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알렉스의 원작은 <첫 지옥>인데 왜 나한테 알렉스가 엮인 거지?
아리나가 봄국 황태자를 선택했고, 가을국 황태자와 엮일 유저는 다른 남주를 선택해서 그런가.
그럴지도 모른다.
AI는 타임라인을 수정해 여러 원작의 주인공들을 엮을 수 있었다.
실제로 그들은 편안한 전개를 위해 황제 여주인 디아나에게 후궁 여주들을 잔뜩 엮어 준 전적이 있다.
아리나가 봄국 황태자를 슬롯에 넣고, <첫 지옥>의 빙의 여주는 서브 남주를 선택하는 바람에 알렉스와 내 원작이 엮이도록 조정된 걸지도 모른다.
나는 손바닥을 손톱으로 긁으며 초조함을 눌렀다.
나는 지금까지 S급 남주 관람권 때문에 알렉스와 엮여 탐사대에 끌려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마족 지대로 넘어가 버그에 휩쓸리고 요한까지 담았다.
그런데 알렉스와 만날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상점에 있지도 않은 S급 남주 관람권이 나한테 온 것도 이상한데…….
이 모든 게 우연이 아니라면.
심지어 나는 결국 그 세 남주들을 모두 슬롯에 담았다.
어쩌면 그들 모두와 엮일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찜찜해졌다.
아니야, 자의식 과잉 아닐까? 세상이 내 위주로 돌아갈 리가 없잖아. 나 연예인 병처럼 주인공 병에 걸린 거 아니야?
내가 예민한 거라고 생각을 털어 내려 노력했지만, 알 수 없는 불안함이 마음 한구석에 남았다.
그때 황제가 뜬금없는 말로 내 정신을 잡아챘다.
“여기 있는 모든 물건을 그대에게 주겠네.”
황제의 말에 나는 흠칫했다. 좋아서 놀랐다고 생각한 건지 황제가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그냥 주겠다는 건 아니야. 조건이 있지.”
아니, 나 이거 받고 싶지도 않은데 무슨 조건을 걸어…….
하지만 눈치 없이 그런 말을 하는 대신 이번에도 조용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황제는 데이지가 놓친 경매품과 데이지가 수집한 물건들을 뿌듯한 눈으로 바라보다 내게 시선을 틀었다.
“황궁으로 들어오게.”
“예?”
“알렉스가 처음으로 국혼 절차에 관해 묻더군. 외국 여인을 추후 황후로 책봉할 수 있는지 말이야.”
이 대화 흐름은 설마…….
내가 표정을 굳히는데도 황제는 꿋꿋이 제 생각을 말했다.
“토벌 전쟁이 끝나면 청혼서를 넣을 생각이네.”
침묵 속으로 맑은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띠링.
[메이저 에피소드 ‘권력자의 가족으로 간택된 여주’가 감지되었습니다.]
[보상으로 1캐시가 적립됩니다.]
나는 말없이 상태창을 쳐다봤다.
남주의 아버님에게 며느리가 되어 달라는 말을 들었다.
“아니죠. 폐하. 아닙니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웃 나라 공주도 아닌 그저 흔한 외국인 여성을 가을 제국의 황태자비로 들인다니요. 절대 안 됩니다!”
나는 가을국 충신처럼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게다가 이런 음침한 취향을 가진 제가 제국의 황후가 되면 국운이 기울게 될 겁니다.”
최대한 알렉스와 알렉스 아버님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며 거절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과분한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과분하지 않아.”
황제는 기분이 좋은지 묘하게 인자해진 목소리로 내 말을 끊었다.
“데이지 양은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라 들었는데, 실제로 보니 정말로 그런 성정이더군.”
“맞습니다. 황실의 여인은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낼 일이 많은데, 부끄럽게도 저는 사교성이 매우 떨어진답니다.”
“사교성이 뛰어난 이는 쓸데없는 소문을 몰고 오지. 황실은 여론을 통제할 줄 아는 이가 필요할 뿐, 여론의 관심을 끄는 이가 필요한 게 아닐세.”
그는 머리 아픈 일이 떠올랐는지 잠시 미간을 찌푸리다, 웃음을 흘렸다.
“연회에서 구석에 홀로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그대가 주목을 받을 때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지더군.”
그는 나를 응시하다 말을 이었다.
“참고로 인상적이었다.”
무언가 생각났는지 황제가 피식 웃으며 팔짱을 꼈다.
“봄국 머저리를 잘 다루던데.”
세 나라가 힘을 모으는 건 이번이 마지막일 듯싶다.
얘네 사이가 참 안 좋구나.
