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가 아니에요! 확실해요! 우리가 아무리 메이저 에피소드를 쌓고 열심히 전개를 짜서 랭킹을 올려놔도 남주 시나리오로 무효가 되잖아요!”
아이시스가 미간을 좁혔다.
“그만큼 남주 시나리오가 그들에겐 절대적인 기준이라는 뜻이죠. 그리고 영애도 게임을 하면서 느꼈겠지만, 이 게임은 돈에 진심이에요.”
모든 게임이 그렇지 않나 싶긴 했지만, 눈치 없이 그녀의 말을 끊지는 않았다.
“그러니 랭킹 1위 남주 시나리오는 잘 팔릴 이야기겠죠.”
아이시스는 S급 남주를 게임 제작사의 시점으로 해석했다.
그들이 생각하는 최고의 시나리오.
매출이 좋은 시나리오.
신기하게도 이해가 되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시스가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남주가 가진 키워드를 분석해서 가장 인기를 끌 남주를 찾는 거예요. 그 남주가 베스트셀러 1위 가능성이 있는 S급 남주일 테니까.”
아이시스가 아차차, 소리를 내며 손뼉을 쳤다.
“추가 제약이 하나 더 있어요.”
그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 게임을 만든 웹소설 플랫폼 성향에 맞는 남주를 찾아야 해요.”
이상한 논리인데 일리가 있게 들렸다.
이곳은 취향이 지배하는 로판 월드.
이것은 옳은 일을 하기 위한 기부도 아니고, 세상을 바꾸기 위한 사업도 아닌 오직 나의 즐거움을 위한 감상이기 때문이다.
그중 많은 사람의 취향을 저격한 작품이 매출 1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아이시스의 말대로 플랫폼마다 1위를 차지하는 작품의 키워드와 분위기가 달랐다.
플랫폼별 유저의 취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긴, 나도 이쪽 플랫폼에서는 매달 10만 원씩 결제하는데 다른 집에서는 그 절반 정도만 썼던 거 같아.
아이시스의 논리는 설득력이 있었다.
사람은 결국 제 시야로 보고, 제 경험을 기반으로 생각하는 법.
웹소설 플랫폼이 제작한 게임이니 남주 시나리오 등급은 분명 플랫폼의 베스트셀러 데이터와 연계될 것이다.
“데이지 영애, 남주 키워드 좀 알려 주세요.”
“네!”
나는 순순히 상태창을 켜고 아이시스에게 요한과 알렉스 그리고 엘런의 키워드를 모두 알려 주었다.
아이시스는 노트북 화면을 우리에게 돌려 보여 주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화면에 뜬 알렉스의 키워드를 짚으며 침음했다.
“알렉스가 가진 #후회남 #계략남 키워드는 재밌는데, 이 플랫폼보다는 다른 플랫폼에서 인기가 있던 것 같아요.”
아이시스는 흥미로운 눈으로 그 아랫줄에 쓰인 엘런의 키워드를 짚었다.
“엘런의 #동정남 키워드는 전연령 작품이 대세인 이 플랫폼에서 인기 키워드죠. #북부대공은 스테디셀러 캐릭터 설정이고.”
아이시스는 헤비 독자인 게 분명하다. 그녀는 진지한 눈으로 키워드를 하나하나를 날카롭게 분석했다.
“요한의 #역키잡은 전개만 잘 짜면 코어력이 좋고, #다정남은 요즘 인기 있는 트렌드 남주지만…… 음, #인외남주가 걸리네요.”
아이시스가 손가락으로 #인외남주를 콕콕 찌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인외남주는 호불호가 좀 있는 키워드라.”
디아나는 그런 아이시스가 귀여운지 웃으며 거들어 주었다.
“그렇게 치면 #아포칼립스도 그래. 이건 마이너 키워드야.”
“그러니까. 메이저 에피소드에 집착하는 시스템의 취향을 생각하면 요한은 S급 남주일 가능성이 좀 떨어져.”
