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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0 영애-152화 (153/208)

152화.

초점을 맞추듯 미동하던 눈동자가 내려갔다. 요한은 제 팔을 감싼 천을 보고는 움찔했다.

들킬 줄 몰랐던 것처럼.

그게 화가 났다.

“마족들은 팔을 잘라 내면 새로 자라나요?”

비꼬듯 물었는데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알렉스랑 싸운 상처 때문에 이렇게 된 거죠?”

다시 물었지만, 요한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커지는 숨소리를 꾹 누르며 다시 물었다.

“마족 지대로 가면 치료할 수 있어요?”

요한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모르겠습니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

그제야 답이 돌아왔다. 그리고 듣고 싶지 않던 답이었다.

발끝부터 올라오는 공포감을 외면하며 다시 물었다.

“언제 말하려고 했어요?”

요한은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경기가 끝나면 말할 생각이었습니다.]”

나는 요한이 편히 잘 수 있게 일부러 조도를 낮춰 두었다. 그래서 방 안에는 오직 가느다란 촛대 하나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요한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그 작은 빛마저 등지게 되었다. 그의 얼굴은 절반이나 어두운 그림자에 파묻혔다.

요한은 무의미한 위로를 건넸다.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와중에 걱정한답시고 나를 살피는 시선이 불편했다.

나는 고개를 내려 침대 모서리를 응시했다. 그러자 붕대에 감싸인 팔이 시야에 들어왔다.

온몸의 핏기가 가시는 공포감이 다시 밀려온다. 나는 입을 달싹이다 물었다.

“돌아가면 나을까요?”

요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저는 의사가 아니지만 돌아가면 나을 거라고 생각해요.”

아샤의 말대로 요한의 상처는 시스템의 오류 같았다. 그리고 오류가 난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뿐이다.

요한이 제 플레이 존을 벗어나서.

나는 그를 치료해 줄 수 없었고, 사계국에서 모든 이를 치료할 수 있는 사람조차 요한을 낫게 해 줄 수 없었다.

시간이 더 흐르면 어떻게 될까.

기적적으로 시스템이 다시 요한을 인식할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나는 그 어떤 위험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무조건 안전한 방향으로 시도를 해야 했다. 요한이 죽는 건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조용히 그를 설득할 방법을 생각하는데 요한이 몸을 움직였다.

아직 검게 물들지 않은 손이 시야로 들어와 내 턱을 들어 올렸다.

맞춰진 시선 끝에 푸른 눈동자가 있었다.

어둠에 파묻힌 눈과 따뜻한 촛불에 물든 두 눈동자가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 그래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모순된 눈에 사로잡힌 나는 강제로 요한에게 생각을 읽혀야 했다.

나도 모르는 생각을 그는 오랫동안 읽었다.

그게 불편해서 나는 질문으로 침묵을 끊었다.

“……혹시 마왕을 배신할 수 있어요?”

기어코 새어 나온 본심이 다시 머릿속을 채웠다.

엘런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요한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렇다고 믿고 싶은 건지 정말 내 직감인 건지 모르겠다.

나는 요한의 대답을 기다렸다.

적어도 요한은 내가 S급 남주인지 아닌지 확인해 볼 수 있었다.

그가 마왕 대신 나를 선택한다면, S급 남주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요한은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어둠을 채운 무거운 공기가 모든 감각을 불편하게 한다. 밀도 높은 숨이 폐부를 가득 채워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었다.

흐름을 잃은 호흡과 빨라진 심박에 몸이 긴장했다. 머리부터 손가락 끝까지 바짝 굳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긴장이 풀어진 건 한순간이었다.

말없이 나를 쳐다보던 요한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합니다.]”

짧은 말이나, 내게는 확실한 답이었다.

“[저는 그분을 거스를 수 없습니다.]”

긴장된 몸이 탁 풀어졌다.

그리고 그걸 확인하는 순간 나는 내가 요한을 선택하고 싶어 했다는 걸 깨달았다.

감이 아니었다.

욕심이었다.

이 와중에 나는 내가 원했던 선택을 깨달았다.

선택지가 좁아졌으니 안도해야 하는데 실망하고 있다.

제정신인가?

디아나와 아이시스가 나를 달래려 해 준 말에 내 마음이 선택의 요소라고 믿은 모양이다.

이렇게 사람이 이기적일 수 있나.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곧 그 분노는 부끄러움으로 그리고 무기력함으로 변해 갔다.

나는 복잡하게 머릿속을 채운 감정들을 외면하려 반사적으로 태연한 척 대답했다.

“이해해요.”

“[데이지.]”

갈라진 목소리로 요한이 시선을 청했다.

나는 다시 눈동자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약속했잖습니까. 대회에서 제가 이기면 데이지가 제 소원을 들어주고, 지면 제가 데이지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갑작스러운 소원 얘기에 나는 잠시 그를 멍하게 바라봤다. 그리고 그대로 인상을 썼다.

지금 당장 돌아가서 치료를 해야 하는데 아직도 대회 이야기를 하는 게 어이가 없어서.

그러나 뭐라 날 선 말을 쏟기도 전에 요한이 웃으며 먼저 말했다.

“[소원으로 제게 돌아가 달라고 말하려 했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어지러운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나 입가에 띤 미소는 그대로였다.

“[그날 소원을 내기로 걸었을 때, 계속 사계국이 얼마나 위험한지 말하던 걸 그만두었죠.]”

웃음기 없는 목소리가 전해진다.