흐린 눈으로 그를 보던 나는 순간 깨달음을 얻었다.
“……폐하께서 테이블을 망가뜨리신 건가요?”
알고는 있었지만, 놈이 순순히 제 짓이라고 티를 낼 줄은 몰랐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했듯, 레이디의 대처가 궁금했으니까.”
이 공감 능력 없는 자식. 내가 그때 얼마나 당황했는데. 사람을 테스트하겠다고 그런 짓을 해?
면접비도 안 주면서 강제 면접을 치르게 한 황제에게 울컥했다.
하지만 황제의 안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여름국에서 지냈다는 말은 들었는데, 그새 황제와 국서까지 그대의 편이 된 듯하더군.”
나를 내려다보는 금안에 흡족한 기색이 어려 있다.
“알렉스는 안목이 좋은 아이지. 늘 그 아이에게 거는 기대가 컸지만, 그 애는 단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어.”
황제가 거만하게 꼰 다리를 내려 두며 말했다.
“앞으로도 데이지 양이 원하는 물건은 마음껏 수집할 수 있을 거야.”
황제가 미소를 지었다.
“황자와 황녀를 낳을 때마다 레이디의 이름으로 영토를 주고 성을 증축해 줄 것이니, 후에 황성을 떠날 때면 황성보다 더 좋은 곳에서 여생을 보내게 될 것이다.”
나는 조용히 생각을 정리했다.
당연히 이 미친 청혼을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
아니, 알렉스한테 아내가 되어 달라는 청혼을 받은 것도 아니고 황제한테 내 며느리가 되어 달라고 청혼을 받다니.
‘이게 뭔…….’
그리고 재력으로 꾀는 건 공작가나 황실이나 디폴트 설정인지 왜 자꾸 땅을 준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땅도 필요 없고, 이런 오싹한 수집품은 더더욱 필요 없다.
하지만 여기서 단호하게 거절하는 건 무서웠다.
마왕 탐색대 참석을 거절했을 때 봄국 황제는 캐붕하며 나를 탑에 가뒀었다.
눈앞의 사패 황제는 캐붕 없이도 나를 감금하거나 괴롭힐 수 있을 것 같았다.
누울 자리 보고 발 뻗는다고, 나사 풀린 권력자 앞에서는 단호하게 소신 발언을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웃으며 지내다가 봄국으로 돌아가면 바로 거절 편지를 쓰자.
안전지대로 돌아가서 제대로 거절하기로 한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폐하, 갑작스러운 제안이라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다행히 황제는 그 반응을 이해했는지 까닥 고개를 끄덕였다.
“신년제가 아직 며칠 남았으니 천천히 생각해 보게.”
***
황제는 연회장으로 돌아가지 않고 제 성으로 갔다.
나는 홀로 성문을 향해 걸었다. 배려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다행이었다. 같이 걸었으면 숨이 막혔을 텐데.
이 정도면 황성 플레이치고 나쁘지 않았다. 일단 살아 있고 어디 다치지도 않았다.
‘으, 그래도 무서웠어. 타임 워프 하자.’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웬만하면 낙엽이 가득한 축제 거리를 한 번 더 걷고 싶었지만, 몸에 힘이 없어서 바로 눈을 감았다.
그런데 그때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이디 데이지.”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자 달빛을 역광으로 받은 검은 인형이 보였다.
올려 묶은 머리카락과 발끝까지 뒤덮은 우아한 드레스 실루엣.
황후였다.
기억하기로 그녀는 무서운 인상이었는데, 표정이 보이지 않아 그런지 이상하게도 목소리가 나약하게 느껴졌다.
나무 사이에 서 있던 그녀가 길가 중심으로 걸어 나왔다.
아니, 근데 여기 황족들은 왜 수하도 없이 혼자 걸어 다니는 거야?
의아해하는데 황후가 다시 내게 말을 걸었다.
“마차를 가져오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네. 그렇습니다.”
나는 대답하고는 바로 허리를 숙여 그녀에게 인사했다.
“이곳에서 폐하를 뵐 줄 몰랐습니다. 늦었지만, 인사드립니다.”
“그대의 예법에 관해서는 이미 들은 이야기가 있지. 괜찮으니 고개를 들게.”
욕인지 칭찬인지 알 수 없는 말이다. 나는 주춤거리며 자세를 바로 했다.
“귀빈용 마차를 준비했으니 타고 가도록.”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뒤를 돌았다. 그러나 길가에는 마차가 보이지 않았다.
따라오라는 뜻인 거 같아서 나는 마지못해 걸음을 뗐다.
