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OP 100 영애-146화 (147/208)

CH12. 종말의 예언 


146화.

쌀쌀한 가을 새벽.

풀잎에 맺힌 이슬이 톡 떨어졌다. 아이시스는 발등에 튄 차가운 물방울을 그대로 둔 채 걸었다.

‘아, 퇴사하고 싶다.’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며 예배당으로 들어섰다.

새해를 맞아 새벽 기도를 오는 신도들을 맞이해야 했기 때문이다.

오늘도 예배당에는 먼저 도착한 신도들이 가득했다.

‘잠을 더 주무시지 왜…….’

게임 속 캐릭터들이 왜 인간인 자신보다 열심히 사는지 모를 일이다.

아이시스는 씁쓸함을 꾹 눌렀다.

직업물 여주를 선호 키워드로 설정한 적이 없는데 왜 일을 하고 있는 걸까.

이것이 K-여주의 숙명인 것인가.

성직자를 직장인으로 해석하는 K-로판의 잔인한 분류에 아이시스는 슬픔을 삼켰다.

연말과 새해에는 유독 신자들이 많이 몰렸다.

성녀는 맑은 기운을 내뿜는 게르마늄 원석처럼 좋은 기를 받고 싶어 찾아온 신자들과 함께 기도해야 했다.

일명 ‘신년 100일 기도’.

아이시스는 평화를 전파하고 인류에게 신뢰를 받아야 했다. 그녀의 버프에는 제한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자들의 ‘신뢰 지수’.

매년 신뢰 지수를 채워 놓아야 세뇌 버프를 쓸 수 있었다.

묻고 따지지 않고 그녀를 믿게 하려면, 평판이 필요했던 거다.

아이시스는 AI를 불렀다.

‘AI, 지금까지 쌓은 신뢰 지수 알려 줘.’

[현시 기준 적립된 신뢰 지수는 42%입니다.]

42일간 기도를 했더니 1월 1일에 리셋된 신뢰 지수가 42%나 채워졌다.

보통 이 백일기도를 완료하면, 아이시스는 신뢰 지수를 100% 채울 수 있었다.

그렇다. 아이시스에게 신년 기도는 일종의 퀘스트였다.

예배당 단상에 선 그녀는 제 머리 위로 뚫린 동그란 천장 구멍을 보며 눈을 감았다.

‘졸려…….’

하지만 피곤한 정신과 달리 몸은 충직하게 기도문을 외우고 평화로운 표정을 지어 냈다.

빙의 6년 차의 짬이었다.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났을까.

콰과과광.

갑자기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쳤다.

“꺄아아악!”

“바, 방금 벼락이 떨어졌어!”

신도들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웅크렸다.

그런데 기가 막히게도 천장의 좁은 구멍으로 딱 벼락이 떨어졌다.

신자들은 경악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천장의 둥근 구멍에서 내려온 아침 햇살이 빛기둥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빛 사이에 성녀 아이시스가 서 있다.

중앙 바닥은 벼락으로 검게 탔는데 오직 아이시스만이 멀쩡히 제 하얀 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신도들은 상황을 한 번에 깨우쳤다.

“예, 예언이 내려왔다!”

암흑 속에서 빛을 맞는 성녀의 모습은 성서에 나오던 계시의 모습과 똑같았다.

눈을 감고 있는 아이시스를 보며 신자들은 귀를 기울였다.

‘성녀님이 신의 소리를 듣고 계신다!’

그러나 평온한 표정과 달리 아이시스는 속으로 쉴 새 없이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무슨 이딴 예언이 다 있냐고. 이 자식들이 사람을 피X츄로 아나. 버프도 충전식으로 주더니만, 예언을 벼락으로 내리는 신이 어디 있어!’

아이시스는 갑작스러운 빛 공격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녀는 시야가 편안해질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예언 프로세스에 대한 불만과 별개로 마음이 불안하지는 않았다.

몇 달 전, 가을국 황태자와 여름국 황제 그리고 봄국 공작이 신전을 찾았을 때 겪었던 것과 똑같았기에, 이 X 같은 예언 퀘스트가 어떻게 진행될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시스는 곧 내려올 시스템의 대본을 기다렸다.

예언 수행은 간단했다.

상태창에 프롬프트처럼 적히는 대본을 읽기만 하면 됐다.

그때, 알람이 울렸다.

띠링.

귓가를 간질이는 맑은 소리에 아이시스가 천천히 눈을 떴다.

[성녀 ‘아이시스 프로페타’에게 예언이 도착했습니다.]

[예언을 신도에게 전하면, 500캐시를 적립해 드립니다.]

그래도 시스템은 양심이 있었다. 예언을 공개하면 캐시를 줬다.

곧 전해질 예언을 기다리는데 괴상한 문장과 기계음이 아이시스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S급 재앙 ‘마왕의 기상’ 시간이 변경되었습니다.]

[3월 15일로 예정된 ‘마왕의 기상’ 시간이 3월 1일로 변경됩니다.]

“?”

예언 방식이 바뀌었다.

뉴스 프롬프트처럼 대사를 올려 주던 지난 예언과 달랐다.

