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OP 100 영애-150화 (151/208)

150화.

나는 잠시 시선을 내리고 곰곰이 생각했다.

테이블 위로 정리된 수치와 지금까지 논의한 근거가 잔뜩 쌓여 있었지만, 누군가 막을 씌운 것처럼 흐릿했다.

대체 누가 S급 남주일까.

답을 알 수 없어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말했다.

“지금까지 얘기한 걸로 보면 아이시스의 말대로 엘런이 S급 남주일 거 같아요.”

플랫폼이 선호하는 키워드고 나름대로 전개가 힐링에 가깝기도 했다. 그리고 엘런의 칼에 남겨진 낙서가 걸렸다. 그는 분명 재앙인 마왕과 관련이 있는 사계국 남주였다.

디아나가 묘한 눈으로 나를 보다 물었다.

“엘런을 선택하고 싶어요?”

개인적으로 내가 선택하고 싶은 남주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아, 역시 하루 만에 선택하는 건 무리였어.”

아이시스가 한탄하며 메모장을 응시했다.

“안 되겠네요. 데이지 영애, 조금만 더 생각해 보고 천천히 고르세요. 아직 2주 넘게 남았으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트북을 덮으며 아이시스가 씁쓸하게 웃었다.

“미안해요.”

“뭐가요?”

“선택을 강요해서요.”

“아.”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에요. 어차피 [결]을 치려면 선택해야 하는걸요. S급 남주가 제 남주면 저야 감사하죠.”

나는 남주 등급에 관심도 없었으면서 그냥 저렇게 말했다.

디아나와 아이시스의 눈에 어린 은근한 죄책감이 신경 쓰였다.

뭔가 내몰리는 기분이 들기는 하지만, 어차피 엘런과 알렉스 중에서 한 명을 선택할 생각이었다.

‘나도 이게 게임인 걸 안다고.’

나는 책상을 정리하다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바로 디아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는 아까부터 좀 복잡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걱정, 죄책감 그리고 호기심이 담겨 있다.

긴 눈매를 부드럽게 휘며 디아나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다정히 말했다.

“마음이 가는 대로 선택하세요.”

주어는 없지만 무엇을 뜻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영애의 마음이 가는 대로한 선택이 정답이라고 믿거든요. 결국, 이 재앙은 일어나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을 테니 영애는 S급 남주를 선택하게 될 거예요.”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세요?”

“저는 이 세상이 우리의 행복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고 믿거든요.”

“아, 저 과몰입 진짜.”

아이시스가 못 들어 주겠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이 고마웠다.

나도 모르게 부담을 느끼고 있었는지, 그 말 한마디에 심장 위에 놓여 있던 돌덩이가 반으로 잘리는 기분이 들었다.

다락의 천장으로 들어온 햇살에 뽀얀 먼지가 장막처럼 흩날렸다. 그 따뜻한 시야 너머로 폴짝 뛰는 아이시스가 보였다.

“아, 맞다! 돌아갈 때는 스크롤 써요, 영애.”

그녀는 테이블에 있던 상자에서 스크롤 한 장을 건넸다.

“밖에 아직도 사람들 많을 텐데 조심해요.”

햇볕에 따스하게 달궈진 종이를 받으며 내가 왜 남주 선택에 큰 미련을 느끼지 않는지 깨달았다.

남주가 누구든 상관없이, 나는 이 게임이 좋았다.

따뜻한 사람들 사이에서 보내는 지금이 소중했다.

고작 내 취향 때문에 이 사람들이 모두 희생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나는 손안에 들어온 부드러운 종이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

방으로 돌아온 나는 외투를 벗으며 어깨를 돌렸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는지 아침에 나갔는데 벌써 하늘에 노을이 스미고 있었다.

“시간 진짜 빠르네.”

2주도 금방 가겠지.

S급 남주는 누굴까, 대체.

나는 지친 몸을 침대에 누이며 다시 생각을 정리했다.

