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OP 100 영애-153화 (154/208)

CH13. 시스템 전체 공지 


153화.

선선한 새벽 공기를 들이마신 도로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밀도 높은 거름 냄새에 기절할 것 같았다.

메탄가스에 중독된 기분.

그녀는 눈물을 삼키며 광활한 밭을 바라보았다.

“농사를 가볍게 여긴 대가인가…….”

보통 여주라면 이렇게 넓은 옥토를 소유했다고 해서 밭일을 하지 않을 텐데. 이건 #농지경영물 키워드 때문에 벌어진 비극이었다.

K-로판에서 #직업물 #농지경영물이라는 키워드가 함께 담겼다.

피할 수 없는 노동의 시작이었다.

삽을 고쳐 맨 도로시는 턱 밑에 내려 두었던 손수건을 콧잔등까지 올리고 나무 대야에 물을 부었다.

물론 일꾼을 쓰고 있긴 하지만, 도로시의 손길이 필요한 부분이 있었다.

그녀는 버프를 이용해 오늘 치 천연 살충제를 배합했다.

사계국에는 특이한 설정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건국사와 연결된다.

태초의 사계국 역사는 봄국, 여름국, 가을국의 황제가 생명의 이능을 가진 여인에게 반해 그녀의 아이를 황제로 올리며 시작이 되었다.

역하렘의 숙명.

이부형제.

봄국, 여름국, 가을국의 2대 황제들은 형제이자 지독한 경쟁자였다.

그들은 제 어머니에게 인정받고 싶어 이능을 과시하며 국토를 꾸며 댔다.

봄국 황제는 국토를 화려한 꽃으로 뒤덮었고, 여름국 황제는 울창한 수림과 산지를 만들고, 가을국 황제는 낙엽과 열매가 공존하는 풍요로운 풍경을 조성했다.

그렇다. 

제국에 배정된 대부분의 나무와 꽃들은 생명 이능의 부산물이었다.

먹을 수 없고, 애초에 황실이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어 손을 댈 수도 없었다.

그림의 떡. 그저 보기 좋은 배경 스킨일 뿐이다.

그러다 보니 좁은 경작지에서 농작물을 재배해야 했는데,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계절이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봄 날씨, 여름 날씨, 가을 날씨. 국토에 배정된 날씨가 한정적이니 작물을 재배하기 까다로웠다.

성공적인 농작을 위해 온도와 습도 조절은 필수.

그렇다 보니 농경 기술은 아주 고급 기술이라 사계국의 농부는 최고의 기술자로 존경받았다.

가을국은 조국의 이름값을 하듯, 농사꾼이 많아 풍요롭게 모든 작물을 재배할 수 있었는데 그중 가장 많은 농작물을 생산하는 이가 바로 #농부여주 도로시였다.

도로시는 바다처럼 끝도 보이지 않는 경작지를 보며 속으로 작게 욕을 읊조렸다.

‘망할. 언제 끝나아아아악!’

#농부여주는 자연 속에서 힐링하는 게 국룰 아니냐고. 뭔 노동이야.

도로시는 거대한 나무 대야에 물과 살충 기능을 하는 약초를 넣은 뒤 안에 들어가서 발로 밟았다.

[특성 버프 ‘해충 퇴치사’ ON]

이 천연 살충제는 그녀가 배합하면 살충력이 100%가 되었다.

다크서클이 광대까지 내려온 도로시는 넋이 나간 채 살충제를 만들며 들판을 쳐다봤다.

농사 자체가 고도의 체력을 필요로 하는 작업인지라 과로는 숙명으로 따라왔다.

고개를 빳빳이 쳐든 푸른 벼들이 그녀의 폭력적인 욕구를 자극했다.

‘불 질러 버릴까…….’

리X 포레스트를 원했지, 농노의 현실 다큐를 원한 게 아니라고.

도로시 또한 플랫폼 설문 조사의 피해자였다.

촉촉이 젖은 시야로 산처럼 쌓인 살충제 재료가 보였다.

‘나 은퇴할래.’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마님! 마니이임!”

