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요한! 요한 괜찮아요?”
몸을 흔들어 봤지만, 요한은 눈을 뜨지 못하고 오히려 팔을 침대 아래로 툭 떨어뜨렸다.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오라가 마석 등불을 켰다.
“세상에!”
어느새 내 뒤로 다가온 오라가 소리를 질렀다.
“파, 팔이 왜 이래요?”
낮은 조도의 불빛이 방 안을 밝혔다. 그 덕분에 소매 아래로 드러난 요한의 팔이 선명하게 보였다.
요한의 팔은 검은색이었다.
순간 요한과 알렉스가 처음 만나던 날, 가시덩굴이 요한의 손목을 으스러트릴 기세로 옭아매던 장면이 뇌리를 스쳤다.
나는 그의 옷소매를 더 높이 걷었다.
요한의 상태는 심각했다. 어깨부터 팔목까지 피부가 괴사했고, 살갗에서 갈색 진물이 흘러나왔다.
내가 의사는 아니지만 지금 이 상처가 말도 안 되는 상처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대로 내 방으로 돌아갔다.
“어떻게 하려고요?”
나를 따라온 오라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태블릿 피시를 들고 다시 옆방으로 돌아가며 말했다.
“가을국에 #명의여주가 있잖아요. 그분한테 물어보려고요.”
카메라로 팔에 초점을 맞추자 사진이 찍혔다.
“이런 상처 보신 적 있으세요?”
나는 사진과 메시지를 보내며 오라에게 물었다.
그러나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자 오라는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사실 시한부나 어릴 때 잔병이 있는 남주가 아니면 아픈 남주를 본 적이 없어요. 저주나 흉터를 가진 남주도 있다고 듣긴 했는데, 그건 보통 얼굴에 문제가 생기는 거고 또 남주 선택을 하면 바로 사라져서…….”
그러니까 없다는 말이었다. 이렇게 팔이 썩어 들어가는 남주는.
나는 초조하게 태블릿을 보며 #명의여주의 답장을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시지 풍선 옆에 자리한 1이 사라졌다.
***
“선생님, 다음 환자는 에스터 백작 부인이세요.”
명의 여주는 조수를 보지도 않고 손짓했다.
나가라는 뜻이다.
축제 기간이라 전국에서 유저와 캐릭터들이 몰려든 탓에 그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유저들이 부탁한 재생 연고를 제작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빠듯한데 말이다.
‘버프는 자동화 안 되나?’
명의 여주 아샤는 피곤한 한숨을 내쉬었다.
진료를 위한 ‘만능 질병 스캐너’와 어떤 병이든 고쳐 내는 약을 만드는 ‘내 손이 약손’ 버프가 있지만, 버프는 모두 본인이 직접 시전해야 했다.
그러니 진료를 보든지 약을 만들든지 둘 중 하나만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한 명 진료를 볼 때마다, 30분은 약을 만들며 번갈아 두 가지 일을 했다.
그런 바쁜 와중에 메시지가 온 것이다.
아샤는 흘긋 테이블에 올려 둔 노트북을 봤다.
웬만하면 메시지 확인을 하지 않으려 했는데, 미리 보기 창에 뜬 글자가 호기심을 자극했다.
[(사진)]
“대체 무슨 사진을 보낸 거야.”
호기심을 누르고 다시 약을 제조하던 명의 여주는 1분 만에 장갑을 벗고 노트북 앞에 앉았다.
사진만 보고 다시 만들자.
메시지 창에 들어간 순간 아샤는 윽, 소리를 내며 눈을 찌푸렸다.
썩은 바나나 같은 사진이 하나 와 있었다. 그러나 사진보다 더 충격적인 내용이 아래 적혀 있었다.
“이게 남주라고?”
명의 여주는 노트북 화면을 당겨 사진을 자세히 확인했다.
***
똑똑.
