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 근데 성녀 영애는 왜 예언을 공유 안 한 거래?
이상하게 여긴 사람들이 그 의문에 동조했다.
┗ 그니까 이런 정보는 빨리 오픈해서 같이 해결책 찾아야지 ㅜ_ㅜ
┗ 공유하면 안 되는 이유가 있었던 거 아닐까ㅋ
┗ 그럴 이유가 있나? ㅇㅅㅇ;
┗ 저 공지 들으면 다들 인기 남주 슬롯에 담은 유저한테 선택 강요할 게 뻔하잖아~ 지금 딱 그러고 있고ㅋ
┗ 성녀 영애가 상위권 남주 담아 놔서 조용히 있었다는 거야?
┗ ㅇㅇ 뇌피셜이긴 한데 제한 시간 동안 혼자 생각하고 골라보려고 한 듯?
┗ 그럴 바에는 슬롯 담아뒀다고 오픈하고 같이 고르는 게 낫지 않나...? 선택 실패하면 다른 유저가 남은 남주 선택할 수도 있잖아?
┗ ㄴㄴ #문란남 아니면 이제 중복 슬롯 추가 못하잖아. 솔직히 그것도 부담됐을 듯. 남주 잘못 고르면 끝이니까ㅜ
누군가의 추측에 힘을 실어 주는 댓글이 달렸다.
┗ 이거 맞는 거 같아... 성녀 영애, 황제 영애랑 같이 탐사대 들어갔잖아
┗ 맞네, 거기에 알렉스랑 엘런도 있다며?
┗ 거의 한 달 합숙했다던데 성녀 영애가 그 둘 슬롯에 담았겠네...
┗ 좀 실망이다 ㅠㅠ 부담된다고 이런 정보를 숨겨? ㅠ_ㅜ
┗ 이건 아니지; 무서운 건 다 똑같은데ㅠㅠㅠㅠㅠ
갑작스러운 공지로 패닉에 빠진 유저들은 쉽게 선동되고 흔들렸다.
점차 아이시스를 비꼬는 수위가 높아졌다. 그러자 과열된 분위기를 말리는 유저도 나타났다.
┗ 확실한 것도 아닌데 사람 몰아가지마;
┗ 몇몇 영애들 선 넘긴 했는데 그래도 솔직히 성녀 영애가 잘못하긴 했지… 모두의 목숨이 걸린 일인데 그걸 숨기려 한 건 잘못이잖아ㅜ
그때 한 유저가 다른 목소리를 냈다.
┗ 숨긴 게 아니라 숨겨주려고 한 걸 수도 있잖아
┗ 뭘 숨겨줘?
┗ 알렉스 슬롯에 담은 영애 내 지인이야 ㅡㅡ 성녀 영애 아니니까 무고한 사람 그만 패!
┗ 누군데?
┗ ㄴㄱ? 그걸 오픈해야지
┗ 지금 그 영애는 뭐해? 왜 선택 안해?
┗ 내 말이……
┗ 벌써 오후 세 시인데 지금까지 머함? ㅇㅅㅜ
┗ 그니까 하다못해 글이라도 올리던가… 본인이 선택할 거라고 이름이라도 까주지… 그럼 다들 덜 불안할텐데…
┗ 아 진짜 답답하다. 솔직히 좀 이기적이다 ㅠㅠㅠㅠ 다 불안해하는 거 안보임? 왜 자기만 생각할까?ㅠㅠㅠ
┗ 영애 감정 소모 ㄴㄴ 저 영애가 거짓말하는 건지 어떻게 알아? 인증 없는 글은 뭐다??
┗ 그러네… 저거 혹시 성녀 영애가 쓴 글 아니야?
나는 커뮤니티를 보다 노트북을 덮어 버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가을 하늘에 반투명한 하얀 숫자가 떠 있다.
17 15 : 14 : 25 : 48
빠르게 사라지는 숫자가 마음을 조급하게 했다.
차라리 아이시스가 먼저 예언을 공유하고 우리가 S급 남주를 선택할 수 있다는 정보를 알려 주었다면, 다들 아이시스를 신뢰했을지도 모른다.
