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폐하께서 아무도 들어오지 않기를 원하셔서 그런 게 아닐까요?”
“음.”
그는 묘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피상적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왜 아무도 들어오지 않기를 원할까?”
나는 질문을 곱씹으며 잠시 침묵했다.
고요한 숲에서 벌레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피부로 느껴지는 긴장감이 나를 불안하게 한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원하는 답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아, 질문이 아니었나?’
질문을 다르게 이해하자 답이 보였다. 나는 묵례를 하며 차분히 말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저 안에 무엇이 있든, 그걸 옮긴 사람이 있을 텐데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곳이라는 건 모순이다. 들어갔던 자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말이니까.
둘 중 하나일 거다.
황제 본인이 옮겼거나, 그 안에 있는 물건을 본 자들이 이제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거나.
누구도 봐서는 안 되는 무언가를 보관하는 장소.
그런 곳이라면 이건 질문이 아니었다.
‘……정말 들어가고 싶지 않다.’
하지만 황제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좋아. 들어가지.”
문전박대 해 주셔도 되는데…….
의미 없는 희망을 품어 보다 황제의 뒷모습을 따라 걸음을 뗐다.
몇 분을 더 걸으니 성의 모습이 선명히 보였다.
고목의 굵은 뿌리가 건물을 단단히 옭아매고 있었다. 마치 똬리를 튼 거대한 뱀처럼.
나는 그 기괴한 모습에 미간을 찌푸렸다.
으드드드득.
그때, 갑자기 불쾌한 소리가 어둠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에는 돌로 줄기를 마구 짓이긴 듯한 짙은 풀냄새가 가득했다.
나는 움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건물을 감싼 뿌리가 움직이고 있었다.
구렁이처럼 굵은 몸을 벽에 문대며 천천히 물러난 뿌리가 문을 개방했다.
희미한 달빛과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로 입구가 보였다.
대리석 벽에 둥근 구멍이 나 있었다. 그 어둠 속으로 황제가 걸어갔다.
나는 더 격하게 집에 가고 싶어졌다.
뚜벅뚜벅 대리석 바닥을 울리던 소리가 우뚝 멈추는 순간, 나는 눈물을 삼키고 걸음을 뗐다.
뭐가 됐든 지금 도망가면 황제가 매우 화를 낼 것 같았다.
그리고 저 황제는 내 슬롯에 있지도 않고, 개인적으로 내게 호감도 없으니 보복할지도 모른다.
내 키워드에는 #호러물이 없는데 왜 자꾸 공포 서사를 쌓는지 모르겠다.
익숙하게 하늘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한 번 쳐다봤다.
촘촘히 겹쳐진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별이 유달리 밝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발소리에 의지해 황제를 따라 걸었다. 계단을 한참 올랐을 때, 갑자기 시야가 환해졌다.
창문으로 들어온 환한 달빛 덕분이었다.
나는 유리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창 아래로 숲이 보였다.
이곳은 4층, 입구를 개방하며 물러난 나무뿌리의 윗부분이 듯했다.
끼이이익.
뒤에서 들려온 소음에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계단 앞에 있던 나무 가벽이 움츠러들며 사라지는 소리였다.
그러자 가벽 뒤에 숨겨져 있던 수많은 조형물과 액자 그리고 책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박.
황제의 걸음을 따라 주변으로 먼지가 포자처럼 흩어졌다.
홀 한가운데서 걸음을 멈춘 황제가 우아하게 팔을 뻗어 바닥을 가리켰다.
사아아아아.
바닥에서 돋아난 나뭇가지들이 순식간에 의자를 만들었다.
“앉게.”
나는 그를 따라 쭈뼛쭈뼛 안으로 들어갔다.
“감사합니다.”
그는 말없이 내게 미소를 한 번 짓고는 테이블로 걸어갔다.
나는 엉거주춤하게 그가 만들어 준 의자에 앉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황제는 테이블 서랍에서 성냥을 꺼내 초에 불을 붙였다.
그는 책장과 협탁에 놓인 수십 개의 초를 꼼꼼히 밝혔다.
숨겨진 초를 익숙하게 찾아내는 걸 보니 이곳에 아무도 들이지 않는다는 말은 진짜인 듯하다. 정말 본인이 모든 것들을 관리해 온 모양이다.
따뜻한 빛이 실내를 가득 채우자, 차츰 물건들이 자세히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바닥에 놓인 조형물들을 살피다 그림 하나에 시선을 빼앗겼다.
점묘화처럼 직선과 점으로 그려진 그림이었다.
긴 머리를 늘어뜨린 사람이 검을 높이 치켜든 모습.
나는 이런 그림을 본 적이 있었다.
마왕이 그렸다는 제 아내의 초상화.
설마 하는 마음으로 그림을 유심히 살피는데 AI의 제안이 들렸다.