“도로시! 아, 아니 부인!”

저 멀리서 그녀를 찾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로시의 하인과 남편이었다.

“어제도, 새벽에, 허억 들어왔는데, 벌써 일하러 나오면 어떡해요.”

고작 50M 정도 달렸을 텐데 도로시의 남편이 심장 부근을 움켜쥐며 숨을 헉헉 몰아쉬었다.

‘이놈 때문에 내 빙의 인생이 망가졌어!’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고작 2시간만 자고 다시 일하러 나온 #농부여주의 눈동자에 분노가 가득 차올랐다.

그 순간이었다.

구름이 걷히며 아침 햇살이 그들 사이로 조심스럽게 내려앉았다.

웅크렸던 허리를 펴며 그녀의 남편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결 좋은 밀빛 머리칼과 창백하다 싶을 만큼 새하얀 얼굴이 맑은 햇살에 반짝였다.

그 후광을 모조리 제 것으로 흡수하며 도로시의 남편이 손끝으로 눈가를 닦았다.

도로시는 흠칫했다.

훌쩍임 소리가 심장을 쥐어짰다. 그는 #병약미 키워드를 가진 남주였다.

청순한 얼굴과 다소 가녀린 체격. 남주 안에 자리한 키워드를 극적으로 부각하는 외모.

도로시는 가만히 자신의 남주 선호 키워드를 머릿속으로 되짚어 봤다.

#병약미 #예민미 #청순미 #자낮남주 #처연남.

바로 눈앞에 제 선호 키워드를 응집해 둔 남주가 서 있다.

대농원 주인을 위해 일하던 농노의 딸로 빙의했던 도로시는 주인의 청순한 아들에게 첫눈에 반해 고민도 하지 않고 남주 선택을 해 버렸다.

어쩔 수 없었다.

그녀의 남편은 성적 욕구보다 무섭다는 부양 욕구를 자극하는 남주였으니.

“으윽…….”

도로시는 남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목 끝까지 차올랐던 분노가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래, 내가 일 좀 더 하지 뭐. 저렇게 꽃같이 예쁘고 연약한 우리 애기 손에 어떻게 흙을 묻혀.’

도로시는 나긋한 말투로 남주의 손을 털어 주었다.

“여보, 삽은 왜 들고 나왔어요. 에이, 지지예요.”

얼굴을 붉힌 도련님, 아니 남편이 쭈뼛거렸다.

“오늘은 같이 일 돕게 해 준다고 했으면서, 또 새벽에 혼자 나가고…… 서운해요.”

그야, 네가 도와주면 일이 더 많아지니까요.

오늘 도로시가 새벽부터 나와 살충제를 만드는 이유는 어제 그녀가 열심히 만든 살충제 대야를 남편이 엎어 버린 탓이다.

하지만 가뜩이나 #자낮남주인 남편의 자존감에 상처를 줄 수 없어 도로시는 웃으며 돌려 거절했다.

“이렇게 나와 준 것만으로도 힘이 되는걸요. 도와주고 싶으면 저기 앉아 있어요.”

“네? 앉아서 어떻게 도와줘요?”

“저는 여보 얼굴만 봐도 힘이 나요. 저기에서 얼굴 잘 보이게 앉아 있어요.”

“농담하지 마세요.”

“농담 아닌데요?”

남편은 뭔가 찜찜했지만, 아내가 너무 진심으로 말하니 더 뭐라 할 수 없어 둔덕에 가서 앉았다.

푸른 밭을 배경으로 앉은 미인의 모습이 도로시의 눈에 담겼다.

‘역시 남편은 잘생긴 게 최고구나.’

그녀는 정말로 HP가 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농부여주가 되길 잘했다.

대농원의 도련님을 가질 수 있다면 몇 번이고 이 논밭을 갈아엎을 수 있다.

결연하게 다시 버프를 켜는 도로시의 앞에 갑자기 상태창이 번쩍 나타났다.

[전체 공지]

웬 전체 공지?

또 중간 평가 하나?

