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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0 영애-148화 (149/208)

148화.

아이시스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디아나의 말에 희망을 품은 눈치였다.

아이시스는 숨을 길게 내쉬며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노트북으로 손을 뻗었다.

“그래. 패닉에 빠져서 뭐 해. 분석이나 하자.”

아이시스가 화면을 보던 시선을 들어 디아나를 쳐다봤다.

“일단 S급 남주면 당연히 재력부터 봐야겠지?”

디아나는 회의감 짙은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걸 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

아이시스는 와락 인상을 쓰며 다그쳤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봐야지. 지금 아이템도 못 쓰고, 슬롯 중복도 막혀 있는데. 선택은 단 한 번이라고. 아아, 이거 봐. 시스템이 일부러 재앙을 넣은 거야. 우리가 열심히 게임하게 만들려고 20억으로 꼬셔 놓고, 마지막에는 돈을 안 주려고 이런 짓을 한 거라고!”

다시 패닉에 빠진 아이시스가 고개를 푹 숙였다.

디아나는 물끄러미 아이시스를 보다 입을 열었다.

“아니라니까.”

“맞아. 확실해. S급 남주를 못 고르게 하려고 아이템도 차단하고 슬롯 중복도 막은 거야. 이제 필요한 데이터는 다 수집했다 이거지. 아아, 망했어!”

가만히 듣던 디아나가 표정 없는 얼굴로 말했다.

“정말 시스템이 재앙을 내리겠다고 마음먹었으면 아이템이 있어도 무의미해.”

낯설게 느껴질 만큼 차가운 목소리였다. 그래서 나도 아이시스도 순간 움찔했다.

디아나는 처음 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긴장됐다. 아이시스가 재앙 예언을 들었다는 말을 했을 때보다도 더.

디아나는 그 말 한마디를 하고는 테이블로 시선을 내렸다. 생각에 빠진 것 같았다.

아이시스와 나는 선뜻 입을 열지 못하고 서로 눈치를 보며 디아나가 생각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우리는 테이블 위로 부유하는 먼지를 보며 조용히 있었다.

마침내 디아나가 다시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그녀는 나를 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태어나면서부터 타임라인을 시작했어요. 16년을 말 그대로 살았죠.”

아이시스에게 들었던 이야기였다. 하지만 당사자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다르게 느껴진다.

“16살쯤에 정말 바꾸고 싶은 일이 생겼어요. 그래서 다른 유저에게 ‘30분 회귀권’을 양도받고 과거로 갔죠.”

디아나는 잠시 침묵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회귀권을 사용하고 돌아왔는데 제 아이템 사용이 무효화가 되어 있더라고요. 비극은 일어났고, 저는 아이템 양도 요청 글을 올린 적도 없었죠. 처음 ‘30분 회귀권’의 존재를 인지한 시점으로 돌아왔거든요.”

나는 의아함에 눈을 깜빡였다.

왜 디아나는 무효가 돼?

의문을 품는데 디아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다시 커뮤니티에 글을 올려서 아이템을 양도받고 ‘30분 회귀권’을 썼지만, 또 무효화가 됐어요. AI한테 물어봤더니 제 시간은 외전이라서 그렇다더라고요.”

“외전?”

아이시스도 처음 듣는 이야기인지 놀라 물었다.

“나는 스무 살부터 본편 시간이라 그 이전의 과거는 바꿀 수가 없대. 본편에 영향을 주게 되니까.”

디아나는 쓰게 웃었다.

“그래도 배려 차원에서 디테일한 부분을 조금 바꿔 주긴 하더라. AI가 상황을 조금 바꿔 줘. 다른 마음 먹지 말라고. 하지만 큰 설정은 그대로야. 일어나야 하는 일은 반드시 일어나거든. 그건 절대 바꿀 수 없어.”

“어떻게 절대라고 확신해? 너 회귀 몇 번 해 봤는데?”

아이시스가 눈을 찌푸리며 물었다. 하지만 나는 조용히 있었다.

내가 예민한 걸 수도 있지만, 디아나에게서 뭔가 이질감이 느껴졌다.

연등 축제 날 국서와 연못에서 대화를 나누던 디아나의 모습이 떠오른다. 나는 그날처럼 디아나를 마주하고 있지만, 전혀 다른 사람을 보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디아나는 아이시스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내게 시선을 틀었다.

“AI는 타임라인을 정리한대요. 설정에 위배되지 않는 선에서요. 이 세계에서는 설정이 우선이라 그렇대요.”

그녀는 설명하듯 차분히 말하다 미소를 지었다.

“저는 데이지가 S급 남주를 선택하는 게 설정이라고 생각해요. 아이템을 사용하든 사용하지 않든 그 결과는 바뀌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확신하지 마. 모르는 일이잖아.”

아이시스는 아까보다 목소리가 한 톤 차분해졌지만, 여전히 불안해했다.

디아나는 의뭉스러운 미소를 띠며 아이시스를 쳐다봤다.

“맞아. 사실, 모르는 일이지. 그러니까 미리 이것저것 따지면서 불안해하지 마. 마음 편하게 생각해.”

아이시스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눈을 찌푸렸다.

“그래도 난 분석은 포기 못 해. 너처럼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손 놓고 있다가 다 죽으면 어떡해? 나는 그래도 노력할 거야!”

“노력 좋지. 나는 그저 노력과 상관없이 데이지 영애의 선택이 좋은 결과를 가져올 거라고 믿을 뿐이야.”