그런데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데이지.”

비에른이었다.

이틀 정도 머물다 온다고 들었는데 왜 이렇게 빨리 왔는지 모를 일이다.

나는 바로 문을 열었다. 그러자 반듯한 자세로 선 비에른이 미동 없이 나를 응시했다.

‘뭐야, 분위기 왜 이래?’

뭔가 이상했지만, 그래도 반가운 척 눈을 휘며 웃었다.

“일찍 돌아오셨네요.”

그러나 비에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천사 같은 낯을 차갑게 굳힌 채 느릿하게 손을 들었다.

그의 손에는 신문이 들려 있었다.

봄국이나 여름국은 아직 인쇄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월 주기로 신문이 유통되는데, 가을국은 주간지가 발행됐다. 심지어 신년제 기간에는 특집호로 일간 발행을 했다.

비에른의 손에는 어제 소식을 실은 따끈따끈한 일간지가 쥐어져 있었다.

근데 헤드라인이 좀 이상했다.

[황성을 차지할 영예는 어떤 영애에게 돌아갈 것인가!]

영예. 영애.

그러나 큼직하게 박힌 사진은 재미없는 헤드라인을 충분히 커버했다.

연회장에 들어가는 나탈리아와 내 사진이었다.

가을국의 셀럽, 나탈리아. 그런 그녀와 나를 치정으로 묶었다.

다시 고개를 드니 비에른의 관자놀이에 돋은 힘줄이 보인다.

“황성에 간 거니.”

고저 없는 목소리가 정수리로 꽂혔다.

“내 허락도 없이.”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렇게 바로 걸릴 줄이야.

비에른은 차가운 시선으로 나를 내려 보다 내 어깨 위를 흘긋 쳐다봤다.

“안에 들어가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니? 계속 여기서 대화할 일은 아닌 거 같은데.”

“아, 아뇨! 들어오세요!”

몸을 비키자 비에른이 바로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응접실로 사용하는 거실로 바로 가는 게 아니라 방 하나하나를 살피며 들어왔다.

심지어 옷장도 열어 보고 침대 밑도 들춰 봤다.

“……뭐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

“요하네스는 어디 있지?”

“네?”

“방에 없는 것 같던데 둘이 같이 있던 거 아닌가?”

“아뇨? 방에 없나요?”

어딜 갔지?

갈 데도 없잖아?

그런 생각을 하는데 비에른이 다시 내 집중력을 끌어왔다.

“오늘 웬디에게 오라고 연락을 했으니, 내일부터는 여기서 함께 지낼 거다.”

“네?”

아니 왜!

자유롭게 다니고 싶어서 사용인들을 모두 집에 두고 온 건데!

갑작스러운 비에른의 말에 펄쩍 뛰었다.

웬디랑 방에 같이 있으면 밤에 몰래 나가는 것도 불가능하고 다른 영애들이 놀러 오지도 못할 거다.

하지만 비에른은 단호했다.

“요하네스는 제대로 호위도 하지 않고, 너는 누군지도 모를 사람과 방에서 은밀하게 밀회를 하고, 나 모르게 가을국 황성 연회까지 갔어. 당장 봄국으로 돌아가지 않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

“은밀하게 방에 누구랑 있다니요…….”

“거짓말할 생각은 마라, 데이지. 방금 문 앞에서 마력을 느꼈어.”

스크롤을 써서 돌아온 것뿐인데, 그 마력을 오해한 것 같다.

“오해하셨어요. 여름국 황제 폐하와 가을국 성녀님이 토벌대 일로 만남을 요청하셔서 만나 뵙고 왔어요. 갈 때 스크롤로 편하게 돌아가라고 하셔서 스크롤을 써서 돌아온 거고요. 오라버니가 느낀 마력은 스크롤이에요.”

나는 반으로 찢긴 종이를 보여 주며 말했다.

“……그래. 그 말을 믿으마.”

비에른은 또 밑도 끝도 없는 믿음을 보여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이 막연한 믿음은 뭔데.