벌써 여주들이 [전]을 완성한 건가 놀란 도로시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가 알기로 아직 남주 선택을 안 한 여주들이 꽤 있었기 때문이다.

[유저 ‘시대의 예언자’가 예언을 누락했습니다.]

[유저 간 공정한 정보 공유를 위해 시스템에서 전체 공지로 예언을 공유합니다.]

‘쯧쯧.’

도로시는 속으로 혀를 찼다.

성녀 영애가 사고를 친 모양이었다.

요즘 신년제 기간이라 영애들이 밤새 술을 마시고 놀던데 성녀 영애도 술병 때문에 제 업무를 잊은 듯했다.

평온하게 상태창을 읽던 도로시가 미간을 확 좁혔다.

[3월 1일, 마왕이 동면에서 깨어납니다.]

마왕이 깨어난다고?

도로시는 잠이 덜 깬 건가 싶어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그러나 상태창은 더 충격적인 말을 내놓기 시작했다.

[마왕의 기상일까지 S급 남주의 시나리오가 오픈되지 않으면, 사계국이 동결됩니다.]

[다행히 현재 S급 남주는 플레이 중인 유저의 슬롯에 담겨 있습니다.]

[‘재앙’을 막기 위해 S급 남주를 선택해 보세요!]

시스템은 예언자를 대리하듯 제가 세상의 종말을 예언했다.

[유저들의 원활한 ‘재앙’ 극복을 위해 시스템 관리 정보를 공유합니다.]

딱딱한 기계음과 함께 하늘에 하얀 숫자가 새겨졌다. 마치 구름처럼.

17

[현재 남주를 선택하지 않은 유저는 17명입니다.]

떠오른 숫자의 설명이 이어지고, 그 옆에 또 새로운 숫자가 나타났다.

15 : 23 : 59 : 59

[제한 시간은 16일입니다. 그 안에 ‘S급 남주’를 선택하면 ‘재앙’이 자동 종료됩니다.]

시스템이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

제목: 전체 공지 실화임????? [1]

제목: S급 남주 선택 안 하면 마왕이 깬다니 그게 뭔 소리냐 [3]

제목: 신년제 만우절 같은 거야? 저 숫자들 내일 되면 사라지는 거? [0]

제목: 딴소린데. 아직 남주 선택 안한 유저 17명밖에 안 돼? [0]

커뮤니티에 글이 폭발적으로 올라왔다. 새벽에 내린 전체 공지 때문이었다.

몇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하늘의 숫자를 보며 그들은 이게 장난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영애들은 그제야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제목: 살아야 한다. S급 남주 찾자. [23]

『아직 선택 안 한 영애들 17명 남았으니까, 영애들이 남주 듀스 101 상위권 후보 한 명씩 선택하자 ㅇㅇ』

┗ ★TOP 5 남주 슬롯에 담은 영애를 찾습니다★ 알렉스, 엘런, 이그니스, 레오날드, 그레고리. 여기 다섯 남주 잡은 영애들 손 들어주세요!

┗ 전에 S급 남주 랭킹 선정할 때 저 남주들 슬롯에 담은 영애들 없었어 ㅠㅠ

┗ 괜히 TOP 5냐고……. 황태자, 공작, 마탑주 다들 넴드 권력자라 경비가 빡세지요…….

┗ 그땐 페널티 때문에 커뮤하는 영애들 30명밖에 안 됐고 이젠 다시 100명이잖아

┗ ㄴㄴ 겨울국 황녀님 빼야지. 99명

┗ ㅠㅠ 리안 영애도 빼줘…

┗ 아... 진짜 많은 일 있었네 하 진빠진다ㅜ

┗ 안돼! 정신 차려 영애들! 지금은 진 빠질 때까 아니야!!!

┗ 저기 그레고리 마탑주는 내 지인 영애가 선택한 남주야. 그 영애 커뮤 끊어서 대답 못한 듯! 참고로 그레고리 A급 남주ㅠ

┗ 아아, 아쉽다ㅠㅠ

그때 누군가 의문을 제기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