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나는 국서의 깨끗하지만 속은 음흉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떫은 눈으로 쳐다봤다.
내가 한때 저놈을 인자하다고 생각했던 게 어이가 없었다.
“물론 전 잘못한 게 없고 억울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국서에게 대충 답하고 다시 봄국 황제한테 말했다.
“폐하, 부디 제가 해결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봄국 황실의 따뜻하고 자애로운 관용 정신을 본받아 무례를 용서하고자 합니다.”
“황실의 따뜻하고 자애로운 정신이라.”
황제가 이를 가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아아, 맞다. 저 아버님 칭찬을 모욕으로 받아들이지!
나는 습관적으로 과한 수식을 붙이며 봄국 황실을 찬양하다 흠칫했다.
그때, 내 품에 안겨 있는 라리사 영애가 내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나는 바로 칭찬의 대상을 바꾸었다.
“제국민들은 라리사 황녀님을 여신의 환생이라고 여기지요. 작년에 파산 신청한 로렌스 백작가에 황녀님께서 친히 금화를 빌려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백작 영애가 유저라 가문이 파산 직전이니 도와달라는 요청에 화답한 것뿐이지만.
라리사는 태어날 때 황제에게 이양받은 제 영지를 팔아 돈을 주었다. 그리고 그 일련의 재정 작업은 그녀의 보호자인 봄국 황제가 처리했다. 그러니 저 폭군이 그 일을 모를 리 없다.
“저뿐만 아니라 봄국 제국민 모두가 라리사 황녀님의 자애로운 마음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가뭄 때는 세금을 징수하기는커녕 제국민이 자립하도록 품어 주셨죠.”
본인 칭찬은 욕으로 곡해할지 몰라도, 자식 칭찬은 아닐 거다.
자식 자랑을 싫어하는 부모는 없다.
그리고 라리사가 이뻐 죽는 황제니 라리사 칭찬은 당연한 사실로 여길 터.
그리고 사실 맞고.
우리 황녀 영애 예쁘고 귀엽고 착하고 사랑스럽잖아. 자기 캐시 털어서 유저들한테 아이템도 나눠 주는 천사란 말이죠.
나는 황제를 다시 쳐다봤다.
날카롭게 벼려졌던 눈가가 느슨히 풀어졌다.
이 아버님은 지금 내가 더 해 주길 원하고 있었다.
나는 쉴 새 없이 라리사 황녀를 찬양했다.
몇 분간 제 딸의 칭찬을 듣던 그가 후후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어떻게 해결할 생각이지?”
“저 또한 황녀님의 마음을 본받아 모욕을 용서하고, 또한 비싼 드레스를 잃어 속상한 나탈리아 영애를 위로하고자 본 셰밍 드레스를 선물하려 합니다.”
“글쎄. 나 또한 라리사 황녀의 옷을 맡겨 보려 했지만, 그 가게는 문을 닫았다던데.”
“본 셰밍의 주인이 제 지인이라 문을 닫기 전에 제게 다섯 벌의 드레스를 만들어 주고 떠났습니다. 그중 나탈리아 영애의 취향일 만 한 드레스 하나가 있는데, 그걸 선물하고자 합니다.”
“본 셰밍 미공개 신상!”
한 영애가 소리를 치다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곧 거친 숨소리가 여러 겹으로 겹쳐 들려왔다.
어린 귀족 영애들이라 그런지 드레스에 관심이 많은 듯했다. 500골드를 제안했을 때도 이런 격한 반응이 아니었는데.
본 셰밍 미공개 신상 드레스라니 다들 눈이 커졌다.
그 반응이 내 안에 숨어 있던 관종력을 자극했다.
나는 슬쩍 손을 들어 푸른 치맛자락을 흔들었다.
“사실 이 드레스도 본 셰밍의 주인 리안 양의 작품입니다.”
바닷가에 온 것처럼 숨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물러나길 반복했다. 들숨에 감탄, 날숨에 질시가 어려 있다.
나는 가을국 영애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탑 부분에 달린 물망초를 손으로 짚었다.
“생명의 이능 부산물을 손수 달아 만든 드레스죠.”
“생명의 이능 부산물?”
무감한 표정으로 관망하던 봄국 황제가 움찔했다.
“네, 제가 가진 생명의 이능 부산물로 제작했거든요.”