나는 내친김에 황실 연회에 대한 것도 변명했다.

“연회에 참석하는 건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황실에서 직접 저를 초대한 거라 무슨 일인지 먼저 알아보려고 했어요. 토벌대 일 때문인지, 아니면 황태자님 때문인지. 이에테르 가주인 오라버니와 함께 참석하면 공식적으로 이에테르가와 황실이 엮일 수 있을 것 같아서 말하지 않은 거고요.”

나는 돌려서 말했다. 양쪽 가문에서 허락한 사이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고.

비에른의 표정이 아까보다도 더 딱딱하게 굳었다.

“또, 그놈이군.”

짧은 말 사이에 한숨이 끼었다.

“아뇨! 알렉스 전하랑 상관없는 일이에요. 황제 폐하께서 직접 초대하신 거라. 아! 그리고 요하네스는 왜요?”

익숙하게 나오는 알렉스 욕에 나는 알렉스를 두둔하다 화제를 돌려 버렸다.

다행히 비에른은 틀어진 화제를 따라왔다.

“몇 번 문을 두드렸는데 말이 없더군. 외출한 모양이야.”

그럴 리가. 요한은 이 세계에 아는 사람도 없는데.

나는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몸이 안 좋아서 자고 있는 걸지도 몰라요. 어제 열이 많이 나더라고요.”

“6시인데?”

“그럴 수도 있죠.”

“역시 완벽한 인간은 없는 건가.”

비에른은 씁쓸하게 혼잣말을 했다.

“완벽한 인간이요?”

“아니야.”

뭔가 실망한 거 같은데.

“요한도 아플 수 있죠.”

괜히 기분이 나빠서 퉁명스럽게 말하자 비에른이 말도 안 되는 얘기를 들었다는 듯 한쪽 눈을 찌푸리며 웃었다.

“데이지, 나는 아픈 검사를 본 적이 없어. 전투 중에 다치는 녀석도 거의 본 적 없고.”

“…….”

“검에 자상을 입어도 하루 이틀이면 낫는 게 이에테르가 기사들이야. 그런데 아프다고 하루 종일 잠을 자다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그 기사들이 이상하다는 생각은 안 해 봤어요?

아무리 남주 월드라지만, 하루 이틀 만에 자상이 낫는 게 이상하잖아.

시한부 남주가 아닌 이상, 다치거나 아픈 남주는 거의 없다 보니 이 세계에서 아픈 기사 남주는 드문 캐릭터인 듯했다.

“…….”

그러고 보니 이상하다.

요한은 왜 아프지?

요한도 남주잖아.

심지어 그에게는 #시한부 #병약미 키워드도 없었다.

나는 비에른 몰래 워치에 손을 올리고 메시지 창을 켰다.

그리고 오라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요한의 방문을 열어 달라고.

***

“영애 부탁이라 열긴 하는데…….”

오라는 찜찜하다는 목소리로 속삭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혹시 영애가 선택 안 하는 동안 다른 영애가 홀랑 선택해서 둘이 있는 거면, 저 좀 곤란…….”

“이상한 소리 하지 마시고 빨리 열어 주세요.”

오라 영애는 #원나잇 키워드에 중독이라도 된 건지 자꾸만 해괴한 소리를 했다.

오라는 마지못해 문을 열었다.

오후인데도 꼼꼼히 커튼을 쳐 둔 덕에 방 안은 어둑했다.

나는 바로 침대가 있는 방으로 갔다. 침대 위에는 요한이 있었다.

“자고 있는데, 이만 나가는 게 어떨까요?”

호텔 주인의 윤리의식 탓인지 오라는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나갈 것을 재촉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침대로 다가갔다.

요한의 이마가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젖은 얼굴을 쓸던 시선은 곧 아래로 미끄러졌다.

하얀 이불이 불규칙하게 오르락내리락한다.

요한이 가쁜 숨을 쉬고 있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