시스템이 공지를 띄웠어도 침착하게 믿고 기다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새 정보에서 배제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유저들은 불신에 빠졌다. 한정된 정보에 대한 불안은 그들이 정보에 갈증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유저들의 반응은 이해했다.
S급 남주 후보를 알고 있고, 선택할 수 있는 나조차도 저 숫자들을 보고 있으니 심장이 떨리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유저들은 얼마나 두려울지 그 기분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유쾌한 것도 아니었다.
아이시스도 디아나도 호의로 한 선택이었다. 유저들이 불안해하지 않게 미리 재앙을 제거하려 했던 것뿐이다.
오만했을 수는 있지만, 그 마음에 이기심은 없었다.
“미치겠네.”
차분히 생각하려 해도 생각이 되지 않는다.
아이시스와 디아나는 지금 상황을 알면서도 내게 걱정하지 말고 차분히 선택해 보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내게 부담을 줄까 그들은 해명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아이시스가 예언을 공유하게 밀어붙일걸.
아니, S급 남주 후보를 봤을 때 다른 유저들한테 말해 줄걸.
후회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차곡차곡 머릿속에 쌓였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이다.
맑은 정신을 되찾으려 억지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아 보고 호텔 안을 걷고 별짓을 다 했지만, 불안하게 뛰는 심박은 진정되지 않았다.
특히 하늘을 가린 거대한 숫자가 피를 말렸다.
밤을 지새운 몸은 그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했다.
‘일단 눈 좀 붙이고 다시 생각하자.’
나는 다시 침대에 몸을 누이고 잠을 자려 노력했다. 한참을 뒤척인 뒤에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잠시였다.
반짝.
쉴 새 없이 눈앞에서 빛이 번쩍여 댄 탓이다.
눈을 뜨니 손목의 워치가 반짝이고 있었다.
메시지 수신이었다.
나는 몽롱한 정신을 붙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브: 안녕하세요 영애, 처음 인사드리네요. 다름이 아니라 영애 선택에 도움이 되고 싶어서 메시지 드려요. 저는 개인적으로 알렉스가 S급 같거든요…….]
이게 무슨 소리야?
메시지 대기창을 본 나는 눈을 찌푸렸다.
[줄리아: 데이지 영애 안녕하세요! 어떤 남주를 선택하실 거예요? 저도 봄국 플레이 중인데 제가 볼 땐 엘런이 진짜 S급 같아요. 왜냐하면…….]
[로즈: 영애 커뮤니티에서 보고 메시지 드려요. 다른 남주는 누굴 담고 있어요? 모두를 위해 슬롯 현황을 공유할 생각 있으세요? 개인적으로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물론 영애의 마음…….]
[소피아: 솔직히 좀 이기적이신 거 같아요……. 공지 보셨을 텐데 정보 공유해 주실 수도 있었잖아요. 다들 불안해하는데…….]
처음 보는 사람들의 메시지가 무더기로 수신되어 있었다.
대부분 예의를 갖추었지만, 불만을 숨기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익숙한 유저의 이름이 보였다.
[오라: 미안해요 영애 ㅠㅠ 잠깐 올렸다가 지웠는데, 누가 그걸 그새 퍼트렸나 봐요. 정말 미안해요ㅠㅠ…….]
나는 장문으로 온 오라의 메시지를 읽었다.
내가 잠을 자는 동안 커뮤니티는 더욱 과열되었던 모양이다.
선을 넘는 글이 많아져서 오라가 아이시스는 상위권 남주 중 그누구도 담지 않았다는 글을 올렸고, 유저들은 증거를 요구했다고 한다.
오라는 증거로 알렉스와 나탈리아가 호텔에 날 찾아온 이야기를 하며 가을국 신문 기사를 캡처해서 올렸다.
아주 잠깐 올렸다 지웠는데, 그걸 본 누군가가 다시 신문 기사를 올려 내 신상이 퍼졌다고 한다.
“잠깐도 못 쉬는구나.”
기절할 것처럼 피곤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하기 위해 바로 노트북을 열었다.
오라 영애가 쓴 글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조회 수와 댓글 수가 아주 많았기 때문이다.