가을국 귀족 영애들은 서로 시선을 마주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니까 왜 사람을 함부로 갈궈. 누구는 인맥 자랑, 돈 자랑 할 줄 몰라서 조용히 있는 줄 아냐고.
나는 봄국 황제에게 눈웃음을 짓다 고개를 틀어 나탈리아를 쳐다봤다.
“물론, 나탈리아 영애에게 드릴 옷도 이능의 부산물로 만든 드레스입니다.”
가을국 귀족 영애들은 나탈리아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잘됐다는 눈빛이었다.
지금 입은 드레스를 망쳤다고 안타까워하던 측은한 표정은 모두 사라졌고, 오로지 축하하는 표정만 가득했다.
나탈리아를 아끼는 마음은 진짜였나 보다. 방금까지는 짜증이 났었는데, 실세에게 굽신거리는 정치가 아니라 진짜 친목이었다는 사실에 화가 풀렸다.
10대 소녀들 특유의 ‘내 친구를 건드리다니!’ 같은 분노였나 보다.
갑자기 탈력감이 밀려왔다.
‘……애기들이랑 싸워서 뭐 하냐.’
디아나와 라리사 그리고 국서 덕분에 누명을 벗고 다시 자존심을 챙긴 탓인지 마음이 여유로워졌다.
봄국 황제는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다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좋은 대처군. 레이디의 처세를 기억하지.”
“이것 참 부끄러운 일이군요.”
이건 내가 한 말이 아니었다.
내가 봄국 황제에게 예의상 감사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누군가 끼어들었다.
순식간에 사위가 고요해졌다.
그 탓에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크게 느껴졌다.
자박.
카펫 위를 걸어오는 발걸음이 여유롭다.
봄국 황제의 뒤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가을국 황제였다.
가을국 황제는 봄국 황제에게 미소를 지었다.
“제 불찰로 봄국 제국민이 피해를 입었는데, 보상까지 봄국에서 직접 한다니. 아니죠. 그건 안 될 일이지요.”
맑은 금안이 내 쪽으로 굴러왔다.
“나탈리아 양의 드레스 값은 물론, 데이지 양에게 끼친 폐까지 전부 가을국 황실에서 보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알렉스 아버님은 나를 보면서도 말은 봄국 황제에게 하고 있었다.
소름이 돋았다.
본인이 테이블 다리를 줄여 나를 곤란하게 만들었으면서 날 위하는 척 말하는 게 보통 미친 자가 아니다.
더 웃긴 건 이 상황을 다 아는데도, 알렉스 아버님의 눈망울이 큼직하고 맑아서 진심처럼 느껴졌다는 거다.
진짜 황궁 플레이 나랑 안 맞아.
봄국 황제는 가볍게 가을국 황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럼 그렇게 하시죠.”
“감사합니다.”
가을국 황제가 웃으며 화답했다.
그는 디아나와 국서 그리고 그 뒤에 선 연회 참석자들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분위기가 깨진 것 같은데 더 연회를 이어 가는 건 무리일 것 같군요. 오늘 연회는 여기서 마무리 짓겠습니다.”
디아나와 국서를 의식한 듯 존댓말을 쓰긴 하나, 파티를 끝낸다는 명이었다.
다들 불만은 없어 보였다.
특히 참석자들은 아래로 내려온 권력자들 때문에 잔뜩 긴장하고 있던지라, 파티를 파한다는 말에 안도하는 것 같았다.
나는 라리사를 내려 두고 속으로 박수를 쳤다.
‘조기 퇴근 좋지.’
나도 슬슬 나갈 준비를 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나는 바로 옆에 있던 디아나와 국서에게 먼저 인사를 했다.
“당연한 일이지. 내 친구가 곤란한데 모른 척할 수는 없지 않나.”
디아나가 웃으며 말하자 국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국서는 단아한 얼굴로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나야말로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었는데 다행이군.”
“감사 인사요?”
“레이디가 날 도왔다는 이야기 들었어.”
아, 국서 구명 운동을 말하는 거구나. 그날 내가 힘 좀 보태긴 했지.
“그리고 미안했네.”
국서는 한숨이 담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에게 해를 끼치지 않겠다고 약속했었거든. 조용히 얘기만 나누고 돌려보내 준다고 했었지. 이제 와서 이런 얘기를 해 봐야 그저 변명일 뿐인지만, 그래도 사과를 하고 싶었네.”
