담긴 세 명의 남주.
어떻게 보면 내 개인적인 이야기고 공개할 필요가 없는 부분이지만, 지금 상황은 집단의 생존이 걸린 상황이었다.
그러니 다른 이들의 불안을 이해해 보려 한다.
타인에게 내 생존권이 걸려 있다면 나도 예민해질지도 모르잖아.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이들에게 내 이야기를 하는 게 무서웠지만, 최대한 솔직하게 적었다.
그런데 막상 적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혼자 품고 있던 돌을 내려 둔 기분이었다.
나는 긴장이 풀린 탓에 더 이상 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글을 올리자마자 침대에 누웠다.
***
새의 지저귐처럼 간지러운 초인종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렸다.
졸린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하얀 햇살에 젖은 침대 휘장이 보였다.
똑똑.
종이 고장 났다 여긴 건지 방문객은 이제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나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현관으로 나갔다.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너무 피곤했다.
달칵.
“아, 계셨군요. 레이디 데이지.”
문 앞에는 오라 호텔의 직원이 서 있었다.
그녀는 정중한 태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카드를 전했다.
“라운지에 데이지 양을 찾아온 분이 계십니다.”
자연스레 카드 위로 시선이 떨어졌다.
익숙한 필체로 적힌 이름이 보인다.
엘런 아이스타스 카이엘드.
미간이 슬며시 좁아 들었다.
엘런이 왜?
직원을 보니 그녀는 그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방문 목적은 모르는 듯하다.
“알겠어요. 지금 올라갈게요.”
나는 옷을 갈아입고 나갈 준비를 마쳤다. 라운지 바에 오르며 엘리베이터 창 너머 황도를 바라봤다.
10 14 : 18 : 51 : 56
어제 마지막으로 본 숫자와 또 다르다.
유저는 둘이나 차감됐고, 시간은 14시간이나 지났다.
지금은 오전 11시.
엘런이 아침부터 날 찾아온 이유는 뭘까?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라고 몸이 피곤하니 긍정적인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라운지 층에 도착한 순간 나는 이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깨달았다.
홀에 속삭이는 듯한 소음이 가득했다.
안으로 들어가며 나는 곳곳에 흩어진 여자 무리를 쳐다보았다. 대부분 손목에 워치를 차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시선을 모른 척하려 애쓰며 창가에 있는 엘런에게 다가갔다.
엘런은 고개를 한 번 끄덕여 인사했다. 나도 가볍게 인사하고 앉으며 물었다.
“어쩐 일로 오셨어요?”
그런데 엘런이 놀랐는지 눈을 깜빡이다 고개를 기울였다.
“할 말이 있다고 부른 건 데이지 양이잖아?”
“네?”
“어제저녁에 이에테르가 사람을 보내서 호텔로 와 달라고 했잖아.”
“전 그런 적 없는데요?”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눈을 깜빡이다 시선을 틀었다.
주변에 앉아 있는 영애 무리 몇몇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심지어 부채를 거두고 입 모양으로 ‘화이팅!’이라고 말하는 영애도 있었다.
나는 불안한 시선을 내려 워치로 메시지를 확인했다.
이제 천 단위가 넘어가는 메시지 알람을 무시하고, 미리 보기 몇 개만 대충 훑었다.
[엘라: 걱정 말아요. 우리가 도와줄게요. 지금 엘런은 가을국 황도 근교에 묵고 있다는데…….]
[셀레나: 누가 봐도 알렉스가 S급이에요. 절대 흔들리지 말아요! 영애는 아무 걱정 말고......]
[도로시: 영애, 피곤하죠? 이럴 때일수록 잘 챙겨 먹어야 해요. 유기농 농작물 좀 보내줄게요. 주소 좀 알려주세요.]
[수잔: 제가 8년 차라 자신 있거든요. 그동안 전개 수정으로 이어준 영애가 얼마나 많은지…….]
잠든 사이에 영애들은 나름대로 준비를 한 듯했다.
그녀들은 도와주는 거라고 말했지만 전혀 필요 없었고, 오히려 부담스러웠다.
나는 메시지를 끄고 다시 시선을 들었다. 그 찰나 동안 십수 쌍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처음으로 영애들이 무섭게 느껴졌다. 불안을 컨트롤 하지 못한 그들은 내게 제 불안을 의탁하고 있었다.
엘런은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성대를 긁고 나온 낮은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그럼 누가 그대를 사칭한 건가?”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제가 초대한 게 맞아요. 피곤해서 착각했나 봐요. 죄송해요.”
수습은 왜 내 몫일까.
“그래. 무슨 일로 아침부터 만나자고 한 거야?”
나는 이렇게 된 거 엘런에게 묻고 싶었던 걸 물어보기로 했다.
“일전에 제게 카이엘드가 초대 가주의 검을 보여 주셨던 거 기억하세요?”
“기억하지.”
“초대 가주가 마왕을 몰아낸 게 아니라, 마왕이 스스로 돌아간 거라고 하셨던 것도요?”
엘런은 잠시 나를 응시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초대 가주의 일기를 보고 알게 되셨다고 했잖아요.”
엘런은 사람들이 앉아 있는 홀을 힐긋거리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건 갑자기 왜?”