문을 두드리자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벌컥 열린 문틈으로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름국에서 독향에 중독되었던 봄국 유저였다.
“바쁘실 텐데 빨리 와 주셔서 감사해요.”
“아니에요.”
아샤는 어둑한 방 안을 보며 살포시 눈을 찡그렸다.
커뮤니티에서 사진으로 봤을 때는 화려한 호텔이었는데, 어둠에 젖어 그런지 좀 음산한 느낌이 났다.
문을 닫은 아샤는 바로 환자에게 다가갔다.
협탁에 놓인 작은 등불만이 넓은 어둠 속에 자리했다.
“불을 더 켜도 되나요?”
“아, 네. 불 켜고 올게요.”
제가 어두운 곳에 있다는 것도 몰랐던 건지, 그녀는 그제야 주변을 보고 놀랐다.
곧 곳곳에 자리한 마석 등불에 불이 들어왔다. 차츰 실내가 밝아지며 환자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땀에 젖은 은발이 반짝이고 안색은 창백했다.
남주를 보던 아샤가 버프를 켰다.
[특성 버프 ‘만능 질병 스캐너’ ON]
천천히 남주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던 아샤는 미간을 찌푸렸다.
‘왜 상태창이 안 뜨지?’
보통 아픈 부위에서 상태창이 떠 병명과 치료법을 알려 주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것도 뜨지 않았다.
아샤는 다시 천천히 남주의 전신을 살폈다.
그러나 여전히 고요했다.
“남주라고 했죠?”
아샤의 물음에 커튼을 젖히던 데이지가 움직임을 멈췄다. 반쯤 열린 커튼 틈으로 붉게 물든 햇살이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네. 맞아요.”
그녀는 마저 커튼을 열며 답했다.
“아직 선택은 안 한 거고요?”
“네, 아직 슬롯에만 있어요.”
촤르륵.
말끝을 흐리던 그녀는 다른 커튼을 젖히며 시선을 피했다.
침대를 덮친 붉은 노을이 남주의 얼굴을 비췄다. 그래서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꼭 핏자국처럼 보였다.
아샤의 눈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가방을 열어 가위를 꺼냈다. 망설임 없이 요한의 옷을 잘라 낸 아샤는 알코올을 그대로 거즈에 적셔 목과 얼굴을 닦았다.
“도와드릴까요?”
침대로 다가온 데이지가 묻자 아샤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코올 병과 거즈를 건넸다.
“일단 몸을 닦고 열부터 내려야겠어요. 약은 먹었나요?”
“네, 어제 호텔에 있던 상비약을 먹었어요.”
“해열제 말하는 거죠? 잘했어요.”
“근데 효과가 없어요. 어제는 그래도 말도 하고 서 있었는데 오늘은 눈도 못 뜨고…….”
“상처는 2주 전에 난 거라고 했죠? 지금까지 이 상태로 버틴 게 기적이에요. 현생이었으면 감염으로 벌써 죽었어요.”
담담하게 말하며 아샤는 요한의 팔에 남은 알코올을 모두 쏟았다.
“사실 이런 남주는 처음이라 저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원래는 처방전이 상태창으로 떠야 하는데, 이 남주는 문제가 없는 거로 인식되고 있거든요.”
“그럴 리가요. 팔이 저렇게 문드러졌는데요.”
“그러니까요.”
아샤가 미간을 좁혔다.
“엑스트라도 다치면 상태창이 인식하는데 왜 이 남주는 인식을 못 하는지 모르겠어요.”
당황한 듯했지만 아샤는 차분하게 응급처치를 이어 갔다.
“일단 연고를 만들어 줄게요.”
아샤는 볼을 꺼내 약재를 담고는 세심하게 짓이겼다.
도자기 그릇과 막대가 맞닿는 맑은 소리가 적막을 채웠다.
“효과가 있을까요?”
데이지의 질문에 아샤가 잠시 생각을 하다 입을 열었다.