그녀는 나무가 없는 넓은 들판으로 걸었다.
이곳은 아까 황제가 데려간 곳과는 전혀 다른 조경이었다.
정원사가 성실히 관리한 모양인지 짧게 친 잔디 위로 삐져나온 풀 한 가닥 보이지 않았다.
가리는 것이 없으니 밤인데도 가시거리가 길었다.
황후가 걷는 방향의 끝에는 성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거대한 호수가 자리했다.
나는 호숫가에 만개한 수국을 보며 걸음을 멈추었다.
여름국에서 만찬을 먹던 날 디아나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황후궁 근처에 만개한 붉은 수국이 있다고.
저 궁은 황후궁인 듯하다.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황후궁 수국을 이야기할 때 알렉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던 걸 기억한다.
황후에게 사연이 있는 게 분명하다.
‘더 이상의 생각은 사양한다.’
나는 일부러 시선을 바닥으로 내려 모든 커뮤니케이션 창구를 차단했다.
그러나 늘 그랬듯 황실 캐릭터는 내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황후가 걸음을 멈추었다. 힐긋 시선을 드니 호숫가로 고개를 튼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쌀쌀한 가을바람이 그녀의 치맛자락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꼿꼿하게 선 자세는 변함이 없으나, 바람이 억지로 그녀의 윤곽을 흔들어 대니 감정이 요동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기어코 황후가 내게 말을 걸었다.
“내가 처음 입궁했을 때가 스물한 살이었으니 데이지 양과 같은 나이였네.”
그녀는 붉은 수국을 손끝으로 쓸며 말했다.
“나는 10년간 7명의 아이를 얻었지. 엔리케, 안나, 마리아, 미겔, 알렉스, 엘리자베스, 파블로.”
그녀는 아마도 제 아이의 이름일 단어들을 하나하나 천천히 입에 올렸다.
“하루는 아침에 일어났는데, 호숫가에 이렇게 붉은 꽃이 가득했어. 일곱 아이들이 새벽에 나와 몰래 날 위해 꽃을 피워 둔 거야.”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하지만 눈에 금세 물이 가득 찼다.
“이능의 부산물은 사라지지 않지. 그래서 나는 매일 눈을 뜨면 그날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네.”
그녀가 눈을 감자 투명한 물이 떨어졌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황족의 아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있으니까.
홀로 감정을 고른 그녀는 손으로 제 눈물을 닦아 냈다.
차분해진 낯으로 황후가 나를 쳐다봤다. 그러나 아직 눈빛은 젖어 있었다.
불쌍했다. 내가 여기서 본 캐릭터 중 그녀가 가장 불행해 보였다.
내 눈에 담긴 동정을 읽은 걸까? 그녀가 입매를 휘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후회하게 될 거야.”
나는 입을 달싹이다 조심스럽게 답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황후가 왜 내게 저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원하는 모든 걸 주겠다며 알렉스의 아이를 낳아 달라고 이상한 소리를 하던 황제.
황실에 들어오면 후회하게 될 거라 말하는 불쌍한 황후.
솔직히 이런 황실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문득 알렉스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두 사람을 마주한 나조차도 이렇게 피곤한데, 이 두 사람 아래에서 자란 알렉스는 어떤 감정 소모를 겪었을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나는 고요히 나를 바라보는 황후의 눈동자를 응시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아니어도 언젠가 알렉스 전하의 곁에 머무를 사람이 생길 겁니다. 하지만 황후 폐하께서는 평생 그분이 홀로 지내길 바라시는 것 같습니다.”
“이 황실의 대는 끊겨야 하니까.”
그녀는 바로 덧붙였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황후의 말은 아들에 대한 집착으로 보이지 않았다.
아들보다는 그 외의 것에 대한 집착 같았다.
그녀는 다시 걸음을 뗐다. 나는 머뭇거리다 그녀를 따라 걸었다.
황성 앞에는 마차가 있었다.
다행히 그녀는 마차로 오는 동안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고 나는 바로 마차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런데 문을 닫으려는 순간, 그녀가 마차 문을 잡았다. 조금 놀랐지만 티 내지 않으려 애쓰며 황후를 빤히 쳐다봤다.
“황제도 알렉스도 그대를 마음에 들어 하니 어떻게든 황궁에 데려오려 할 테지.”
그녀는 한숨을 쉬듯 웃음을 흘렸다.
“나는 알렉스에게 같은 고통을 물려주지 않을 거야. 그대는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미리 말해 준 것이니, 명심하길 바라.”
그녀는 제 말을 마치자마자 손을 거두었다. 문이 닫히자 바로 마차가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