의문을 품는 사이 예언 메시지는 계속 수신됐다.

[재앙을 막을 ‘영웅(S급 남주)’을 3월 1일까지 찾지 못할 경우 인류는 멸망합니다.]

“뭐?!”

아이시스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쳤다가 바로 입을 다물었다. 부릅뜬 눈에 질겁한 신자들의 모습이 담겼기 때문이다.

그저 들은 얘기를 읊을 생각이었던 아이시스는 충격적인 예언에 당황했다.

‘인류가 멸망한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녀의 질문에 답하듯 상태창이 계속 예언을 공지했다.

[재앙을 막지 못할 경우, 3월 1일 모든 인류가 동면에 빠집니다.]

‘유저의 행복이 목적인 게임이라며, 무슨 소리야 이게!’

신자들은 저희를 향해 인상을 쓰며 눈을 부라리는 성녀의 모습에 질겁했다.

‘성녀님께 악령이 빙의했다!’

신자들이 사색이 되었지만, 아이시스는 그걸 인지할 새도 없었다.

상태창이 조롱하듯 그녀를 약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행복은 나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부터 나는 행복하다고 믿어 보는 건 어떠실까요?]

‘이런 미친……. 마음을 잘 먹으면 재앙도 행복한 결말이라는 거야?’

[최선을 다해 ‘재앙’을 막았다면 당신의 삶은 후회 없는 삶.]

[빈자와 부자 모두가 평등하게 눈 감는 사회.]

[이상형의 남주가 내 인생의 끝에 함께하는 결말.]

[이 모든 것이 진정한 해피엔딩이 아닐까요?]

쾅.

아이시스는 저도 모르게 단상을 내리쳤다.

‘얼어 죽는 게 어떻게 해피엔딩이야?!’

[‘재앙’을 막고 싶다면 S급 남주를 찾아 시나리오를 오픈하세요!]

[S급 남주의 시나리오가 오픈되면 ‘재앙’이 취소됩니다.]

‘50년 동안 아무도 못 찾았는데, 2주 만에 S급 남주를 어떻게 찾아?’

[최선을 다해, 열심히, 잘, 찾으시면 S급 남주를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당신의 즐거운 서사와 아름다운 감정선을 응원합니다.]

‘놀리는 거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아이시스는 머리를 움켜쥐고 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눈앞에서 반짝이는 예언 공지를 보며 천천히 손을 내렸다.

이렇게 시간을 낭비할 때가 아니었다. 당장 연락을 해야 할 곳이 있었다.

***

찰랑.

두툼한 거품 아래서 발길질을 따라 물보라가 일었다.

“미쳤다.”

욕조 트레이에 올려 둔 노트북 화면에 고양이가 요가를 하는 모습이 가득 찼다.

#수인여주의 브이로그였다.

따사로운 여름 햇살이 들이찬 누각 위, 여름국 후궁 영애들이 키스카의 요가 영상을 찍어 올렸다.

비정기적으로 올라오는 콘텐츠인데, 커뮤니티 접근이 허락된 덕에 나는 밀린 게시물을 몰아서 볼 수 있었다.

“흐윽. 그리웠어, 커뮤니티.”

나는 젖은 손끝으로 눈가를 닦다 가슴 앞에 손을 모았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소소한 행복.

가을볕이 들이찬 리버뷰 특급 호텔에서 즐기는 아침 목욕.

욕실을 가득 메운 꽃향기.

그리고 아기 고양이가 펼치는 진기 명기를 관람하며 시작하는 하루란.

황성 스트레스를 싹 잊게 만드는 힐링 서사였다.

그런데 그때 화면 아래에서 메시지 알람창이 올라왔다.

[아이시스: 영애, 지금 바빠요?]

무슨 일이지?

‘담당자님, 아이시스에게 답장 보내 주세요.’

[현재 가을국 황도 오라 호텔 13층 D 구역에는 유저가 없습니다.]

아, 맞다. 유료 아이템 이제 못 쓰지.

무료 메시지는 같은 구역에 있는 유저에게만 10회 이내로 사용 가능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티가 난다고, 아이템을 쓰지 못하게 되니 플레이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나는 허공에서 손을 털어 대충 말린 뒤, 노트북으로 답장을 썼다.

[저 지금 목욕 중인데 무슨 일 있으세요? ㅇㅅㅇ]

바로 1이 사라지더니 아이시스의 답장이 수신됐다.

[아이시스: 아주 급해요! 목욕 끝나면 신전으로 와주세요.]

[아이시스: 예언이 떨어졌는데, 영애의 도움이 필요해요!]

아이시스는 내 답장을 받기도 전에 신전 위치를 보냈다.

다급해 보이니 좀 걱정이 됐다.

나는 보던 노트북을 접고 바로 씻고 가을국 신전으로 갔다.

***

신전 앞까지 운행한다기에 나는 전차를 타고 이동했다.

축제 기간에도 일을 하는지 전차에는 단정한 무채색 의복을 차려입은 가을국 사람들이 많았다.

역시 #직업물 여주들의 플레이 존이다.

마치 출근길에 동행하는 느낌이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다음에 가을국에 올 때는 꼭 마차를 가져와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금세 신전에 도착했다.