[마족어를 해석하시겠습니까?]
나는 아직도 초를 켜고 있는 황제의 뒷모습을 보다 얼른 AI에게 답했다.
‘응. 빨리 읽어 줘요!’
[특성 버프 ‘마족어 해석’ ON]
그림 위로 상태창이 겹쳐졌다. 곧 상태창 위로 글자가 채워졌다.
나는 내용을 읽다 흠칫했다.
마왕은 자신이 상대한 여러 군단을 짧게 회상하다 열 번째로 자신을 찾아온 군단의 학살을 서술했다.
[나는 강한 인간을 본 적이 없었다. 하여 그 인간은 최초의 기억이 되었다. 그녀가 죽음 앞의 가장 나약한 모습으로 제 강함을 증명하는 그 순간.]
그때는 편지를 쓰더니, 이번엔 일기를 쓴 모양이다.
마왕의 캐릭터를 이해할 수 없다. 이놈은 대체 어떤 놈일까.
개그캐야, 감성캐야?
문장을 다 읽자 텍스트가 바뀌었다.
[수백 명이었나, 수천 명이었나. 수를 세지 않았으니 알 길이 없다.
설원이 뜨거운 핏물에 녹아 흙바닥을 드러냈다.
수많은 죽음을 지켜보았음에도 멈추지 않더라. 기어코 시체 더미 위로 새로 눈이 쌓일 때까지 버티며 제 몸집만 한 검을 흔들었다. 전멸한 동료 속에 홀로 남은 인간의 모습이 가여워 죽이지 못했다.]
또다시 상태창 페이지가 넘어갔다.
[이길 수 있을 거라 믿는 걸까. 어차피 죽을 거라면 무엇이라도 해 보자는 포기였을까.
그 마음이 궁금했다. 무엇이 그녀의 두려움을 앗아 갔을까.
호기심에 한쪽 팔의 힘줄을 내주었을 때, 나는 그녀의 푸른 눈빛에 서린 두려움을 보았다.]
검 쪽으로 움직인 상태창이 다시 해석을 시작했다.
[하나, 뭐가 두려운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을 깨달았기에 겁을 먹은 건지.
피를 흘린 이는 나였는데, 왜 네가 주춤한 걸까. 물었으나 말이 통하지 않으니 그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다시 제 두려움을 숨기고 칼을 휘둘렀다.
칼날을 잡고 그 여자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하지만 드러났던 찰나의 두려움은 사라지고 피로 얼룩진 얼굴은 다시 분노로 뒤덮인 후였다.]
바람에 흩날리듯 배경으로 넓게 퍼진 머리카락에 상태창이 겹쳐졌다.
[죽음에 직면한 인간은 수도 없이 보았으나, 질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두려움을 숨기려 드는 인간은 처음이었다.
분하다 포효하지도, 목숨을 구걸하며 울지도, 두려움에 떨지도 않았다. 이 자리에서 죽어도 상관없다 믿으며 살고 싶은 마음을 외면하더라.
강한 인간이었다. 이능 한 자락 없는 몸으로 여기까지 버틴 것도 대단했다. 나는 그녀가 살고 싶어 우는 모습을 보고 싶어졌다.]
우는 걸 왜 보고 싶어?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다음 해석을 읽었다.
[다른 모습을 보고 싶다니. 이게 제4 수호성이 말하던 사랑인가 싶었다.]
이분 금사빠인가 봐.
오그라드는 발언에 해석을 그만 읽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나는 손톱으로 그녀의 검을 긁어 내 흔적을 남겼다. 내 마음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지금의 감정을 기억해 두어야 한다. 호기심에 저 얇은 목을 꺾어 버릴지도 모르니.]
아니, 사랑한다면서 왜 죽여요?
이해할 수 없는 마왕의 사랑법에 인상을 쓰다 무언가를 떠올렸다.
잠깐만, 이거 좀 익숙한데.
마왕의 힘줄을 자른 유일한 인간.
검에 새겨 둔 장난스러운 낙서.
카이엘드 1대 가주 이야기 아니야?
그 가주가 여자였어?
혼자 놀라는데 건조한 발걸음 소리가 고막을 간질였다.
어느새 이쪽으로 다가온 황제가 내 옆에 의자를 만들더니 그 위에 걸터앉았다.
그는 나를 보던 시선을 움직여 그림을 쳐다봤다.
“마왕이 직접 그린 그림이라더군.”
황제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진짜인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그는 의자 팔걸이에 손바닥을 둔 채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의 동공이 미묘하게 움직인다. 내 표정을 살피고 있는 것이다.
“마나 데이 카이헬드.”
저 이름이 왜 또 여기서 나와!
움찔하는 나를 보며 황제가 미소를 지었다.
미치겠네.