“[그 이후로 더 이상 사계국이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한 번도 해 본 적 없다는 여행을 의무처럼 준비했습니다.]”

천천히 올라간 눈꺼풀 아래로 맑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어두운 눈동자와 밝은 눈동자가 동시에 나를 담았다.

“[뭐가 그렇게 어렵습니까.]”

감정 없는 말이 고막을 파고든다.

“[돌아가라고 한 마디만 하면 되는걸.]”

그러나 차가운 말투와 달리 내 턱 끝에서 움직이는 손가락은 느릿하고 조심스러웠다.

“[이러면서 왜 마음에 담았는지 물으니, 나는 뭐라고 답을 해야 할까.]”

나직한 혼잣말인데, 요한의 말은 고막을 거칠게 찢으며 박혀 왔다.

길어진 침묵을 끊은 건 요한이었다. 그가 웃으며 물었다.

“[내 소원은 뭐였을 거 같습니까.]”

질문이었으나, 요한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내 어깨를 당겼다. 빠르게 낚아챈 것도 아니고 아프게 힘으로 이끈 것도 아니었다.

거절하려면 언제든 뿌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요한이 원하는 대로 이끌려 갔다. 그리고 그가 내 쇄골에 이마를 파묻는 것도 그대로 두었다.

제가 원하는 대로 해 주었는데도 요한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내려다본 그의 표정은 아주 어두웠다.

요한은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숙였다.

따뜻한 숨이 가슴께를 간질였다.

심장이 빠르게 뛰어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니, 생각이 너무 많아서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낯설고, 불안하고, 화가 났고, 겁이 나고.

“…….”

그리고 미안했다.

입이 열리지 않는다.

화를 낼 수도, 사과할 수도 없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런 복잡한 생각은 또 요한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조각나고 말았다.

요한은 내 손을 잡아 제 뒷머리 위에 올렸다. 그러자 몸이 더 깊게 맞물렸다.

요한은 상체에 아무것도 걸치고 있지 않았다.

내가 얼결에 제 어깨를 짚자 그가 움찔했다. 손바닥 아래로 단단하게 조여드는 근육이 느껴진다. 그 작은 반응이 내 안에 팽팽히 당겨져 있던 무언가를 끊어 냈다.

복잡한 감정의 덩어리에 놓여 있던 낯섦 하나가 사라졌다.

요한도 긴장하고 있구나.

왜인지 그게 안심이 돼서 긴장감이 조금 풀어졌다.

그 분위기에 용기가 생긴 나는 다시 입을 열 수 있었다.

“무슨 소원을 빌려고 했어요?”

“[말할 수 없습니다.]”

“말 못 하는 소원이라니, 사람 불안하게 하네요.”

요한이 실소했는지 목덜미에 닿는 숨이 간지러웠다.

한참 뒤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데이지.]”

“네?”

요한은 또 침묵했다.

무슨 말이길래 그가 망설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참 후에 그가 머뭇거리던 말이 선명히 들려왔다.

“[제가 옆에 있는 게 부담이 됩니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요한은 움켜쥐고 있던 내 손을 놓았다. 그 손은 내 등으로 내려왔다.

그는 그대로 나를 깊게 끌어안았다. 그 뒤로 무언가가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저 그는 가만히 나를 안고 있었다.

촛대에 박힌 나무 심지가 타닥거리며 고막을 간질였다.

타들어 가는 불을 보고 있으니 마족 지대에서 사계국으로 처음 돌아오던 날이 떠올랐다.

나는 기껏 요한이 만들어 준 이글루에 들어가지 않고 모닥불 앞에서 함께 밤을 새웠다.

깨끗한 밤하늘을 채운 하얀 별들이 머릿속을 스친다.

다정하게 아침을 기다리는 별의 이야기를 해 주던 그 모습도 떠올랐다. 가장 추운 곳에서 가장 따뜻한 마음을 느꼈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 장소에서 보낸, 존재하지 않아야 할 시간이었다.

시스템은 그저 바로 잡고 있을 뿐이다.

이별은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확실한 건 나는 요한이 살아 있길 바랐다. 제가 있던 곳에서 안전하게 지내길 바랐다. 그런 마음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나는 입을 다문 채 손안에 들어온 요한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다.

한참 후. 요한이 침묵 속으로 제 목소리를 밀어 넣었다.

“[대회가 끝나면 돌아가겠습니다.]”

그는 내 침묵을 읽고 있었나 보다. 스스로 답을 찾은 요한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돌아가겠다고 말해 주었다.

나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못했다.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딱히 세지 않았고, 느낄 수도 없었지만, 시간이 멈출 일은 없으니 흘러갔을 것이다.

커튼을 모두 쳐 두어서 여전히 한밤중일지, 새벽이 밝아 오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작은 촛불 하나에 의지한 어둑한 방. 나는 요한의 체온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가 노력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겁먹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누군가 왜 그렇게 생각했냐고 묻는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평온해지는 마음이 그런 답을 찾게 했다고 말해야 했다.

침대 바닥에 흩어진 내 머리칼을 천천히 쓰는 요한이나, 그의 뒷머리를 안고 있는 나나.

서로를 배려할 뿐 무언가를 하지 않았다. 그 뒤로 이어진 대화 또한 없었다.

요한이 잠들면 방으로 돌아가려 했는데, 내 머리를 쓰는 손길은 끝내 멈추지 않았다.

결국, 내가 먼저 잠이 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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