언덕을 오르던 나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눈을 가늘게 떴다.

신전 앞에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모여 있었다. 가까이 가 보니 다들 울먹거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성녀님! 괜찮으신 겁니까?!”

“성녀님께 악령이 깃든 게 사실이야?”

“그런 것 같아. 벼락을 맞더니 다 나가라고 소리치면서 쫓아내셨어.”

“서, 성녀님이 그런 말씀을 할 리가 없잖아!”

“그러니까 다들 이러는 거지.”

“혹시 마왕의 영혼이 빙의한 거 아니야? 그놈 지금 동면 중이라면서.”

나는 옆에서 들리는 대화에 움찔했다.

아이시스가 빙의한 거 소문난 건가? 그치만 이제 와서 소문났다기엔 좀 이상한데.

아, AI 연동 메시지 못쓰니까 너무 답답하다!

나는 워치로 메시지를 적으려 노력했으나, 사방에서 밀어 대는 사람들 때문에 쉽지 않았다.

결국 메시지 전송을 포기하고 일단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인파를 헤쳤다. 하지만 광신도들은 호락호락하게 길을 터 주지 않았다.

게다가 울부짖는 그들의 목소리 때문에 귀가 터질 것 같았다.

‘아아, 미치겠네.’

나는 흔들리는 팔로 다시 노력해 메시지를 썼다.

[영애, 저 도착했는데 신도들 때문에 들어갈 수가 없네요.]

[아이시스: 잠시만요.]

[아이시스: (사진)]

[아이시스: 언덕에서 왼쪽으로 돌면 작은 하천이 하나 나오는데, 그 다리 아래로 들어가면 두 번째 기둥에 문이 있을 거예요. 거기로 와 주세요.]

입구가 봉쇄됐다는데도 아이시스는 태연했다.

좀 찜찜했지만, 그녀가 말한 약도를 보며 뒷문을 찾았다. 기둥을 두드리자 아이시스가 문을 열어 줬다.

“미안해요. 제가 지금은 버프를 못 써서 신도들을 돌려보낼 수가 없네요.”

“버프를 왜 못 쓰세요?”

“저는 버프를 쓰려면 ‘신뢰 지수’가 필요한데……. 아무튼 그런 게 있어요. 가요. 디아나는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어요.”

“디아나 영애도 왔어요?”

“네. 걔한테는 별로 기대 안 했는데, 생각보다 도움이 될 거 같아요.”

아이시스는 환해진 얼굴로 웃으며 나를 데리고 계단을 올랐다.

좁은 나선형 계단을 뱅글뱅글 돌아 꼭대기에 올라가니 작은 다락방이 나왔다.

아이시스가 그 작은 문을 여는 순간 나는 놀라 눈만 깜빡였다.

“……제가 지금 차원 이동을 했나요?”

작은 방에 비단 족자가 빽빽이 걸려 있고, 열린 궤짝 안에는 정리된 서책이 가득했다. 비단 포를 바닥까지 늘어뜨린 동양 여인까지 한눈에 담으니 여름국에 온 기분이 들었다.

왜 신전 다락에 황제와 성녀가 함께 있는 걸까.

머릿속으로 불길한 생각이 스쳤다.

“마왕 토벌대에 무슨 일이 생겼나요?”

아이시스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비교도 되지 않는 큰일이 생겼죠.”

“무슨 일인데요?”

“예언이 떨어졌어요. 마왕이 일어난다고 했던 거 기억나죠?”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어두운 얼굴로 눈을 찌푸렸다.

“일정이 바뀌었어요. 3월 1일에 일어난다더군요.”

“갑자기 왜요?”

“예언은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아요.”

한숨을 쉬며 벽으로 다가간 아이시스가 커다란 족자 하나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여름국어로 써진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예언 정리.

1. 마왕의 기상이 3월 15일에서 3월 1일로 당겨짐

2. S급 남주를 3월 1일 안에 선택하지 않으면, 사계국이 빙결됨

갑자기 왜 저런 예언이 내려온 건지 이해하지 못해 멀뚱히 족자를 보고 있는데 아이시스의 불안한 목소리가 들렸다.

“S급 남주의 시나리오를 오픈하지 않으면, 모든 유저가 동면에 든다고 S급 남주를 직접 언급했어요.”

나는 아이시스의 예언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몰랐기에 그녀의 말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디아나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걸 보고 이게 큰일이라는 걸 눈치챘다.

넓은 소파에 앉으며 디아나가 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테이블에 올려진 종이 더미와 비단 족자를 응시하던 검은 눈동자가 천천히 올라와 내게 박혔다.

무거운 분위기가 신경 쓰였는지 그녀는 일부러 밝게 얘기하며 웃었다.

“그래도 아주 암담한 건 아니에요. 우리는 S급 남주 후보가 누군지 알고 있으니까요.”

“S급 남주 후보가 누군지 아세요?”

나만 아는 줄 알았더니?

그런데 내 말에 아이시스와 디아나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잠시 후 둘은 서로 눈을 맞추더니 다시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영애, S급 남주 후보 관람하지 않았어요?”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