“#후회남도 잘 구르면 이 플랫폼에서도 인기 있던데, 알렉스 전개 괜찮지 않을까?”
“제대로 구를까? 충실한 발닦개가 되는 전개면 사실 그만한 #힐링물이 없지. 촘촘히 수놓은 꽃길에, 아니 꽃길이라도 여주가 발도 못 내려 두게 할걸? 종일 부둥부둥 할 테니까.”
나는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첨언했다.
“근데 알렉스가 제 원작 남주인 거 같아요.”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알렉스는 <첫 지옥> 남주잖아요.”
당황하는 두 사람에게 나는 황제와 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자 아이시스가 환하게 웃으며 손뼉을 쳤다.
“그럼 알렉스 시나리오가 피폐하지 않겠어요! 영애 선호 키워드는 힐링이랑 사이다 쪽이라면서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내 키워드가 힐링과 사이다 쪽인 것과는 별개로 아이시스의 추측에 동의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알렉스 시나리오는 여전히 심각한 #피폐물인 것 같아요.”
“왜요?”
“예전에 여름국에서 알렉스랑 같이 오찬 했던 거 기억나시죠? 그때 디아나가 황후궁에서 본 붉은 수국 얘기를 했더니 알렉스 표정이 안 좋아졌잖아요.”
“아, 기억나네요.”
“근데 수국이 왜요?”
“제가 어제 황후를 만났는데, 그게 자녀들이 다 같이 황후한테 만들어 준 선물이라고…….”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무거운 적막이 감돌았다.
다들 가을국 황실의 설정을 알고 있다 보니 말을 얹지 못했다.
“시간이 많이 지났을 텐데도 그 얘기를 하면서 우시더라고요.”
아이시스와 디아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거 너무 피폐한데요? 알렉스가 잘 굴러서 힐링해 줘도 커버가 될지 모르겠네요.”
나는 아이시스의 낙담한 표정을 보다 또 생각난 정보를 전했다.
“엘런에 대한 이야기도 하나 들었는데, 카이엘드가의 초대 가주가 마왕을 물리칠 때 쓴 검에 마왕이 남긴 낙서가 있어요.”
“마왕이 남긴 낙서요?”
디아나가 흥미를 보였다.
“네. 어제 가을국 황제가 마왕의 일기를 보여 줘서 알게 된 건데, 아무래도 그 마왕이 카이엘드가 초대 가주한테 반한 모양이에요. 그 감정을 잊지 않기 위해 낙서를 남겼다고 했거든요.”
“와, 무슨 낙서인데요?”
“하트였어요.”
“……하트?”
나는 두 손을 모아 하트를 만들었다.
“네, 하트요.”
또 침묵이 시작됐다.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라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마왕이 개그캐 같더라고요.”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보던 아이시스가 갑자기 눈을 부릅떴다.
“헉, 잠시만요! 감정을 기억하려고 낙서를 새겼다면, 다시 그 검에 새겨진 낙서를 보고 마음을 바꾸는 게 아닐까요?”
“낙서가 메시지가 되는 건가?”
“어어! 왜 그런 장면 있잖아. 세상을 불태워 버리려는데, 갑자기 마음을 자극하는 상징물을 보고 악역이 마음 고쳐먹는 거!”
아이시스는 흥분한 듯 계속해서 말을 쏟아 냈다.
“엘런이 그 검을 가지고 마왕을 토벌하러 갔는데 마왕이 검에 새겨진 자기 낙서를 본다면? 마왕이 세상 얼리려는 계획 접는 거 아냐?”
“마왕은 인간이 아닌데 그게 되나?”
“인간이 아니어도! 이거 뭔가 촉이 오는데?”
아이시스는 눈을 반짝이며 노트북에 메모했다.
- 남주가 서사를 숨김.
아무래도 아이시스는 이 시간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모른 척해 주며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또 뭐 다른 정보는 없나요?”
“음…… 요한에게 불의 이능이 있어요.”