제목: 다들 선 넘는 거 알지? 지금 시대가 어느 때인데 마녀 사냥이야? 다들 제발 정신 차리자 [139]
『불안한 거 이해하는데, 그걸 성녀 영애한테 화풀이하는 건 아니지.
공지 워딩 봐봐. 성녀가 예언을 누락했다 어쩌고저쩌고.
시스템이 성녀 영애 욕하라고 판 깐 거 딱 보이잖아?
재앙 내린 주체가 시스템인데 왜 다들 성녀 영애 욕하는 데 진심인지 모르겠어. 그러지 말자 제발.
불안해도 지금은 다 같이 힘을 모아야지 한 사람한테 서운해할 때가 아니야.
그리고 나 성녀 지인인데, 성녀 영애는 TOP 5 남주 중에 한 명도 슬롯에 안 담았어! 내가 알아.
영애들이 말하는 그 탐사대에서도 아무 일 없었어. 탐사대 같이 간 영애 황제 영애 말고도 한 분 더 있는데, 그분이 알렉스랑 엘런 담았거든.
성녀 영애는 남의 슬롯 남주 안 담는 거 다들 알잖아.
나도 안 지 얼마 안 된 영애지만 그 영애 신중해 보여. 믿고 기다려주자. 응?
우리끼리 싸우는 건 정말 이 상황에 아무런 도움이 안 돼.』
┗ 탐사대 따라간 영애가 하나 더 있다고? 누군데?
┗ 글쓴이: 미안. 여기서 유저 이름 공개하기는 좀 그렇다. 그냥 나 믿어봐!
┗ 인증도 없고, 정보도 없고... 요즘 주작 글 많아서 믿음이 안 가네요ㅠ
┗ 성녀 영애 지인이면 지금 성녀 영애 왜 잠수 타는지도 알겠네? 그건 왜 안 알려줘? ㅇㅅㅇ
┗ 지금 잠수탈 때가 아닌데... 솔직히 과열 인정하는데 성녀 영애 잘못도 있다고 봄...
┗ 무시하려다 댓글 달아. 대체 성녀 영애가 뭘 잘못함? 같은 유저끼리 한 사람한테만 책임 오지게 지우네 ㅋㅋ 꼬우면 님들이 성녀 하지 그랬어?
┗ 내가 성녀 롤이었으면 바로 공유했지
┗ 아, 예. 말은 누가 못함 ㅋ
┗ 영애 말 이상하게 한다? 지금 시비 거는 거야?
┗ 말투 하나에 예민하게 굴면서 퍽이나 성녀 롤 잘 맡았겠다 ㅋㅋ 영애가 성녀였으면 지금 여기 적힌 저격 글에 대댓 달면서 싸우고 있었을걸?
┗ 난 애초에 그런 상황을 안 만든다고 ㅡㅡ
┗ 니예~
┗ 글쓴이 : 아니 왜 여기서 또 영애들이 싸워...
┗ 근데 혹시 말해 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 아직 선택 안한 영애들 다 같이 슬롯 까고 있는데, 그 영애는 TOP 5에서 두 명이나 선택하고도 왜 슬롯 리스트 공개 안 해...?
┗ 아니 이 주작 글을 믿는 영애들이 있네 ㅋㅋㅋㅋ
┗ 글쓴이: 주작 아니라니까!
┗ 글 쓴 영애, 그냥 주어 까. 지금 여기 영애들 눈 뒤집혔잖아 우리 성녀 영애 억울한 거 풀어줘ㅜㅜ
┗ 영애들 받아주지마 이때싶 관종 영애가 주작 글로 논점 흐리는 거잖아;
┗ 글쓴이: 주작 아니라고!
┗ 글쓴이: 삭제된 댓글입니다.
┗ 글쓴이: 성녀 영애가 알렉스 담은 거면 왜 신문에 나탈리아랑 봄국 영애랑 이런 기사가 나는데?
┗ ?
┗ 헐...
┗ 이거 어제 신문이지?
┗ 와, 미친? 이거 합성 아니야??? 가을국 유저들 이거 찐이야??