“어제 약 먹었다고 했죠.”
“네.”
아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효과가 있길 바라야죠.”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해가 저무는지 방을 가득 채운 빛이 검붉어졌다.
그 스산한 분위기 사이로 조그마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제가 남주 선택을 하면 괜찮아질까요?”
아샤는 핀셋으로 약초를 요한의 팔에 올리며 조용히 있었다. 까만 살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초록색 반죽으로 피부를 모두 덮은 그녀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될 수 있으면 이 남주는 선택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좀 많이 이상하거든요. 엑스트라도 이렇게 살이 썩지는 않아요.”
아샤는 남주를 응시한 채 말했다.
“알잖아요. 여기 노화도 없는 거.”
그녀는 가방에서 깨끗한 천을 꺼내 약초를 덮었다.
“시스템 오류 같은데, 선택해도 죽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러다 [결] 못 치면 영애만 손해고.”
탄탄히 매듭을 지은 아샤가 어렵게 말을 이었다.
“영애가 캐릭터를 사람으로 보는 건 아는데, 이건 게임이에요. 아직 남은 남주들 많으니까 다른 남주를 찾아봐요.”
아샤는 답지 않게 눈치를 보며 흘긋 봄국 유저를 쳐다봤다.
침대 끝에 걸터앉은 그녀는 말없이 남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 시선을 느꼈는지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놀라 움찔했다. 생각을 들켰을까 걱정하듯. 그녀는 시선을 피하더니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여기까지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데이지는 준비해 둔 주머니를 들어 아샤에게 건넸다. 금화 주머니였다.
아샤는 고개를 저었다.
“치료한 게 아니라 받기 미안하네요. 제가 한 건 그냥 응급 처치라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겠고요.”
거절하려 하자 데이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손에 주머니를 쥐여 주었다.
“그러니까요. 치료비를 냈으니까, 치료를 받은 거죠. 시스템도 그렇게 인식하지 않을까요?”
그녀는 고집을 피우며 아샤를 문까지 안내했다.
“조심히 가세요. 와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아샤는 드물게 짠한 눈으로 유저를 쳐다봤다.
가끔 남주나 주변 인물에게 과하게 애정을 주는 유저들이 있었고, 죽음을 접했을 때 멘탈이 나가는 것도 지켜봤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남주 선택을 하거나 전개 수정을 해서 애착 캐릭터를 살리는 경우가 많은데, 저 봄국 유저는 그럴 기회조차 없을 것 같았다.
그동안 많은 유저들을 도와 전개를 바꿔 준 경험이 있는 아샤는 처음으로 무력감을 느꼈다.
기분이 아주 찜찜했다.
쌀쌀한 가을 거리로 나온 아샤는 묵직한 금화 주머니를 보며 혀로 입천장을 긁었다.
의미 없는 걸 알지만, 이 돈으로 약재나 사야겠다 싶었다.
“장기 치료해 보지, 뭐…….”
이성적인 자신답지 않은 행동이라 생각하면서도 아샤는 다시 한 번 노력해 보기로 했다.
***
요한은 오랫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체온을 내리기 위해 옷을 뜯어 두었는데도,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나는 물수건으로 계속 요한의 몸을 닦아 주며 체온을 내리려 애썼다.
어느새 약초 물이 스며 녹색으로 변한 붕대가 손끝에 닿았다.
‘마족 지대로 돌아가면 회복될 수 있을까?’
어깨를 닦으려던 손에 힘이 빠졌다.
요한이 알렉스를 만나지 않았다면 아프지 않았을까? 아니, 애초에 여기에 오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겠지.
후회는 스스로 몸집을 부풀리듯 새로운 후회를 끌고 왔다. 그러나 다행히 생각은 길어지지 못했다.
요한의 고르던 숨이 깨졌기 때문이다. 모든 정신이 이쪽으로 끌려왔다.
요한이 천천히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