“저 사실 그날 공작님의 검에 있던 마왕이 새긴 글자를 읽었어요.”
그 낙서에 대해 알려 주려니 입이 다물렸다. 그래도 부끄러움을 누르고 마저 말했다.
“그건 저주가 아니라 하트 표시였어요.”
“……하트?”
마왕의 헛짓을 왜 내가 부끄러워해야 하는지 모를 일이다.
나는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 말했다.
“네. 사랑의 상징이요.”
엘런의 침묵을 이해했다. 그의 눈이 흐려지는 것도 이해했다.
그러나 내가 왜 대리 수치를 느껴야 하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말을 이었다.
“공작님, 지금부터 제가 하는 얘기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알았는지는 묻지 말아 주세요.”
엘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차분히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마왕의 일기 같은 걸 봤는데, 거기서 카이엘드 초대 가주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어요.”
그는 조용히 내 뒷이야기를 기다렸다.
“마왕이 카이엘드 초대 가주에게 반했다는 내용이었어요. 그래서 검에 그런 낙서를 남긴 거 같고요.”
나는 목을 가다듬으며 눈치를 보다 엘런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초대 카이엘드 가주의 초상화 있으세요?”
“초상화?”
뜬금없는 단어에 엘런이 미간을 찌푸렸다.
“네. 마왕은 초대 가주에 대한 마음을 잊지 않으려고 검에 그딴…… 아니, 그런 표식을 새겼다고 했거든요.”
만약 엘런이 S급 남주라면, 마왕을 물러가게 할 검사일지도 모른다.
“마왕이 공작님의 검을 보고 제 감정을 깨닫고 물러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엘런은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는 듯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해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들리겠지.
하지만 여긴 #BL남주 키워드가 있는 곳이었다.
물론 BL 전개는 없다고 했으니 둘이 이어지는 건 아니겠지만, 마왕이 순간 제 첫사랑에 대한 추억에 젖어 감성적으로 판단할 수도 있잖아. 자다 일어나서 정신도 몽롱할 텐데.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마왕 개그캐 같단 말이다.
물론 이 말을 엘런에게 할 수는 없었다.
나는 다시 엘런에게 초상화를 보고 싶은 이유를 설명했다.
“혹시 공작님이 초대 가주님과 닮은 얼굴이라면, 마왕이 공작님을 보고…….”
“그만.”
엘런이 질색하며 허리를 바로 세웠다.
나는 더 설득해 보려다 그냥 한숨을 삼키고 물러섰다.
엘런은 제가 들은 얘기를 무시하듯, 내 질문에 간결한 답을 했다.
“그분 초상화는 현재 카이엘드가에 없어. 모두 도난당했거든.”
“그래? 그럼 엘런 네 얼굴에 머리만 긴 여자를 그려 두면 되겠네.”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런이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알렉스가 웃으며 엘런의 옆에 앉았다.
“데이지 양의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흥미로워. 안 그래?”
엘런에게 말하면서 알렉스는 나를 쳐다봤다. 또 기분이 안 좋은지 눈이 과하게 휘어져 있다.
그러나 지금은 알렉스의 심정을 헤아릴 때가 아니었다.
나는 알렉스의 어깨너머로 시선을 미끄러뜨려 한 무리의 영애들을 쳐다봤다.
그녀들은 소리 나지 않게 하이파이브를 하며 기뻐했다.
이쪽을 보고 속닥거리는 걸 보니 알렉스를 데려온 건 저 영애들의 짓인 모양이다.
나는 한숨을 삼키고 알렉스에게 물었다.
“전하, 어쩐 일로 오셨어요.”
“여긴 가을국이야. 듣는 귀와 보는 눈이 많고, 그 소식은 전부 내게 들어와.”
“레이디 데이지를 감시하신 겁니까?”
엘런이 날카롭게 묻자 알렉스는 그저 또 눈웃음을 지었다.
아까보다도 더 짙어진 게 무서웠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 고개를 틀어 영애들을 쳐다봤다.
대놓고 이쪽을 보고 있던 영애들은 눈이 마주치자 멋쩍게 웃으며 괜히 제 테이블을 보거나 서로 대화를 하는 척 시선을 피했다.
아니, 아무리 불안해도 그렇지 이래도 되는 거야?
대체 왜 내 판단을 믿지 못하는 걸까.
결국 선택은 내가 하는 건데.
“데이지.”
나도 모르게 표정이 굳어지는 찰나, 알렉스가 나를 불렀다.
“그 청혼은 잊어버려.”
청혼?
황제의 제안을 말하는 건가.
연회 날 가을국 황제가 황실로 들어오라고 했던 말이 알렉스의 귀에도 들어간 모양이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답하기도 전에 엘런이 알렉스의 말을 잘라 냈다.
그간 나름대로 알렉스 앞에서 예의를 갖춰 왔던 엘런이 정색한 채 알렉스를 노려봤다.
“전하께서 무슨 권리로 제 청혼을 잘라 내고, 이런 무례한 짓을 하신단 말입니까?”
단단히 오해한 엘런이 화를 냈다. 당황한 나와 달리 알렉스와 엘런의 표정은 차분했다.
알렉스는 미소를 모두 지워 낸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돌려 엘런의 시선을 응시했다.
“네 청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