┗ 글쓴이: 기사 지웠어. 어쨌든 주작 아니라고. 진짜야! 황실에서도 직접 초대장 보냈고
┗ 진짜였네... 의심해서 미안하다 글쓴 영애
┗ 성녀 영애 진짜 억울했겠다ㅜㅜ
┗ 보살이야 보살. 나 같으면 욕 박은 영애들 뒤집어 엎었어ㅡㅡ
┗ 아니; 보살이라니 왜 멋대로 성녀를 개종시키고 그래;
┗ 댓글 계속 새로 고침 하면서 보는데 영애들 태세전환 뭐냐?ㅋ 무슨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쉽네ㅋ
┗ 뭐야뭐야, 나 못봤어!! 그래서 그 영애 누군데????????
┗ 나도 궁그매ㅠㅠㅠㅠ 1분만 다시 올려줘라. 제발 ㅠㅠㅠㅠ
┗ 잠깐 화장실 다녀온 사이에 올렸었나 보네 우리도 알려줘!
┗ 여기 가을국 유저 없어? 어제 신문이라는 거 보니까 신문 보면 저 영애 누군지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 (사진) 이건가 봄 ㅇ.ㅇ
┗ 웅웅 헤드라인 잘 보인다. 봄국 데이지 마야 에스텔라라는데?
┗ 다들 커뮤만 붙잡고 있어? 반응 엄청 빠르네 ㄷ ㄷ
┗ 와아아 공유 감사해요 영애 ㅠㅠ
┗ 엄청 궁금했는데 고마워!
┗ 미쳤어;; 맘대로 신상 까면 어떡해;
┗ 내 말이 ㄷ ㄷ 저 영애 아니면 어쩌려고ㅜㅜ
┗ 가을국 유저면 저거 찐인 거 다 알걸 ㅋ 가을국 황실 그 음침함 생각하면 봄국 영애 황실 들일 생각 없는 거 아님. 그럼 절대 기사 못 나왔음 ㅋㅋ
┗ 엘런은? 엘런도 담은 거 진짜야?
┗ 진짜일 거 같은데?
┗ 확신 ㄴㄴ 그건 증거 없잖아
┗ 봄국 영애가 탐사대 가서 알렉스 담은 게 진짜면, 엘런은 당연히 담았겠지... 엘런은 봄국 남주니까
┗ 아니 그건 추측이고
┗ 글쓴이: 영애들 제정신이야??? 빨리 사진이랑 이름 내려! 이걸 박제해두면 어떡해?!
쉴 새 없이 반짝이는 워치의 불빛이 노트북 화면에 반사됐다.
이런 상황이었구나.
피곤함에 눈이 뻑뻑해서 양미간을 눌렀다. 그래도 나아지지 않아 그냥 노트북을 접었다.
자연스레 시선이 창밖으로 흘러갔다. 까만 밤하늘에 박힌 거대한 숫자가 변해 있다.
12 15 : 08 : 29 : 40
몇 시간 사이 5명이 줄었다.
아직 선택 안 한 유저들 몇 명이 제 슬롯을 공개했다고 하니까, 그동안에 그들이 선택을 한 게 아닐까 싶었다.
초 단위로 내게 쏟아진 메시지를 보면 영애들은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안을 통제하고 싶어 했다.
나는 고민했다.
내 슬롯을 모두 공개해야 할까?
유저들에게 정보를 주어 그들의 불안을 끊어 내고 싶었다. 그들의 부정적인 감정이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는 걸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요한의 존재를 알리는 게 어떤 반향을 가져올지 알 수 없었다.
시스템의 오류를 폭로하는 게 옳은 걸까.
확실한 건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나는 이 격렬한 관심을 받으며 고민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삐.
날카로운 이명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 정신으로 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피곤하다.
생각 좀 그만하고 싶다.
포기하고 내 슬롯 리스트를 공개해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이게 현명한 선택인지 모르겠다.
맑은 정신이 간절하다.
그러나 지금 잠이 올 리가 없으니, 이것부터 끝내는 게 맞는 것 같았다.
공유하자.
계속 피할 수도 없잖아.
똑똑.
슬롯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 다시 노트북을 여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나가 보니 문 앞에 커다란 가방을 든 아샤가 서 있었다.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고개를 돌려 요한의 방을 쳐다봤다.