이 황제도 내 정체를 알고 있는 모양이다. 도대체 어떻게 안 거야.
나는 최대한 동요하지 않은 척 표정 관리를 했다. 그러나 그 표정마저 읽혔는지 황제는 낮은 목소리로 제가 어떻게 그 이름을 알게 되었는지 말했다.
“알렉스 황태자가 언제부턴가 그자의 필사본을 수집하기에 이름을 기억하게 됐지.”
그는 웃음을 지운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다 다시 나를 쳐다봤다.
“여기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자네는 기억하겠지.”
알 리가 있냐고.
그러나 나는 이것들이 무엇인지 선뜻 되묻지 못했다.
저 황제 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나는 황제가 내게 호의적일지 적대적일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이것들을 아는 척 웃음으로 대답해야 할지, 솔직하게 모른다고 털어놓아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고민 끝에 나는 솔직하게 모른다고 말했다.
“죄송하지만 처음 보는 물건들입니다.”
그러자 황제가 나른한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알렉스는 그대를 신뢰하지만, 나는 아니야.”
순식간에 차가워진 얼굴로 그가 고요히 나를 응시했다.
“감히 나를 기만하지 말길.”
무서워.
입안이 바짝 말랐다.
알렉스는 웃으며 제 속을 숨길 줄 알았는데, 이 황제는 그렇지 않았다. 구태여 제 속을 숨길 필요가 없다 여기는 것 같았다.
소심한 나는 울고 싶어졌다.
바닥에서 아지랑이처럼 올라온 부드러운 나뭇가지가 커다란 수정구 하나를 움켜쥐었다.
“마나 데이 카이헬드가 입찰하는 물건은 돈이 얼마가 되든 모두 가져오라 명했지.”
나뭇가지는 아기 손처럼 수정구를 조심스럽게 움켜쥐고는 황제에게 가져왔다.
“전부 몰락한 겨울국과 마족에 관한 물건들이었지. 경매에 나오는 사내 또한 나이가 지긋했기에 처음엔 마나 데이 카이헬드가 어린 귀족 영애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
그는 마족성 모형이 들어 있는 수정구를 흔들었다.
그러자 가라앉아 있던 눈가루가 수정 안을 부유했다.
황제는 차가운 눈으로 주변을 훑어보며 말했다.
“수정구는 그나마 어린 영애의 취향이라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 외의 것들은 도무지 그대의 취향이라는 걸 믿을 수가 없더군.”
그는 책장과 그 앞에 놓인 골동품들에 시선을 주다 다시 나를 쳐다봤다.
“그래. 아끼던 물건들을 다시 보니 기분이 어떤가?”
내가 아끼던 물건?
“궁금했네. 왜 이 모든 걸 잃고도 조용히 숨죽이고 지낸 건지. 4천만 골드에 만족한 걸까, 이에테르 공작에게 들킬까 이것들을 포기한 걸까.”
4천만 골드.
순간 내 통장의 거래 명세서가 떠올랐다. 넉 달 전쯤 내게 4천만 골드를 입금한 F.
나는 눈을 깜빡이며 조금 전 황제가 시선을 주었던 물건들을 쳐다봤다.
설마, 저거 다 내 수집품인가?
나는 조심스럽게 AI에게 저것들이 내 수집품인지 물었다. 그러자 맞다는 답이 돌아왔다.
움찔하는데, 황제가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나는 F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가을을 뜻하는 FALL. 그는 사라진 겨울국의 문자를 은어처럼 사용한 모양이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F가 내게 돈을 입금한 날은 내가 데이지로 빙의한 날 즈음이었다.
알렉스를 만나기 전이고, 그를 슬롯에 담기도 전이었다.
그런데 이 황제는 그때 이미 내 수집품들을 모두 제 황궁으로 옮겨 두었다.
나는 굳은 표정으로 황제를 쳐다봤다.
지금까지 S급 남주 관람권 때문에 알렉스와 엮여 탐사대에 끌려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젠 의심이 든다.
가을국 황족들과 우연히 만난 게 아닌가?
알렉스는 오래전부터 데이지를 알고 있었고, 황제는 내가 타임라인을 시작하자 내 물건을 제 황성으로 가로챘다.
그리고 지금.
나는 가을국 황성에 와서 데이지의 물건들을 보고 있다.
기시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원작.
내 원작에는 두 명의 남주가 있었다. 황태자와 공작.
남주였던 황태자는 데이지를 밖으로 나오게 하려고 그녀의 물건을 빼돌리곤 했다.
황태자가 아닌 황제가 내 물건을 가로채긴 했지만, 그 흐름이 비슷하다.
결국 황성으로 내 물건을 찾으러 오게 되었다는 점에서.
나는 시선을 내려 마족성이 담긴 수정구를 바라봤다.
알렉스가 내 원작 남주인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