툭.
디아나가 족자를 떨어뜨렸다.
“불의 이능이요?”
“네, 제 추측인데 요한은 겨울국 황족과 마왕의 숨겨진 자식 같아요.”
“헉! 세상에, 그거 확실해요?”
“제가 요즘 겨울국 협회랑 엮여서 겨울국 역사를 강제로 공부하고 있는데 그런 내용이 있더라고요. 겨울국 황녀의 일기에 마왕의 그림이 나오고 나중에 은발의 아기 그림도 나와요. 아무래도 그게 요한이 아닐까 싶은데, 확실하지는 않아요.”
“와, 그러면 요한이 불의 이능으로 마왕을 물리치는 거 아니야? 불의 이능이 세계관 최고 능력이잖아!”
이제까지 요한에게 의구심을 품던 아이시스가 손뼉을 쳤다.
“근데 문제는 요한이 제1 수호성이라…….”
나는 말끝을 흐렸다.
“제1 수호성이 뭐예요?”
“마왕을 지키는 16명의 마족 중 서열 1위 마족이야.”
“그럼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주군을 배신하는 전개인가?”
“배신을 안 하겠지. 게다가 친아빠라면.”
디아나는 차분히 아이시스의 말을 잘라 냈다.
아이시스는 그 말을 곱씹다 관자놀이를 눌렀다.
“#아포칼립스 남주라 무력을 최대치로 끌어 올리려고 준 설정인가. 마왕의 혼혈아라 세계관 최강 이능을 타고난 거로.”
“마왕을 배신한다면 S급 남주일 거 같은데, 이건 한번 직접 물어보죠.”
“근데 나 좀 걸리는 게 하나 있어.”
아이시스가 디아나의 말을 끊으며 또 제 생각을 말했다.
“S급 남주를 선택해야만 재앙이 막아지는 거라면, S급 남주가 마족 지대에 있는 건 말이 안 되잖아? 만약에 데이지 영애가 그 S급 남주 관람권을 받지 못했다면, S급 남주는 아무도 못 찾았을 거 아니야.”
디아나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나는 그래서 요한이 S급 남주 같아. 히든 S급이니까 숨어 있는 게 맞잖아.”
“이건 숨겨 두는 게 아니지. 냉정하게 말하면 존재하지 않는 남주잖아? 마족 지대는 오픈되지 않은 맵이니까.”
“사실 저도 그게 걸려요. S급 히든 남주가 그런 곳에 있을 리 없잖아요. 거긴 유저 기본 스킬도 안 통하고 AI 연결도 안 되는 곳이거든요.”
숨긴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거긴 그냥 없는 세상이다.
마족 지대에 남주를 숨겼다면 애초에 S급 남주가 없다고 봐야 한다.
“결국 만났고, 사계국에 넘어왔잖아요. 사계국으로 오는 설정이 있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왜인지 디아나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래. 네 말대로 요한이 마족 지대에 숨겨진 S급 남주라고 쳐. 선택도 가능하다고 가정하고. 근데 그 이후는?”
아이시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마족 남주가 어떻게 사계국에서 살아? 마왕을 죽이면 마족 지대로 돌아갈 수도 없고, 사계국에서 계속 지내야 할 텐데 사계국에서 마족을 수용할까?”
디아나를 보던 아이시스가 고개를 저었다.
“이건 피폐물을 넘어 베드 엔딩이야. 데이지 영애도 평생 숨어 살아야 하잖아. 그런 시나리오가 랭킹 1위 서사일 리 없어.”
“왜? 재앙이 사라지면 결국 해피엔딩이잖아.”
“너 왜 시스템처럼 말해, 소름 돋게. 개인의 행복을 무시하지 말아 줘. 우리는 잘 살겠지만, 데이지 영애는 도망자로 살아야 하잖아.”
아이시스가 제 팔을 문지르며 질색했다.
디아나는 내게 고개를 틀며 물었다.
“영애는 어떻게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