“환자가 문을 안 열어 주네요.”
아샤는 어깨를 으쓱했다.
“일단 계속 치료는 해 봐야죠.”
“……지금 공지 내려온 거 아시죠?”
“네. 자고 있었는데 공지 나왔다고 억지로 깨우더라고요.”
아샤는 불만스러운지 살짝 미간을 좁혔다.
“혹시 커뮤니티 아직 안 보셨어요?”
“난리 난 건 봤어요.”
“제가…….”
“알아요.”
아샤는 고개를 까닥 움직여 요한의 방을 가리켰다.
“아직 재앙은 2주 넘게 남았고, 저 남주는 오늘내일하잖아요.”
아샤는 재앙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 반응이 편안해서인지 순간 뻑뻑했던 눈이 부드러워졌다.
“오라 영애한테 연락해 볼게요. 문 좀, 열어 달라고.”
나는 노트북으로 메시지를 보내려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아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네, 적당히 울고 나와요. 저 오늘 약속 있어서 일찍 퇴근해야 하거든요.”
***
아샤는 잠든 요한의 팔에 바늘을 꽂고 수액으로 보이는 주머니를 높게 걸었다.
옆에서 눈치를 보며 서 있던 오라가 내 옆에 앉자 침대가 살짝 움직였다.
“데이지, 미안해요.”
가라앉은 목소리가 조용한 공기 속으로 파고들었다.
“아니에요.”
나는 짧게 웃어 보이고는 다시 요한의 몸에 젖은 거즈를 붙였다. 따라 일어선 오라가 내게 다가왔다.
“저도 도울게요.”
사실 혼자 해도 됐지만, 여기서 거절하면 오라가 더 죄책감을 느낄 것 같아서 나는 얼음물에 담가둔 거즈 하나를 건넸다.
오라는 얼른 대야에 거즈를 쭉 짜고는 살살 펴서 요한의 어깨에 붙였다.
수액을 고정한 아샤가 오라 영애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협탁으로 걸어갔다.
“누군가는 그 과열을 중재해야 했어요.”
나지막한 목소리가 아샤의 걸음을 따라붙었다.
“아니요. 그래도 데이지 영애에 대해서 말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반대쪽으로 걸어간 아샤가 약초를 그릇에 넣으며 차갑게 말했다.
“분위기가 정말 심각했어요. 몇몇 영애들이 사람을 표적으로 삼고 욕하더라고요.”
나는 아직 아이시스에 대한 저격 글을 읽지 못해서 뭐라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무심한 아샤가 저렇게 말할 정도면 상황이 정말 심각했다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잘하셨어요.”
나는 어쩔 줄 모르는 오라를 보며 말했다.
“어차피 슬롯 리스트를 공유할 생각이었거든요. 일 더 커지기 전에 막아 주셔서 다행이에요.”
잠시 침묵이 일었다.
약초를 갈아 준 아샤가 가방을 정리하고는 일어섰다.
“저 수액은 한 시간 후면 다 들어갈 거예요. 그리고 아마 하루 이틀 후면 이 남주도 일어날 거고요.”
아샤가 입매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제가 영애 남주한테 뭘 주입하는지 알아요?”
아샤의 질문을 듣고 나서야 내가 그녀를 무조건 신뢰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당황해서 쳐다보자 아샤가 답했다.
“엘릭서예요.”
“네?”
엘릭서?
근대 로판 세계관에서 판타지 요소가 짙은 엘릭서가 등장하니 조금 괴리감이 들었다.
그것도 가장 이성적인 의사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나는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제 처방전 버프에서 보고 만든 거니까 맞을 거예요. 시스템이 만든 엘릭서 제조법인데, 당연히 그 엘렉서겠죠.”
아샤가 요한에게 시선을 내렸다.
“궁금하네요. 시스템이 정한 만병통치약과 버그가 일으킨 질병이 싸우면 누가 이길지.”
흥미 가득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는 모순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왜 결말에 창과 방패가 부딪치는 장면이 없는지 아쉬웠거든요.”
그녀가 피식 웃었다.
“이번엔 볼 수 있겠네요. 창이 이길지 방패가 이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