그날 향을 피워 날 잠재웠던 일을 말하는 것 같았다.
여기서 말하기는 조심스러운 내용이라 그는 주어를 생략했고, 그 이야기를 더 이어 나가지 않았다.
그는 느릿하게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다시 화제를 돌렸다.
“그대의 작품은 영원히 우리 후손들에게 전해질 거야. 그대가 써 둔 시를 황실 박물관에 걸어 두었으니.”
나는 그런 국서를 물끄러미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꼭 보러 가겠습니다.”
“그래. 그때 제대로 대접하지.”
그와 대화를 마무리하고 봄국 황제 쪽으로도 감사 인사를 했다.
“제가 해결하도록 믿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폐하.”
“아니, 나야말로 오늘 레이디에 대한 오해를 풀게 되어 기쁘군.”
황제가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아, 아빠! 그러면 레이디 데이지와 같이 저녁…….”
“황녀님 덕분에 명예를 회복했습니다. 정말 감사해요.”
나는 라리사가 ‘메이저 에피소드’ 획득을 시도하기 전에 그녀의 말을 잘라 냈다.
라리사는 아쉬운 듯 한쪽 볼을 부풀렸으나 곧 뭔가를 깨달았는지 혼자 아, 소리를 냈다.
아이템 사용이 금지된 게 떠오른 모양이다.
이제 캐시는 휴짓조각이지. 아이템 사용 제한이 풀리면 모르겠다만.
그리고 내게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가을국 황제에게도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처음 인사드립니다. 폐하. 봄국 에스텔라가의 데이지 마야 에스텔라입니다.”
제국의 태양 이런 수식을 하면 좋겠지만, 황제가 둘이나 더 있는데 가을국 황제만 높여 부르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 레이디 데이지. 그대의 이름은 많이 들었지.”
그는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이런 식으로 말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어쩔 수 없군.”
느른히 휘어진 눈매 안에서 금안이 은은히 빛났다. 전신을 쓸듯 아래로 내려간 눈동자가 천천히 올라왔다.
“시간이 괜찮다면 따로 얘기 좀 하지.”
나는 황궁 플레이의 규칙 하나를 알고 있다.
황제의 명을 거절할 수 있나?
목숨을 걸면 가능하다.
즉, 안 된다는 뜻이다.
나는 떨리는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다시 허리를 숙였다.
“예. 폐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면 영광입니다.”
***
나는 워치를 흘깃거리며 황제를 따라 걸었다.
알렉스 아버님은 세계관의 디자인 법칙 덕분에 굉장한 동안이었다.
하지만 아버지 나이뻘이라는 편견 때문인지 알렉스보다는 무게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물론 많은 사람이 보는 데서 만남을 청했으니 내게 해코지를 하지는 않겠다만…….
연회장에 기자들을 불러 둘 정도로 여론을 신경 쓰는 황실이니 격식을 차리겠지만…….
그래도 가을국 황실의 설정을 읽어서 그런지 무서웠다.
황제는 수하도 없이 나를 황실 뒤편 숲으로 데려갔다.
그곳은 밀림에 들어온 것처럼 수풀이 울창했다.
조경을 아름답게 다듬은 게 아니라 자유롭게 자라도록 놔둔 느낌.
통제 중독에 걸린 황실답지 않은 조경이었다.
나뭇잎을 비집고 들어온 희미한 달빛이 바닥을 비추긴 하나, 애초에 숲이 무성하다 보니 길이 어둑했다.
어둠에 싸인 길을 속을 알 수 없는 황제와 나란히 걷고 있으니 두려움은 한층 배가되었다.
호텔로 돌아가고 싶다.
몇 분쯤 걸었을까.
멀리서 성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높은 성이지만 울창한 나뭇잎에 반쯤 가려져 있는지라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때,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미리 말하는데.”
갑자기 황제가 뒤를 돌았다.
“이곳은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는 곳이다. 알렉스도 마찬가지지.”
그는 미소를 거둔 얼굴로 차갑게 말했다.
“들어올 수 없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짧은 질문이었지만, 나는 그가 원하는 답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빨리 대답해야 할 것 같아서 얼른 입을 열었다.