아이시스는 기가 막힌지 헛숨을 흘리며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저 긍정적인 마인드. 으, 나랑 안 맞아.”

아이시스는 디아나의 낙천적인 사고를 외면하며 궤짝을 힐긋 쳐다봤다.

“알렉스랑 엘런 재산 내용은 저기 있는 거야?”

“응.”

디아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장난치듯 조언했다.

“재력도 중요하지만 여러 가지를 같이 봐야 하지 않아? 재력, 기사 수, 가문 연혁, 얽힌 여자 수 등등…….”

디아나는 궤짝에서 책 몇 권을 집어 왔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갑자기 대화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른다.

“잠깐만요. 지금 우리 뭐 하는 건데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끼어들자 디아나가 미소를 지으며 내 앞에 책을 펼쳤다.

탁.

“엘런 아이스타스 카이엘드 재산 보유 현황 총 2억 3천만 골드.”

디아나는 자리에 앉으며 설명했다.

“알렉스가 토벌대를 조직할 때, 다들 반대가 심했거든요. 제가 우겨서 참석한다고 했더니 신하들이 대원들 뒷조사를 해서 보고했어요.”

그녀가 궤짝에 한 번 시선을 주었다가 미소를 지었다.

“그 자료가 이렇게 쓰일 줄이야. 봐, 우리는 무조건 S급 남주를 찾을 운명이라니까?”

디아나가 팔꿈치로 아이시스를 툭 치자 그녀는 팔을 털며 말했다.

“알겠으니까 알렉스 재산 자료도 가져와 봐.”

두 사람이 투덕거리는 대화를 듣는데 초점이 흐릿해졌다.

나는 흐린 눈으로 책상 위로 쌓이는 책들을 바라봤다.

여름국 황실의 디아나에 대한 집착과 충심은 상상 이상이었다.

테이블에 쌓인 족자와 책들은 모두 엘런과 알렉스에 대한 개인 정보였다.

“마족 남주에 대한 정보는 없으니까 그쪽 기본 설정은 공란으로 넘어가.”

“어차피 마족이면 S급은 아닐 거 같은데…… 알겠어. 일단, 알렉스랑 엘런부터 정리해 두자.”

메모장 위에 두 남주의 설정이 적혔다.

나는 뭐라 말을 하지 못하고 그녀들이 하는 일을 지켜만 봤다.

디아나는 어차피 다 정해진 일이니 마음을 편하게 가지라고 했었지만, 불안해하며 무엇이든 해 보려는 아이시스에게 맞춰 주려는 것처럼 보였다.

아이시스는 손이 빨랐다. 금세 정리를 마친 그녀가 노트북을 틀어 화면을 보여 주며 입을 열었다.

“엘런 총자산 236,457,692골드. 알렉스 총자산 4,812,298,213골드. 알렉스 압승이네 이건. 자릿수부터 비교가 안 되는데? 둘 다 개인 재산만 따진 건데.”

“알렉스는 황족이잖아. 현재 가을국은 대륙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고.”

디아나는 여상히 말하며 다른 족자를 정리했다.

“근데 알렉스는 주변에 여자 조연 수가 너무 많아. 엘런은 217명 정도인데, 알렉스는 무려 1,324명이야.”

“……아니 어떻게 그런 수가 도출되는 거죠?”

나는 무시무시한 여조의 숫자에 놀라 또 끼어들었다.

“카이엘드 령에 소속된 결혼 적령기 여성 수와 아카데미에서 엘런과 4년간 함께 수학한 여자 캐릭터 수를 모두 합친 거예요. 참고로 여기엔 저도 포함돼요.”

디아나가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알렉스는 황성 고용인도 포함했고, 그간 황실 무도회에 온 여성 수까지 다 합치다 보니 이렇게 늘어났네요.”

“주변에 널린 여자 조연은 치명적인 마이너스 요소야. 어떻게 보면 재산보다도 전개에 큰 영향을 준단 말이지.”

아이시스의 진지한 목소리에 디아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이나 황태자나 사회적 지위가 있으니, 자산은 적정선만 넘기면 생활은 화려해져.”

아이시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지만 이상한 여조가 하나 등장해서 갑자기 삼각관계 전개라도 펼쳐지면, 그건 재력과 매력으로도 커버가 안 돼.”

디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하긴 얼마 전에 커뮤니티 보니까 어떤 영애가 첫사랑 원작 여주가 살아 돌아와서 남주가 흔들린다고 마음 아파하더라.”

그들은 수치를 보며 대화를 이어 갔다.

당최 이게 무슨 대화인지 모르겠다.

나는 결국 다시 끼어들었다.

“저기 제가 S급 남주를 찾는데 왜 알렉스와 엘런의 뒷조사를 해야 하는 건가요?”

아이시스가 고개를 들고는 눈을 크게 떴다.

“아, 설명을 안 했구나.”

그녀는 진지한 눈으로 나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S급 남주를 뽑으면 S급 남주한테 내장된 시나리오를 따라가게 되고 바로 랭킹 1위가 되잖아요.”

아이시스가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이 게임은 웹소설 플랫폼 데이터로 만들어진 게임이고요.”

“……그렇죠?”

“남주 안에 담긴 시나리오로 랭킹이 결정되는 거라면…….”

아이시스가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플랫폼에게 랭킹 1위 남주 시나리오란 베스트셀러의 개념이 아닐까요?”

몰입 거부자가 객관적인 분석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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